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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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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마석 모란공원에 뒤늦게 도착했다. 전태일 묘 바로 근처에 새로 묘를 파는 작업을 하는 천막이 쳐져 있고 인부들이 불을 피우고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작업을 하는 인부들이 사실은 안기부 요원들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들은 전태일 추도식을 감시하기 위해 묘를 파는 작업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전태일 13주기 추도식이 시작되었다. 참석자들 모두가 숙연해졌다. 청계조합원의 사회로 추도식이 시작되었다. 설교 순서가 되자 조화순 목사님이 설교를 했다. 목사님은 카랑카랑하고 매서운 목소리로 막힘없이 말씀하셨다.

"여기 우리가 지금 전태일의 묘 앞에서 눈물이나 흘리려고 왔다면 그런 추도식은 이제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80년 이후의 노동자들의 상황과 목사님 자신의 나약함을 뼈아프게 고백했다. 참석자 모두 5·17이후에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고 눈물을 흘렸다.

다음은 추도위원장의 추도사 순서가 이어졌다.
추도사를 하는 민종덕 추도위원장
 추도사를 하는 민종덕 추도위원장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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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 당신은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새롭게 돌아와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는 기업주와 권력의 칼 앞에 어디로 인지 사라져 버린 오늘의 암울한 현실 앞에 또 다시 당신은 서서히 분노의 활화산 같은 눈을 뜨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전 사회의 민주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 한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으며 민주화 역시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대한 의식뿐만 아니라, 보다 각성된 노동자들의 사회의식이 없는 한 이룩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 땅의 모든 민주시민의 민주화의 제단 앞에, 당신은 새로운 전태일의 신화를, 터져 나오는 울분과 고통의 폭탄선언을 입에 악물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여기 살아 있습니다."

원풍모방의 방용석 지부장도 결단과 다짐을 또렷하게 말했다. 추도사는 계속되었다. 인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와 블랙리스트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은 저마다 요구조건까지 말하며 추도사를 읽었다.

이어서 전태일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문익환 회장은 '전태일' 이란 시를 낭송했다.

85년 전태일기념관 개관 당시 문익환 회장과 이소선
 85년 전태일기념관 개관 당시 문익환 회장과 이소선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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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하늘아
 내 이름은 무엇이냐
 내 이름은 전태일이다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 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

문익환 회장의 시 낭송은 사자후(獅子吼)처럼 온 산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마지막으로 이소선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모든 것을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어렵고 추운 형편에 잊지 않고 우리를 여기에 이끌어 주시고 참석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우리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이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들이 더욱 더 똘똘 뭉쳐 하나가 된다면 모든 것을 극복 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여기 참석하신 모든 분들 그리고 기억하고 관심은 있으나 참석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의 발걸음마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셔서 지혜와 용기를 주시옵소서. 또한 어지럽고 포악한 위정자들이 회개 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태일 추도식을 마치고 경춘국도를 행진하는 참가자들
 전태일 추도식을 마치고 경춘국도를 행진하는 참가자들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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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 순서를 끝으로 비장한 추도식이 끝났다. 추도식을 마친 참석자 모두는 공터에 빙 둘러앉아 어묵과 막걸리로 허기와 추위를 달랬다. 풍물패들은 장단을 치고 춤을 추며 흥을 돋았다. 촌극 순서에서는 청계 노동자들이 노조 강제해산 이후 더욱 열악해진 노동현실을 재미있게 풍자했다.

촌극을 끝내고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춤을 추었다. 이소선도 풍물 장단에 맞춰 참가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한참 춤을 추다 보니 추위는 물론 그동안의 시름까지도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이소선은 참으로 오랜만에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려 신나게 노니 마냥 즐겁고 흐뭇했다.

춤의 행렬은 1971년 영등포 한영섬유에서 노조설립을 하려다가 회사 측의 사주를 받은 깡패들한테 드라이버에 머리를 찍혀 죽은 김진수 묘소를 한 바퀴 돌았다.

해가 어스름 기울어질 무렵 대열은 산에서 내려와 버스가 있는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모두들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버스 운전기사들은 버스 운임비를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고 버티는 것이다.

이것 또한 정보기관의 압력이 들어간 것이다. 정보기관은 4대의 버스가 서울 한곳에 도착해서 참석자들이 한꺼번에 내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버스를 분산 도착 시킬 꼼수로 버스 운임을 미리 달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다. 이에 추도위원회는 서울에 도착하면 운임을 주겠다고 했다. 이 문제로 주최 측과 운전사들 사이에 실랑이를 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소선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모두들 차에서 내려라. 그냥 서울까지 걸어서 가자!"

이소선이 큰 소리로 각 버스를 향해 소리쳤다.

"운전사들이 돈을 먼저 돌라고 하는데 보나마나 뻔할 뻔자라고. 돈 주면 서울 들어가는 입구 아무데나 우리를 내팽개치라고 기관원들이 압력을 넣으니까 저러는 건데, 우리가 뭐 벽창혼 줄 아나. 안간 다카니까 우리 모두 내려서 서울까지 걸어가자고. 차안에 둔 짐들 다해봐야 버스비도 안 되니께."

그러면서 이소선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이어 참석자 모두가 따라 내렸다. 그리고 풍물패가 나오고 플래카드가 다시 선두에 서고 참석자들은 삼삼오오 어께동무를 하고 열을 지어 모란공원을 빠져 나와 경춘국도에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시위대열이 형성이 되었다.  시위대는 농민가,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 해방가 등을 부르면서 행진했다. 지나가던 차들이 갑자기 나타난 시위대열에 놀라서 주춤주춤 지나갔다.

이렇게 경춘국도를 한참 가는데 추도객을 태우고 왔던 관광차들이 대열 앞에 멈춰 서더니 이번에는 문을 열어놓고 타라고 사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춘국도를 노래 부르면서 신나게 뛰다가 걷다가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지나가는 참가자들이 타지 않고 계속 행진했다.

행진 대열은 이렇게 마석역까지 왔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워졌다. 마석역에서 서울로 가는 방향의 길목에는 전투복 차림을 하고 헬멧과 방패를 든 전투 경찰들이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철통같이 막아서고 있다. 대열은 멈춰 섰다. 국도는 완전히 막히고 구경꾼들은 모여들어 주위 건물 옥상에까지 빽빽하게 들어섰다.

추도식 참석자들은 마석역 앞에서 즉석 집회를 열고 농성하다가 버스에 올라타기로 결정을 내렸다. 모두들 노동자 만세, 노동운동 만세,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고 버스에 올라탔다.

이날의 추도식 행사는 이소선은 물론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가, 해고자, 민주인사 등 그 동안 신군부의 폭압에 억눌렸던 울분을 토하고, 아울러 패배감을 떨쳐내고 자신감과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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