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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자들의 게스트 하우스. 친절한 필리핀 직원들
 배낭여행자들의 게스트 하우스. 친절한 필리핀 직원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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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늘 즐거울 거라고 생각하니? 아니야. 삶이 늘 행복하지 않듯이. 지치고 짜증나고 지루할 때가 있어. 감정이 면도날처럼 날카로워질 때도 있고. 여기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을 때도 있지. 특히 장기여행을 하다보면.

기분이 엉망이야. 우울해. 오늘은 어디를 갈까? 뭘 할까? 생각하기도 귀찮아. 의욕상실인가? '파라다이스'니, '생태계의 보고'니, '독보적인 천혜의 절경'이니, 최고의 미사여구들이 수식어로 따라붙는 팔라완의 엘니도에서 왜?

자연 경관이 너무나 빼어나, 필리핀을 4백여 년 지배했던 스페인 정복자들조차 비경으로 감춰두었다는 곳에 와서, 왜? 이유가 뭐야? 그래, 눈이 휘둥그레지게 아름다운 풍경을 이틀 동안 즐겼지. 그리곤 어제 저녁부터 갑자기 우울 무드에 빠져버렸어. 설마 생리증후군, 갱년기증상 같은 에스트로겐의 영향일까?"

어두침침한 침대에 엎드려 여행일지를 끼적였다. 팔라완 배낭여행 22일째, 엘니도에서 3일째 맞는 무더운 아침이었다.

여행이 늘 즐거울 거라고 생각하니?

아침 6시면 엘니도 타운은 정전이 된다. 오후 3시 넘어 복구된다. 에어컨이 꺼진 좁은 방에 누워있자니 숨 막히게 더웠다. 여섯 명이 같이 쓰는 방이었다. 2층 침대 세 개에서. 다른 투숙객들은 이미 모두 외출한 시각이었다. 아침 8시 50분,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시간이 10분 남았다.

3일 전, 엘니도에 도착해 현지인에게 묻고 물어 찾은 게스트 하우스. 500페소(한화로 약 1만 2천 원)에 아침식사 제공.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방도 공동욕실도 다 비좁지만. 엘니도는 팔라완에서 물가가 가장 높은 곳이다.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밀려오는 곳이니 만큼.

프론트 데스크 위에는 로스앤젤레스, 토론토, 마닐라, 파리, 런던 벽시계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투숙객은 호주나 미국, 유럽에서 온 패기 넘치는 젊은 배낭여행자들. 아시아인은 나 혼자였고, 중늙은이로 보이는 사람도 나 혼자였다.

그만, 더 늦기 전에 추스르고 일어나야겠다. 아침식사부터 해야겠다. 뭘 좀 먹고 나면 기운이 솟고, 기분이 달라질 수 있으니. 아침식사는 6시부터 9시까지, 출입구 옆 낮은 탁자에 뷔페식으로 차려져 있다. 다국적 여행자들이 그 탁자 앞 소파에 앉아 아침을 간단하게 같이 한다. 그때 여행정보를 주고받는다. 어디를 갔었다, 어디가 좋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다, 등등. 전 세계 여행정보가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엘니도에서는 아일랜드 호핑 A코스와 C코스가 인기 있다는 걸 귀동냥했다.

여행정보를 주고받으며 떠들던 사람들이 다 나간 시간, 나 혼자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시리얼에 우유를 타먹고, 빵을 반으로 잘라 한 쪽에 버터를, 한 쪽은 망고 잼을 발라 먹었다. 망고 주스도 한 잔 따라 마셨다. 바나나도 한 쪽 먹고, 블랙커피까지 마셨다. 우울하니 어쩌니 그래도 식욕이 살아있는 게, 컨디션은 멀쩡한 것 같았다.

직원 '존'에게 부탁해, 남은 바나나 한 쪽과 빵 두 개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빈 생수병에 물도 한 병 받아 챙겼다. 가난한 배낭 여행자의 일용할 한 끼 양식이 될 것이었다. 숙소에서 더 엉거주춤하다간 다시 까라질 것 같아 곧바로 외출채비를 했다.

밖으로 나오는데, 배낭을 메고 숙소로 막 들어서던 젊은 여자랑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짧은 커트 머리에 마른 몸매의 젊은 아가씨였다. 한국 여자였다. 아니, 내 착각이었다. 중국 아가씨였다. 나는 계면쩍게 웃어 보이며 얼른 숙소를 빠져나왔다.

엘니도 타운 거리
 엘니도 타운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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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니도 타운 거리. 아일랜드 호핑 투어 홍보 사진들
 엘니도 타운 거리. 아일랜드 호핑 투어 홍보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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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작은 동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쯤 돌면 한 바퀴 돈다. 해변을 따라 동서로 늘어선 두 블록의 도로와, 항구에서 버스터미널 쪽을 향해 남북으로 뻗은 도로를 중심으로, 상가가 밀집해 있는 작은 관광도시이다. 타운 뒤로는 석회암 절벽이 우뚝 솟아 있다. 

숙소, 식당, 잡화점, 슈퍼, 술집, 다이빙 숍들을 기웃거리며 동쪽을 향해 걸었다. 관광객들이 방카를 타고 바다로 나간 시간이라, 성수기 5월의 관광지 골목은 한산했다. 호핑숍 외벽에 붙어있는 아일랜드 호핑 코스 사진에 눈이 머물러 걸음을 잠시 멈췄다.

내게 남은 '오늘'은 얼마나 될까

엘니도 타운 앞바다 풍경
 엘니도 타운 앞바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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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아일랜드 호핑 A코스를 돌았다. 그 전날 1000페소(한화로 약 2만5천 원. 투어 값은 시기와 흥정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에 예약을 해두었다. 12명의 다국적 관광객들을 태운 방카가 아침 9시께 해변에서 출발했다. 나는 한 방을 쓰는 미국 아가씨 제인이랑 독일 청년 레온이랑 같이 탔다. 그 시각 엘니도 해변에선 관광객을 실은 수십 척의 방카들이 일제히 바다로 나선다. 45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바쿠잇(Bacuit) 군도를 향해 서쪽 바다로.
   
크고 작은 바쿠잇 군도의 섬들은 거대한 석회암 덩어리들이었다. 2억5천만 년 이상의 세월을 지나온 기암절벽들. 절벽 밑쪽은 파도에 움푹 파여 바위들이 마치 가분수 같은 형상처럼 보였다. 그 위로 솟구쳐 오른 회색빛 기암절벽은 비바람의 세월에 따라 뾰족뾰족 거칠게 패였거나 구멍이 숭숭 뚫렸다.

투명한 코발트블루 바다 위에 불꽃같은 형상으로 둥둥 떠 있는 바위섬들, 그 절벽에서 자라는 식물들... 자연이 수억 년 공들여 만든 예술작품이었다. 잠시도 눈을 떼려야 뗄 수 없었다. 기묘하게 아름다운 작품들이었다. 여행객들은 감탄사를 터뜨리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엘니도 바쿠잇 군도의 석회암 기암절벽과 바다 풍경
 엘니도 바쿠잇 군도의 석회암 기암절벽과 바다 풍경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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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니도 바쿠잇 군도 풍경
 엘니도 바쿠잇 군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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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니도 바쿠잇 군도 해안 풍경
 엘니도 바쿠잇 군도 해안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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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달린 지 30여 분,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니록 섬의 북쪽에 위치한 스몰 라군(Small Lagoon). 방카에서 내려 절벽까지 100여 미터를 걸어갔다. 바닷물이 허리까지 올라오는 길이었다. 절벽 아래 바위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바위절벽이 동그랗게 사방을 두른, 호수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수심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절벽에 붙어 수초처럼 하늘거리는 말미잘을 구경하며 스노클링을 했다.

바위 뒤 숨겨진 비치로 들어가는 입구
 바위 뒤 숨겨진 비치로 들어가는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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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라군에서 바다가 낮아 방카를 밀고간다.
 빅 라군에서 바다가 낮아 방카를 밀고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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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목적지는 빅 라군(Big Lagoon). 입구부터 수심이 얕았다. 쪽빛 바다가 옥색으로, 더 옅은 옥색으로 변해갔다. 방카의 엔진이 꺼졌다. 필리핀 청년들이 뛰어내려 방카를 밀고 들어갔다. 여행객들은 사방으로 고개를 돌리며, 놀라운 풍광에 취했다. 열대우림으로 뒤덮인 석회암 절벽 아래 호수 같은 바다. 방카를 탄 채 천천히 둥글게 한 바퀴 돌고 나왔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작은 방카가 딸랑이를 흔들며 지나다녔다.

세 번째로 간 곳은 미니록 섬의 남쪽에 위치한 시크릿 라군. 그 다음 코스는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 스미즈 섬이었다. 스미즈라는 일본 다이버가 이 섬에서 동굴 다이빙을 하다가 사망한 섬이라 했다. 여행객들이 하얀 산호모래 비치에서 스노클링을 즐겼다.

아일랜드 호핑 점심
 아일랜드 호핑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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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방카를 몰고 온 필리핀 청년들은 점심을 준비했다. 생선을 굽고 고기를 구웠다. 오이, 토마토를 잘라 꽃봉오리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바위 그늘 아래 차려진 점심 식탁이 산호초처럼 화려했다. 점심을 먹고 스노클링을 했다. 나는 하얀 모래바닥에 무리지어 다니는 하얀 물고기들을 쫓아다녔다. 몸 색깔이 빨강 파랑 원색인 청소물고기들이 그들에게 붙어 다녔다. 하얀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아가미를 들랑거리며. 내 입과 귀와 겨드랑이 사이를 들랑거리는 청소물고기를 상상하며 그들을 따라다녔다. 

세븐코만도 섬 해변 풍경
 세븐코만도 섬 해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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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세븐코만도 비치에서 한 시간 가까이 자유시간이 주워졌다. 과일음료를 파는 바가 있었다. 조용한 휴양지 해변이었다. 그늘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 달콤한 낮잠에 빠진 사람. 나는 스노클링을 하며 열심히 바다를 떠다녔다.

그렇게 바쿠잇 군도의 아름다운 섬들을 떠올리며 동쪽으로 계속 걸었다. 목적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쓸쓸한 부랑자처럼. 한 술집 앞, 나무에 걸려있는 푯말들이 눈에 들어왔다.  
     
'FREE BEER TOMORROW (내일은 맥주가 공짜!)'

이 말은... '내일'이 없으니 공짜 맥주는 없다는 말이었다. 문득, 내게 남은 '오늘'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 궁금증은 '내일'은 없다고 방금 말해놓고, 있는 것처럼 따져보겠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내게 주어진 오늘은, 딱 오늘 하루뿐인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푯말의 다른 농담들도 읽어보았다.   

'We have beer as cold as your ex girlfriend heart.(우리에겐 네 전 여친의 심장처럼 차가운 맥주가 있어.)'
'MEN/ No shirt No service. WOMEN/ No shirt Free drinks.(셔츠를 벗은 남자는 들어오지 마. 셔츠를 벗고 온 여자에겐 술을 공짜로 줄게.)'

피식 피식, 웃음이 났다. 오전이라 술집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오늘밤 저 술집이 문을 열면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윗도리를 벗고 앉아 전 남친의 심장 같은 차가운 맥주를 공짜로 마셔볼까.'

해 떨어질 때쯤 되면 해변의 술집들 앞에 의자와 테이블이 일제히 깔린다. 낮에 바다에 나갔던 여행자들이 거기 앉아 밤바다를 바라보며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신다. 나는 어제와 그제, 그 앞으로 왔다갔다 해변을 어슬렁거리기만 했었다. 

한적한 칼란 비치에서.
 한적한 칼란 비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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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 끝까지 걸었다. 멈추지 않고 더 걸었다. 고급 리조트들을 지나 원주민 마을과 공동묘지를 지났다. 석회암 해변의 바위를 탔고, 해초들이 밀려와 널브러진 모래해변을 걸어갔다. 다리가 아파올 즈음 칼란 비치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작은 모래해변이었다. 나무그늘 아래 사롱을 깔고 앉았다.

간간이 새소리와 매미소리가 들려왔다. 카들라오 섬이 떠 있는 앞바다에서 밀려온 물결이 찰랑찰랑 맑은 소리를 냈다. 어제 아일랜드 호핑을 했던 헬리콥터 섬과 마틴록 섬이 카들라오 섬 넘어 서쪽에 있다. 아일랜드 호핑 C코스였다.  

마틴록 섬에서 내려다 본 타피우탄 해협 풍경
 마틴록 섬에서 내려다 본 타피우탄 해협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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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목적지는 히든 비치였다. 방카에서 뛰어내려 스노클링으로 바위틈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물살이 거셌다. 입구에서 가이드가 한 사람씩 손을 잡고 안 쪽으로 쭉 당겨 밀어 넣었다. 그곳에 또, 고요하고 평화로운 바다가 숨어 있었다.   

마틴록 섬의 시크릿 비치도 석회암 바위들 뒤에 숨어 있는 비치였다. 나는 마치 석회암 절벽으로 에워싸여 있는 그 신비한 장소를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흥분했다. 자랑하고 싶은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옆에 있는 사람에게 "아름답죠? 굉장하죠?" 몇 번이나 물었다.     
    
마틴룩 쉬라인은 성지라고 했다. 섬의 북쪽이 하트 모양인데, 예수님의 심장을 상징한다고. 이 섬엔 방파제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주변 기암절벽 아래의 물색깔이 녹색, 청색, 옥색 등 다양한 색으로 어루어졌다. 바다색이 유독 환상적이었다. 섬으로 100여 미터 들어가면 12개의 기둥으로 세워진 작은 돔 안에 성모마리아상이 서 있었다.

동굴 성당에는 십자가와 동굴성당의 발견, 돔 건축, 이 섬에 살았던 원주민들의 집 등, 성지의 역사가 담긴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거기서 나와 돔 뒤쪽으로 솟아있는 석회암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마틴록 섬과 타피우탄 섬 사이의 해협이 눈 아래 펼쳐졌다. 절벽 꼭대기 따가운 햇볕 아래 앉아 기막힌 그 풍광을 한참 동안 감상했다.   

스타 비치에서 점심을 먹고, 헬리콥터 아일랜드에서 스노클링을 했다. 또 열심히 바닷속을 훑어보며 다녔다. 나는 마치 내 팔다리의 유효기간이 곧 끝날 양, 내 몸을 잠시도 쉬게 놔두지 않았다. 파괴된 산호가 굴러다니고 물고기가 별반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사실 바다 위 절경만큼 바닷속 풍경은 뛰어나게 아름답지는 않았다. 어디든 사람이 많이 찾는 자연은 그렇게 되게 마련이었다.

76살 미국인 배낭객의 한 마디

어쨌든 나로서는 '더 늙기 전에 떠나자' 하고 나선 여행이었다. '온 몸으로 살아있음을 느끼자' 하고. 몸을 사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혼자 동떨어져 바다 멀리 나갔나 보다. 가이드가 찾으러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운이 뻗쳐 반은 물고기가 된 양 헤엄쳐 다녔다.   

4시 너머 숙소로 돌아왔다. 전기가 복구되지 않아 깜깜한 욕실에서 눈을 감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우울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축제가 끝난 거리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쓸쓸한 기운에 휩싸였다.

어제 일을 그렇게 떠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 필리핀 남자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으냐고. 남자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혼자 조용히 있고 싶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자기가 가이드를 잘 할 수 있다며, 술 마실 줄 아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단호한 말투로 '노!'라고 대답하며 가라고 부탁했다. 남자는 금방 일어서지 않고 한참을 내 옆에서 미적거리다가 떠났다. 나는 물을 마시고 빵 하나를 꺼내 뜯었다. 그리고 여행일지를 폈다. 

"여행하다 보면 그래. 날씨 궂어 스케줄 꼬이면 짜증나고, 이동시간이 턱없이 지연되면 열 받고, 푼돈 얼마라도 바가지 썼다 싶으면 기분 잡치고, 동행인과 마찰이 생기면 우울하고, 누군가가 불친절하게 대하면 기분 더러워지고, 게다가 몸이 어디라도 좀 아프면 참담해지지.

여행에서 얻는 해방감, 행복, 자유로움 같은 긍정적인 기분은 싹 사라져버려. 정신수양 높은 누군가는 그런 시시비비에 흔들리지 않겠지만, 나 같은 범인은 평정심이 깨질 때가 있어.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기분이 엉망일까? 아마도... 외로움? 관광지에서 북적북적 '관광 놀이'만 하는 여행도 내겐 그리 썩... "

여행일지를 접고 누웠다. 그때 서양인 커플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은 아이를 안고 곧장 바다로 들어갔다. 물장구를 치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바닷바람에 실려 왔다. 나는 눈을 감았고, 잠들었다. 

오후 1시께 그 해변을 떠나 타운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관광안내소 사무실을 찾아갔다. 알빈 호스타라는 이름의 안내소 소장이 시발탄이라는 바랑가이(마을)를 소개해 주었다. 그의 고향이고 어머니가 살고 계시다며. 내가 찾는 한적한 해변 마을이라고 했다. 나는 내일 아침 당장, 관광객이 북적거리는 이 엘니도를 떠나 그곳에 가기로 했다. 그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넣어주겠다고 했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프론트 데스크 앞에 키 큰 노인이 서 있었다. 76살의 미국인 배낭 여행자였다. 그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이름은 프레트릭, 카우보이로 유명한 아리조나에서 왔다고 했다. 백발을 손으로 쓸어넘기며 그가 말했다.

"아마, 내 인생의 마지막 배낭여행이 될 것 같아요." 


태그:#팔라완, #엘니도, #배낭여행, #아일랜드 호핑 투어,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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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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