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言語)이 역사가 되는 경우가 있다. 진시황 사후 반란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의 예도 그렇다. 그들이 남긴 그 유명한 말, 바로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냐는 것! 천명의 대의와 명분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에 이만한 프로파간다가 또 어디 있겠는가?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각각 한 글자씩 취해 처음으로 황제를 칭하였다 하여 진의 시황제라 한 절대 권력이, 비록 그 인신(人身)이 무너졌다고 해도 권위의 그림자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래서 두 사람이 실로 급급한 생사의 절벽 앞에서 순간적으로 발휘한 기지 치고는 혁명가의 뇌간을 후벼 판 이 벼락 같은 발상은 그야말로 모든 역성 혁명에 최고의 카피(COPY)가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왕조 시대에 모든 군주가 입을 모아 숭상한 카피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것이 아닐까? 혹은 민심이 곧 천명이거나!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은 어질고 현명한 군주였던 정조의 통치이념을 수행하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이상 실현의 카피를 몸소 수행하는 두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만하면 충분히 매력적이다. 우리의 국회와 여야는 그런 카피조차 불법복제를 못하니까 말이다.

김민역을 맡은 김명민 신무기와 새로운 발명품을 개발하는 김민

▲ 김민역을 맡은 김명민 신무기와 새로운 발명품을 개발하는 김민 ⓒ 청년필름


꾸준히 잽을 날리는 영화

이 영화는 우선 편하다. 심각하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설을 앞두고 개봉한 타이밍이 영화의 성격을 대변한다. 스토리도 아주 간단하다. 일본에서 들여온 은괴가 유통 과정에서 함유량에 문제가 생겨 불량 은괴가 점점 많아지자 조선의 경제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김민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官)의 첨병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언제나 든든한 조력자인 서필이 있다.

짧은 대사와 둘의 엎치락 뒤치락 하는 코믹한 콤비플레이를 보고 있노라면 김석윤 감독은 정통 발라드 가수 보다는 래퍼와 같은 스타일로 극을 이끌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막과 장의 구분을 의도적으로 제시한 경쾌한 연출을 보고 있자니 은근 슬쩍 알리의 푸드웍이 떠오른다. 이 영화는 KO 펀치를 사양한다. 하지만 꾸준히 잽을 날린다.

그 데미지가 중반을 지나 후반부에 이를 때 쯤 한 방을 선사한다. 잽을 구사하는 래퍼가 들려주는 이야기, 그래서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가 보다. 하지만 호불호가 극명하다. 웃기되 다소 허망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서필 역을 맡은 오달수, 이 영화에서는 좀 이상하다.

1년에 출연하는 영화가 많기로 유명한 오달수, 우리나라 배우로는 사상 처음으로 출연한
모든 영화에서 총 관객 1억 명을 돌파한 기념비적인 타이틀을 목에 건 명품 조연 혹은 주연 이상의 조연인 그의 연기가 여기에서는 어쩐지 바람 빠진 풍선 같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굳어버린 생계형 유머와 코믹을 잘 믹스해 관객한테 서비스하지만 에너지가 방출된 배터리 같은 모습으로 풍자가 없다.

전작에서 에너지를 과소비한 탓인지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외유를 나간 자의 여유와 심지어 낭만까지 느껴진다. 그는 이 영화에 소풍을 나온 것일까? 참여자라기 보다는 관찰자 혹은 관망자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대체 이 어인 변고인가?

목소리 하나로 놓고 보면 국내 남자 배우 가운데 베스트 5를 오르내릴 김명민 또한 순발력에서는 뒤지지 않지만 시대와 패션만 살짝 바꿔놓으면 그는 영락없는 코믹+액션+첩보+멜로를 얼버무린 할리우드 오락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과장된 웃음이 밉지 않지만 왜(?)라는 의문이 든다. 이런 모습은 불량 은괴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정상 은괴를 불량 은괴로 둔갑해 비자금을 조성, 정승 자리를 노리는 김민의 사형(師兄)이 아니었다면 그의 가벼움은 일탈이 될 뻔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은 다해와 도해라는 두 어린 소녀를 대할 때 김민의 불현듯한 진중함은 극중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것이기에 그의 연기는 어떤 면에서는 변검왕이나 마찬가지다. 문득문득 객석에서 튀어나오는 웃음이 산발적인 이유다.

조선명탐정에 열연을 한 두 주연배우  관아에 붙잡혀 목에 칼을 쓰고 있는 명탐정 콤비 서필과 김민

▲ 조선명탐정에 열연을 한 두 주연배우 관아에 붙잡혀 목에 칼을 쓰고 있는 명탐정 콤비 서필과 김민 ⓒ 청년필름


조관우, 그는 노래하는 개그맨인 개가수도 아니고 노래하는 탤런트인 탤가수도 아닌 연기하는 악사로 등장하는데 그 비중과 연기가 실로 놀랍다. 매서운 눈매를 소유했지만 주는 것 없이 매를 부르는 얼굴을 가진 조악사 역의 저 배우가 누군가 했더니 놀라워라,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에 등장하는 맹인 검객을 연상시키는 액션이 만일 대역이 아니라면 국악에서 끌어온 그의 음악적 내공은 배우로서의 그의 육신에 합격이라는 문신을 새겨준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배우, 바로 이연희! 사람들은 말한다. 연기력이 좀 달린다고. 하지만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국가대표급에 연기까지 잘 한다면 그것이 어디 인간이겠는가?

데뷔 때에 비해서 성실하게 진화한 모습으로 한결 나은 연기를 선보이는 비주얼 종결자는 충분히 맡은 역할을 해내고 관객에게 보는 즐거움 이상을 선사한다. 히사코 역을 맡은 그런 그녀에게 심은경과 같은 레벨의 연기를 주문하는 것은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주문하고 파를 송송 썰어 넣은 양념간장이 없다고 주방장을 달달 볶는 것과 같은 무지와 무례의 소치가 아닐는지…….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그녀는 왜 다시 극의 막바지에 일본으로 떠나는 것일까? 더 큰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라는 혹성탈출 같은 발언은 아직도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감독은 그 순간 안드로메다를 방문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필시 다른 의도가 있으리라. 그러니 여러분도 직접 그것을 음미하시기를.

히사코 역의 이연희 히사코 역을 맡아 열연한 이연희의 스틸 컷

▲ 히사코 역의 이연희 히사코 역을 맡아 열연한 이연희의 스틸 컷 ⓒ 청년필름


'놉', 8백만 비정규직을 말하다

소품과 미술과 의상과 특수효과를 비롯한 이야기 외적인 모든 부분에서 한국 영화의 수준을 안심하고 수긍하게 된 것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지포 라이터를 연상하는, 기름을 바른 라이터 지푸와 콜택시를 연상케 하는 부름배를 비롯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 등장하는 하늘을 나는 수레, 오늘날의 행글라이더와 같은 발명품들이다. 고증 또한 섬세하고 과학적이어서 이젠 어느 것 하나 허튼 것이 없다.

감독이 4년 만에 내놓은 속편은 이런 부분에서 전작을 확실히 뛰어넘는다. 앞서 지난 2011년 1월 개봉한 영화 '조선 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은 478만 관객의 선택을 받았는데 과연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사라진 놉의 딸'은 최종 관객 수가 얼마나 될 것인가도 궁금하다. 일차적으로는 전편의 기록을 넘어서야 할 텐데 일단은 500만은 큰 무리 없이 넘어서지 않을까 싶다.

지난 11일에 개봉해서 현재(15일 기준) 누적 관객 수 100만 돌파를 앞두고 있다니 기대해볼만 하다. 딸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는 보는 내내 묘한 감정이 들 수도 있으므로 문득 문득 울컥할 때를 대비해서 손수건을 준비하는 것도 권하고 싶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놉이 무슨 뜻인가 궁금해 할 것이다. 놉이라는 말은 하루하루 품삯과 음식을 받고 일을 하는 품팔이 일꾼, 또는 그 일꾼을 부리는 일이라는 뜻으로 순 우리말이다. 날일꾼의 전라도 사투리이기도 하며 동시에 경기도 남양주의 사투리인데 굶주림과 관(官)의 횡포로 집을 불태우고 산으로 들어간 자들에 의해 혹은 마지 못해 입 하나 덜기 위해 딸 자식을 몸종이나 기생으로 내다 파는 비정한 '실화'의 희생양이었던 우리의 먼 할머니뻘 되는 여성의 수난사를 그대로 상징하는 비극의 말(言語)이다. 글자 그대로 놉은 오늘날 8백만에 달하는 비정규직의 입장에서 보면 말(言語)이 역사가 된 경우다.

그 신란스러운 역할을 열연한 다해와 도해를 보다보면 서서히 이 영화가 줄기차게 잽과 랩으로 선보인 '웃음'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수긍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적'이 단 한 번의 럭키 펀치로 KO 된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연신 잽을 날려야 하는 것은 하늘이 선사한 생존의 지혜이자 비상구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으랴. 랩은 결국 역사가 될 말(言語)인 것이다. 그게 희망이라거나 혹은 용기라고 굳이 말하지 않기로 하자. 그렇게 말하기에는 우리의 본능이 희망하는 카피가 너무나 오래되었기에 이제는 교체가 필요한 시점이니까. 제 3탄이 기다려지는 것에 넌지시 그 기대를 걸어보며 리뷰와 평론 사이의 잡설을 줄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후아이엠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조선명탐정 김명민 오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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