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영화 '도라에몽:스탠바이미'가 개봉했다. 원작자 후지코 F 후지오 탄생 80주년을 맞아 3D로 제작했다.

지난 12일 영화 '도라에몽:스탠바이미'가 개봉했다. 원작자 후지코 F 후지오 탄생 80주년을 맞아 3D로 제작했다. ⓒ NEW


"진구야, 숙제는 다 했어?!"

누군가는 괴상하게 찌그러진(?) 목소리를, 누군가는 빛 바랜 만화책의 냄새를 기억한다. 머리에 달기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는 '대나무 헬리콥터', 열기만 하면 생각한 곳으로 갈 수 있는 '어디로든 문'이 떠오른다. 1969년 태어난 로봇, '도라에몽(ドラえもん)' 이야기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는 '모질이' 초등학생 진구를 돕기 위해 미래에서 로봇이 온다. 진구의 장래를 걱정한 후손이 보낸 로봇 도라에몽은 진구를 행복하게 만들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다. 진구는 문제가 생기면 늘 도라에몽에게 의지하지만, 점차 '혼자서도 잘 하는 아이'로 성장한다.

1980년부터 올해까지, 지난 35년 동안 '도라에몽'은 극장판만 서른 편이 넘게 나왔다. 이번 작품은 가장 인기가 좋았던 TV 애니메이션 중 7가지 에피소드를 3D로 다시 만든 것이다.

볼거리는 충분했다. 20년 만에 만난 고양이 로봇과 '모질이' 초등학생 진구는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올드팬'으로서 옛 추억을 즐겁게 되새길 수 있었다. 매사에 덜렁대는 진구의 항상 뻗어있는 머리카락, 도라에몽이 통통한 몸매로 뒤뚱거리는 모습 등이 3D로 섬세하게 그려졌다. 대나무 헬리콥터로 도시를 날아다니고,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달리는 장면들은 마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스펙터클했다.

하지만 성인 관객으로서는 아쉬움이 더 컸다. 진구가 행복해지기로 결심하는 과정과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은 차별적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에는 위험해 보였다. 주인공들이 여성을 보는 관점, 학교폭력에 대처하는 방법 등을 되돌아봤다.

게으르게 살면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와 결혼한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도구인 '타임 텔레비전'에 비친 자신의 20년 뒤 모습을 보고 진구는 이렇게 소리친다.

"퉁순이와 결혼?! 안 돼!"

퉁순이는 진구를 괴롭히는 친구인 퉁퉁이의 여동생이다. 오빠를 똑 닮아 얼굴도 몸집도 크다. 주먹코에 두꺼운 입술, 점을 찍어놓은 듯한 눈을 가졌다. 도라에몽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지금처럼 게으르게 살았을 때의 네 미래"라고 진구에게 조언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못생긴 여자와 결혼하고 운도 따르지 않는 등(타임 텔레비전은 진구가 취업을 하지 못해 직접 차린 회사에 불이 나 다 타 버린다고도 예언한다)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메시지로 읽힐 법하다.

자신의 미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진구는 인생 목표를 세운다. 예쁘고 착해 모두에게 인기 있는 여자 아이인 이슬이와 결혼하겠다는 것. 이슬이의 손을 붙들고 다짜고짜 "행복하게 해 주겠다" 다짐한 것도 잠시, 진구는 이내 자괴감을 느끼고 포기해 버린다. 그리고는 이슬이를 피하기 시작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 같은 남자와 있으면 이슬이가 불행해질 거야."

위의 과정에 여성은 없다. 이슬이는 친구들과 눈 덮인 산을 오를 만큼 활동적이고, 퉁순이 역시 훗날 만화가가 돼 자신의 길을 걷는 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구의 생각은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성을 다분히 수동적인 존재로만 보는 시각이다. 원작 만화가 연재를 시작한 지 50년 가까이 지나서일까? 낡아도 너무 낡았다.

약하면 당한다, 그러니 힘을 길러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진구는 매번 친구들에게 얻어터지고 골탕을 먹는다. 언제나 진구의 문제를 해결해 주던 도라에몽이 갑자기 미래로 떠나게 되자, 진구는 고민에 빠진다. 이별 전날, 진구는 별안간 골목대장 퉁퉁이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해가 지도록 맞고 또 맞는다.

"혼자 힘으로 이기지 못한다면 도라에몽이 안심하고 미래로 돌아갈 수 없다고!"

진구는 완전히 짓이겨진 얼굴로 이렇게 외친다. 오기로 버텨 결국 퉁퉁이에게 항복을 받아낸다. 뒤늦게 이 장면을 본 도라에몽은 잠이 든 진구 옆에서 밤새 울다가 미래로 돌아간다.

 진구는 퉁퉁이에게 맞아 얼굴이 온통 망가졌지만, 도라에몽은 이 과정을 통해 진구가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진구는 퉁퉁이에게 맞아 얼굴이 온통 망가졌지만, 도라에몽은 이 과정을 통해 진구가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 NEW


진구는 상습적인 학교폭력의 피해자다. 맘씨 좋은 이슬이를 빼면 딱히 도와주는 친구도 없고, 교사와 부모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관심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 '왕따'에 가깝다. 왕따를 비롯한 학교폭력의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노력에만 기댈 수는 없는 문제다.

'도라에몽'에서 그려지는 학교폭력의 해결 방식은 대부분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그대로 갚아 주는 것이다. 그나마도 가해자보다 힘센 조력자가 도와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복수다. 진구는 퉁퉁이와의 결투에서 어쩌다 한 번 이기지만, 그게 전부다. 며칠 뒤면 괴롭힘은 다시 시작된다. 싸워 이기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인물들이 폭력에 대처하는 방식은 동시대 일본 소년만화의 레파토리인 "이기려면 강해져야 한다"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개인책임'만을 묻는 사회를 넘어

누군가는 "아동용 만화를 보고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느냐, 귀여운 캐릭터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테다. 하지만 영화 속 진구의 모습에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우리 사회가 겹쳐 보여 맘이 편치 않다.

학교 성적이 또래들보다 낮고, 내성적인 데다 낮잠 자는 것이 취미인 아이들이 '미래의 실패자'로 낙인찍히게 될까 두렵다. 운동에 재능이 없고, 말주변도 없는 남자 아이가 "이 다음에 예쁜 여자를 만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다짐하게 될까 두렵다.

유년시절 나와 비슷한 '루저' 진구에 감정이입해 더불어 울고 웃었던 팬으로서, 그가 나와 함께 어른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도라에몽 차별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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