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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는 32살 노처녀 브리짓이 커플로만 이루어진 식사 자리에 끼어 어색하게 저녁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매끈한 얼굴을 한 커플들은 행복에 겨워도 너무 겨웠는지 그만 이성을 잃고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브리짓에게 던진다.

"왜 요즘 삼십 대 여자들은 결혼을 못하는 거지?"

장난기와 심술궂음이 뒤섞인 커플들의 무례한 시선이 브리짓의 당황한 얼굴에 쏠린다. 하지만 우리의 브리짓이 어디 호락호락하던가. 그녀는 질문에 질문으로 맞받아친다.

"이혼한 커플이 네 커플 중 한 커플이던가요, 세 커플 중 한 커플이던가요?"

나중에 브리짓의 연인이 될 마크가 브리짓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세 커플 중 한 커플이요."

나는 정확히 이 순간부터 마크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십 대 초반이었던 내가 왜 이 영화를 보며 삼십 대의 결혼 못한 노처녀에 감정이입이 됐는지 모르겠다. 내 미래를 예견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결혼에 대한 환상, 기대 같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결혼은 미루면 미룰수록 좋다는 생각이었다. 안 해도 그만이었고. 결혼에 쉽게 달려들지 못했던 데에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었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어서 결혼한다는데, 결혼해서 행복한 사람을 보기 어려웠던 이유도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긴 했을 테다.

결혼에 대한 이런 나의 입장을 이야기 할 때마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꺼리면서 다분히 현실적인 친구들은 후회하게 될 거라며 겁을 줬다. 나이가 들면 내가 그때 왜 그렇게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을까 하며, 후회막급일 거라는 얘기였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확실히 '후덜덜' 해지긴 했다. 혼자 살다 아무도 모르게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이 현실적인 친구들하고라도 자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 것 같았다.

결혼, 나도?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 표지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 표지
ⓒ 웅진 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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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내 생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결혼, 나도?'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내 일상을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왜 결혼을 하고 싶지? 왜일까?'라는 질문에 여러 대답이 줄을 이었지만, 엄마의 대답이 내 모든 대답을 압도했다.

"왜긴 왜야. 때가 된 거지."

그렇다면 앞으로 혹시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결혼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나 결혼을 해 본 적이 없어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해 적절한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마침 로버트 롤런드 스미스의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을 읽었다.

책에서 로버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 대부분이 겪게 되는 삶의 단계, 단계에 성찰의 순간을 부여한다. 태어나 걸음마를 떼고, 학교에 진학한 후 시험을 치르고, 첫키스를 경험하고, 취직, 사랑, 중년의 위기, 은퇴, 죽음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단순히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철학을 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결혼에도 철학이 스며들어 있다. 꽤 심오한 무언가가.

결혼식에 가면 언제나 보게 되는 장면이 있다. 나는 왜인지 이때마다 주책 맞게 눈물을 흘리곤 하는데, 바로, 신랑, 신부가 진심을 담아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는 순간이다. 신부는 부끄러운 듯 조그맣게, 신랑은 기다렸단 듯 씩씩하게 '네!'라고 증인 앞에서 선서한다. 약속을 깨지 않겠다는 의미로. 결혼은 이렇듯 두 사람간의 약속을 바탕으로 한 동맹이라고 로버트는 말한다.

결혼은 '미래'를 함께하자는 약속인 동시에 미래를 '함께하자'는 약속이기도 하다.

바로 이 약속에 결혼의 심오함이 새겨져 있다. 결혼은 누구나 알고 있듯 결혼 당사자 상호간의 무거운 약속이다. 무슨 약속인가. 미래에 대한 약속이다. 그런데 현자들은 말한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미래는 불확실하다는 그 사실 하나뿐이라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아무도 미래를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약속하는 것이다. 그것도 수많은 증인들 앞에서. 너만을 사랑하겠다고.

결혼이란, 운명을 소유하는 것이다

지금은 결혼을 해 두 아이를 낳고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아직 첫키스 경험도 없었던 시절, 그 친구는 진지한 태도로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결혼하지 않을 거야. 결혼했는데 더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어떡해."

그랬던 그녀도 결혼식 당일 나를 비롯한 증인들 앞에서 이렇게 약속했다. 너만을 사랑하겠다고. 로버트는 이 말은 생각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미래'에도 '너만'을 사랑하겠다는 건, 종교 지도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불확실한 미래를 본인의 통제하에 두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약속한다는 것은 우리 의지로 미래를 지배하려는 의도, 바꿔 말해 미래에 일어날 삶의 변화를 미래에 관한 개인적인 구상에 종속시키려는 의도를 천명한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되는대로 대처하려 하거나 모방할 만한 훌륭한 삶의 추상적 관념에 의지하기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미래의 사태를 통제하려 한다.

미래를 통제하지 못하면 미래가 우리를 통제할 것이며, 우리는 운명의 바다에 휩쓸리거나 다른 사람의 계획에 종속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약속과 의지는 서로 같다. 물론 결혼식에서는 의지가 확고하게 천명된다. 미래는 원래 너무 넓어 통제하기 어렵지만 약속은 그 미래를 통제하고 길들일 수 있다.

미래를 통제하고 길들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로버트는 결혼은 두 당사자가 자신들의 운명을 소유하기로 결정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행복하기만 할 것 같던 결혼 생활에 갑자기 뛰어든 심하게 매력적인 그 또는 그녀, 가난, 병, 변심, 노화 등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결혼식 날의 서약대로 상대방만을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겠다는 것은, 본인의 운명을 스스로 소유하겠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결국 결혼에서의 약속의 의미는 이렇듯 한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다. '약속은 인간의 힘, 세계를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키겠다는 대담함'이라고. 책을 읽기 전에 품었던 나의 질문은 결혼은 무엇인가였다. 책을 통해 얻은 이 질문에 답은 확실하고도 간명했다.

'결혼은 약속이다.'

결혼은 약속이라는 걸 누가 모를까. 결혼식에 가게 되면 매번 보는 것이 젊은 연인들의 결혼 서약인 걸.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그 무게가 실로 무겁게 여겨진다. 사랑하니까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 가 아닌 것이다. 사랑하니까 당신과 나의 미래, 운명을 책임지겠다, 가 맞는 것이다.

홀홀 단신인 나의 미래와 운명 앞에서도 아무것도 모르겠기에 쩔쩔매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결혼은 두 사람의 미래와 운명이 걸려있는 셈이 된다. 결혼은 그만큼 무겁다. 무거운 걸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 앞에서 또 약속이란 걸 한다. 결혼하자고 한다. 죽도록, 영원히 사랑하자고 한다. 그래서 저자인 로버트는 글을 이렇게 끝맺은 걸까.

결혼을 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토록 함께 하리라는 고결한 사기에 가담하게 된다.

지금은 사기라도 좋다는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로버트 롤런드 스미스/웅진 지식하우스/2014년 10월 27일/1만3,500원)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 - 자전거 타기에서 첫 키스까지, 학교에서 이사까지 내 인생의 20가지 통과의례

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지음, 남경태 옮김, 웅진지식하우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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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20가지 통과의례

태그:#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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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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