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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일도 여기 있을 거야 - 카스(카슈가르)
▲ [당신에게, 실크로드 13] 우리는 내일도 여기 있을 거야 - 카스(카슈가르)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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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안에게 카메라를 빼앗기다

공안에게 카메라를 뺏겼다. 카스의 인민공원 앞 광장 앞에서였다. 인민공원 입구를 찍고 있었는데 광장 구석에 있던 공안들이 날 부른다. 자신들을 찍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단 못 들은 척하고 공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옆에 있던 위구르 할아버지가 내 얼굴을 지긋이 들여다본다.

"야, 너 부르는 거 같은데?"

별 수 없이 공안 앞으로 갔다. 녹색 봉고차가 두 대 있고 진압용 방패를 든 공안이 열 명 정도 근처에 서 있었다. 직급이 높아 보이는 사람이 가자마자 내 카메라를 낚아챈다.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영어로 크게 떠들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고 난 대한민국 국민이다 등. 중국인처럼 생긴 여자가 영어로 떠들고 있으니 공안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모택동 동상을 바라보는위구르인
▲ 인민광장 모택동 동상을 바라보는위구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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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국인이 아닌 걸 알자 공안은 사진을 몇 장 지우더니 카메라를 돌려줬다. 일단 카메라를 돌려받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멋대로 남의 사진을 지우다니, 자존심 상한다. 목소리 높여 항의하려다가, 다시 카메라를 뺏길 거 같아서 소심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내 사진을 지웠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공안들은 웃더니 손짓으로 '빠이빠이' 한다. 그만 가라는 거다.

나중에 숙소의 중국인들에게 물어보자 "그건 네가 위구르 여자 복장을 하고 있어서 그랬을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 날 위구르족으로 알고 불렀다가, 아닌 걸 알고 별 말 없이 되돌려 보냈을 거라는 거다. 위구르족 복장을 한 여자가 비싼 카메라를 들고 중국 공안 사진을 찍고 있으면 얼마나 수상하겠냐는 친절한 설명도 해준다. 설명을 들으니 더 화가 난다. 그래도 큰 문제 없이 끝나서 다행이긴 하다.

놀이공원이 있다.10위안을 내면 귀신의 집에 갈 수 있는데 꽤 무섭다..
▲ 인민공원 놀이공원이 있다.10위안을 내면 귀신의 집에 갈 수 있는데 꽤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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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는 중국의 마지막 여행지다. 이곳 역시 옛 교역로의 중심이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과 남쪽의 실크로드가 교차하는 도시다. 현대의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넘어 파키스탄으로 가거나, 이쉬케르탐이나 토르갓 패스를 넘어 키르기스스탄으로 향한다. 카스는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와도 국경을 맞대고 있다.

기도하는 사람들
▲ 이드가 모스크 기도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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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무치가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행정상의 수도라면 카스는 정신적 수도라는 느낌이다. 카스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군인들과 장갑차는 여전하지만, 위구르족 비율이 많아서인지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루무치보다 차분하다. 버스를 타도 대부분 위구르인이다. 날 한족으로 보면 어쩌나 싶지만 오히려 이들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버스에서 내릴 때 무거운 배낭을 다시 메려고 낑낑거리고 있으니 한 위구르족 소녀가 얼른 와서 도와준다.

카스의 매력은 구시가다. 네모반듯한 황토색 집들이 미로 같은 골목을 따라 늘어서 있다. 가장 큰 모스크인 이드가 모스크 주변에는 재래시장이 있다. 아침이면 노인들이 느긋하게 당나귀를 끌고 신선한 야채를 운반한다. 코너를 돌면 화덕에 빵을 굽는 빵집이 있고, 피를 뚝뚝 흘리는 양고기들이 걸려 있다. 처음에는 양고기가 걸려 있는 것만 봐도 질색을 했는데, 점점 적응했다. 나중엔 잘린 양머리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손질하는 걸 봐도 아무렇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다. 

나 좀 구해줘!
▲ 순서를 기다리는 양 나 좀 구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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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양머리는 물로 깨끗하게 씻은 후, 불에 그을린다. 요리에 사용된다고
▲ 양들의 지옥 잘린 양머리는 물로 깨끗하게 씻은 후, 불에 그을린다. 요리에 사용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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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야?"

과일을 사는데 한 위구르인이 내 가방에 붙은 태극기를 가리키며 물어본다.

"응, 한국인이야."

내 평생 한국인인 게 이렇게 뿌듯하던 적이 있을까. 그날 태극기의 도움을 한 번 더 받았다.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음악소리가 들렸다. 소형트럭에 악단이 타고 위구르 전통악기로 연주를 하고 있다. 촉이 왔다. '행사겠구나' 싶어서 얼른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식이었다. 일단 밀고 들어갔다. 갑작스런 한족 얼굴의 출연에 사람들은 당황한 눈치다. 얼른 가방의 태극기를 보여주며 "한국인이에요"를 외쳤다. 사람들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날 신랑 신부 가족들과 사진을 찍으며 위구르인의 결혼식을 함께했다. 태극기가 아니었으면 들어서지 못했을 거다.

골목에서부터 '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신랑을 무등 태워 신부집으로 들어온 다음, 광란의 파티 시작~
▲ 위구르인의 결혼식 골목에서부터 '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신랑을 무등 태워 신부집으로 들어온 다음, 광란의 파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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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첫 날은 동네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시장에 갔다. 어제 과일을 산 가판대 할아버지가 내 머리의 스카프를 가리키며 엄지를 치켜든다.

"코레알릭, 야커수.(한국인, 최고.)"

하루 만에 카스가 좋아졌다.

신장의 잔다르크, 향비

신장위구르자치구. 중국 지도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위구르족은 투르크계 민족인 돌궐의 후손이다. 이들은 2000년 이상 이곳에 살며 실크로드 중계무역을 발전 시켰다. 그러나 1759년 청나라 건륭제 때 중국으로 편입되고 만다. 1944년엔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곧 중화인민공화국이 무력으로 점령했고, 1955년 다시 중화인민공화국에 병합되고 말았다.

때문에 신장 지역의 반한(反漢) 정서는 뿌리 깊다. 특히 카스는 19세기 반청운동의 중심지였다. 이 운동에는 위구르인의 정신적 지주 '호자' 가문이 있다. 호자라는 말은 '마호메트의 후예'라는 뜻으로 존경으로 사용된다. 카스 시내에서 5km 정도 가면 이 호자 가문의 묘인 '아팍 호자의 묘'가 있다. 초록색 타일로 이뤄진 돔 형태의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아팍 호자는 이 지역의 강력한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였다. 이 무덤에는 호자가문 5대 72구의 시신이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일명 향비묘, 예쁜초록색 타일로 되어 있다
▲ 아팍호자의 묘 일명 향비묘, 예쁜초록색 타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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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가 유명한 이유는 향비 때문이다. 몸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고 해서 향비라고 불려졌다 한다. 향비에 대해선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전해지기로는 아팍 호자의 손녀인 향비는 청나라의 건륭제의 첩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베이징에 도착한 그녀는 건륭제의 갖은 회유에도 정절을 지키다가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혹은 태후에게 독살 당했다고도 한다.

그렇게 타지에서 죽은 '신장의 딸' 향비, 그 시신을 위구르인들이 나무 가마에 실어 3년에 걸쳐 이곳으로 운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건물 내무에는 향비의 가마라고 전해지는, 나무 가마가 하나 있다. 청의 황제에 저항한 위구르 여인, 향비. 이 이야기에는 나라 잃은 사람들의 자존심이 실려 있었다.

타지에서 죽은 향비를 실어왔다는 나무 가마
▲ 나무가마 타지에서 죽은 향비를 실어왔다는 나무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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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 역사 속의 향비라는 인물은 전해지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건륭제의 부인 중에 향비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인물은 없다. 서역 출신으로는 용비라는 인물이 있었으나, 이팍 호자의 손녀도 아닐 뿐더러, 건륭제의 총애를 받으며 28년간 베이징에서 살았다. 그리고 55세의 나이에 죽어 황제와 함께 허베이에 있는 청동릉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향비의 이야기에 중국 정부는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져서 유적지 안내문을 읽어봤다. 안내문에는 향비에 대한 전설은 없고 용비의 설명만 나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위구르 첩과 황제의 사랑은 중국 내 서로 다른 민족의 대단결을 뜻한다."("Love between this Uygur maid and the Emperor is an evidence for great unity among different ethnic groups in China.")

그럼에도 향비의 향기는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기념품 파는 코너에 가자 향비가 갑옷을 입은 그림이 있었다. 갑옷은 잔다르크가 입을 만한 서양식 갑옷이다. 실제로 향비가 저런 옷을 입을 리는 없겠지만 청과 저항하는 위구르인의 정서를 반영한 그림으로 보인다. 그 갑옷 입은 향비의 그림 앞에서 한 위구르 부부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내가 그림을 보고 '향비(시앙페이)'라고 아는 척을 하자 그 부부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이파르한이야."

'이파르한'은 위구르 사람들이 향비를 부르는 이름이다. 그들에게 향비가 실제로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향비는 건륭제의 용비가 아니라 위구르 사람들의 이파르한이었다. 빼앗긴 자존심을 되살려주는 갑옷 입은 잔다르크였고, 아픈 상처를 위로해주는 향기 나는 꽃이었다.

 "시앙페이(향비)?" "아니야, 이파르한이야"
▲ 갑옷입은 향비 "시앙페이(향비)?" "아니야, 이파르한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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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비묘를 나서는데, 향비묘를 가리키는 이정표 글귀가 보인다.

"카스에 오지 않으면 신장에 왔다고 할 수 없다."

맞는 말이긴 하다. 카스는 아직도 신장 위구르 사람들의 자존심이었다.

 "카스에 오지 않으면 신장에 왔다고 할 수 없다 (Not been to Kashgar, Not been in Xinjang)"
▲ 이정표 "카스에 오지 않으면 신장에 왔다고 할 수 없다 (Not been to Kashgar, Not been in Xin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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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내일도 여기 있을 거야"

내일 중국을 떠나 키르기스스탄으로 간다. 마지막으로 구시가를 돌아다니며 여전히 남의 집 대문에 집착하고 있는데, 베이징에 있는 친구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중국에서 마지막 날이구나, 어때? 너만의 이야기는 찾았니?"

친구 조슬린은 미국인 여성이고,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하다. 그녀는 베이징에서 외신 라디오 뉴스 프로듀서로 일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어느 날 그녀는 베이징 거리에서 액세서리를 팔고 있는 티베트 여인 잔타와 만났고 그녀의 이야기를 독립영화로 만들어냈다.

 "Nowhere to call home" 베이징에 살고 있는 티베트 여인의 이야기다
▲ 조슬린의 영화 "Nowhere to call home" 베이징에 살고 있는 티베트 여인의 이야기다
ⓒ tibetaninbeij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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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베이징에서 그녀 집에 묵으며 그 다큐멘터리를 봤다. 그동안 본 티베트 관련 다큐멘터리들은 하나같이 일관된 시선이었다. 티베트는 늘 독립이 필요한 나라, 저항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의 나라였다. 하지만 조슬린의 영화는 달랐다. 영화 속에는 티베트의 독립이나 민족성에 대한 내용은 단 1초도 나오지 않는다.

잔타는 티베트 여인이다. 그리고 상처뿐인 고향을 떠나 베이징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생활인이다. 또 자신의 아이가 중국 공산당의 교육시스템 아래서 하나라도 더 배우길 원하는 어머니다. 조슬린은 잔타의 친구로서 또 이야기의 내레이터로서 삶을 향한 잔타의 투쟁에 함께 한다. 그렇게 영화는 당면한 티베트인의 문제와 현실을 보여주었다.

베이징에서는 내내 시름시름 아팠다. 떠남에는 늘 불안이 함께 한다. 긴 여행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이런 내게 조슬린은 말했다.

"너도 여행을 할 만큼 했고, 새로운 것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충분히 했잖아? 이제 너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덧붙였다.

"날 봐, 누가 내 나이에 안정된 직장을 팽개치고 새로운 일을 택하겠어? 물론 덕분에 늘 자금난에 시달리긴 하지만 그래도 후회는 안 해. 잔타의 이야기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거든."

이들의 우정은 조슬린을 새로운 도전으로 이끌었다
▲ 조슬린과 잔타 이들의 우정은 조슬린을 새로운 도전으로 이끌었다
ⓒ tibetaninbeij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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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슬린은 50살이 넘었다. 그리고 이제 막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 시작은 잔타라는 한 여인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이었다. 그녀 말을 듣고 나니 여행에 대한 개념이 잡혔다. 신기한 이국문물과 아름다운 경치만 본다면 여행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한 공감이 없으면 여행은 그저 돈을 쓰고 오는 거대한 장기 쇼핑이 될 뿐이다.

이젠 여행을 하며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지 그들의 눈으로 보고 싶어졌다. 그것이 모이면 그녀 말대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조슬린에게 어떤 답문자를 보낼까 고민하며 걷다가, 위구르 여자 아이 두 명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봤다. '우리처럼 고무줄을 하네~' 신기한 마음에 다가가서, 일단 서로 한자로 이름을 교환했다. 몇 명의 아이들이 더 왔다. 나는 아이들에게 카메라 작동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깔깔대며 함께 사진을 찍고 그날 학교에서 배웠다는 춤을 함께 췄다. 위구르의 전통춤이라고 했다.

"여기 앉아있다가 내가 부르면 일어서는 거야", "이렇게?"
▲ 춤 배우기 "여기 앉아있다가 내가 부르면 일어서는 거야",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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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이 아이는 짧은 머리때문에 남자아이로 오해받지만 어엿한 여자아이입니다. 손가락에 봉숭아 물도 있어요.
▲ 춤 배우기 *중요: 이 아이는 짧은 머리때문에 남자아이로 오해받지만 어엿한 여자아이입니다. 손가락에 봉숭아 물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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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신나게 놀다보니 날은 점점 어둑어둑해지고 아이들은 집에 가야 한다며 일어섰다. 그러더니 내게 물어본다.

"우린 내일도 여기 있을 거야. 내일도 올 거지?"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내일은 중국을 떠난다. 못 온다고 할까, 아니면 일단 거짓말을 할까. 한참 망설이다가 번역기에 입력했다.

"내일은 못 와."

아이들 표정엔 실망이 가득하다. 다시 번역기에다 썼다.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숙소로 돌아가며 조슬린에게 답 메시지를 보냈다.

"여행은 순조롭게 하고 있어. 일단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생긴 것 같아."

다시 그녀로부터 "걱정했는데 여행 잘하고 있는 거 같다"는 답이 날아왔다.

여행 32일째. 중국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른 마지막 날이다. 내일은 천산산맥을 넘어 키르기스스탄으로 간다.

"내일도 또 함께 놀자"
▲ 고무줄 놀이 하던 아이들 "내일도 또 함께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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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은 연재한 부분, 파란색은 앞으로 연재할 부분. 그리고 현재 위치는 카스입니다.
▲ 실크로드 전체 여정 빨간색은 연재한 부분, 파란색은 앞으로 연재할 부분. 그리고 현재 위치는 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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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진행형 이야기입니다. 더블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



태그:#실크로드, #카스, #카슈가르, #신장 위구르 자치구, #향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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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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