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포기를 모르는 세 남자 이야기 - 쿠처
▲ [당신에게, 실크로드 12] 포기를 모르는 세 남자 이야기 - 쿠처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대륙의 산아제한

기차는 천산산맥을 넘다말고 잠시 쉬었다. 우루무치에서 쿠처로 가는 기차다. 차창 밖으로 설산과 집 몇 채가 보였다. 저 멀리 까만 점의 모습을 하고 말을 탄 사람들이 지나갔다. 저녁시간이다.

어쩐지 쓸쓸한 마음이 되어 있는데, 같은 칸의 위구르족 아가씨가 툭툭 친다. 공용으로 쓰는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받아 왔단다. 쓸쓸한 마음은 넣어두고 얼른 컵라면 끓일 준비를 했다. 중국 기차 여행은 주로 3층 침대칸이 있는 잉워(硬臥)를 사용했다. 2층 침대가 있는 루안워(軟臥)는 가격이 1.5배 정도 비싸다. 우리 칸엔 다리가 불편한 한족 할머니와 나 그리고 젊은 한족 커플, 언어장애가 있는 위구르족 커플이 함께 했다.

한족, 위구르족 할 것 없이 몸이 불편한 한족 할머니를 함께 보살폈다. 할머니는 내게 간단한 중국어를 가르쳐주고, 나는 한국 사진을 보여주었다. 민족도 종교도 다르고 심지어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함께 여행하니 어쩐지 가족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루무치에서 쿠처로가는 길
▲ 천산산맥 우루무치에서 쿠처로가는 길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우루무치를 떠난 지 17시간 후, 쿠처에 도착했다. 아직 오전 6시다. 숙소에 도착해 욕실부터 갔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일회용 샴푸, 칫솔, 치약 그리고... 콘돔? 작고 납작한 박스에 두 개나 들어있다. 오마이갓, 이것이 바로 '대륙의 산아제한 클래스'인가.

그동안 주로 유스호스텔이나 민박에 묵다보니 제대로 된 호텔은 처음이었다. '중국의 다른 호텔도 이게 기본 비치품인 걸까?' 잠시 궁금했지만 내가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중국에 대해서 누군가 '무엇을 생각하든 상상이상'이라더니 전혀 엉뚱한 곳에서 허를 찔린 기분이다.

이슬람 사원인 쿠처 대사와 그 동네 돌아보니...

시 외곽으로 나가는 관광지의 택시기사를 여기서 구할 수 있다. 흥정 필수
▲ 쿠처 버스 정류장 시 외곽으로 나가는 관광지의 택시기사를 여기서 구할 수 있다. 흥정 필수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이 옥백추(玉白菜)는 '많은 부를 맞이한다'는 뜻의  遇百?(yub?icai)와 비슷한 음이어서 사랑받는다고
▲ 중국의 배추숭배 이 옥백추(玉白菜)는 '많은 부를 맞이한다'는 뜻의 遇百?(yub?icai)와 비슷한 음이어서 사랑받는다고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쿠처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면 위구르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나온다. 이슬람 사원인 쿠처 대사를 둘러보고 그 동네를 천천히 돌아봤다. 황토색 집들과 아름다운 대문이 어우러진 동네다. 

투루판에서도 인상 깊게 생각했지만, 신장의 집들은 집집마다 서로 다른 대문을 만든다. 한 동네에 같은 형태의 대문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첫 번째 집이 파란색을 칠한 나무대문이라면 옆집은 노란색을 칠한 쇠대문이고 그 옆집은 나무를 아름답게 조각한 대문이다. 비둘기를 기르는 집도 많았다. 무슬림은 비둘기를 성스러운 새라고 여긴다.

이 할아버지는 머리 자르러 오신게 아니고 수염 다듬으러 오셨습니다
▲ 위구르 이발관 이 할아버지는 머리 자르러 오신게 아니고 수염 다듬으러 오셨습니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돌아오는 길에 당나귀 마차를 탔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다른 사람들처럼 휙 올라탔다가 내릴 때 같이 내렸다. 아마 우리나라 마을버스처럼 구간별 운행인 것 같다. 내려서 보니 시장이다. 매실 철인가 보다. 매실을 파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꼬치구이 파는 곳은 언제나 사람들이 몰려있다.

우루무치와 달리 한족의 얼굴을 한 내게도 경계가 없다. '한족이야?' 하고 먼저 말을 걸어주는 위구르족도 있다. '한국인'이라고 대답을 하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주변이 잠시 축제분위기가 되었다. 우루무치를 떠나자 위구르 사람들은 다시 친절해졌다. 다행이다.

오? 너 한국인이라고?
▲ 위구르 할아버지 오? 너 한국인이라고?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한국인...한국.. 어디보자... KOREA, 이거 맞지? 한국?
▲ 위구르 할아버지 한국인...한국.. 어디보자... KOREA, 이거 맞지? 한국?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쿠처의 첫 번째 남자 - 지적인 남자

쿠처에는 운강, 용문, 둔황과 더불어 중국의 4대 석굴 중 하나인 키질석굴이 있다. 사실 그 외에는 볼거리가 없다. 그래서 석굴사원에 지친 많은 여행자들이 쿠처를 그냥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엔 내게 이번 여행의 영감을 준 세 남자가 있는 도시다. 구마라습과 한락연 그리고 고선지 장군이다.

카테고리로 나눠본다면 '지적인 남자', '예술적인 남자', '용맹한 남자'다. '돈 많은 남자가 없네' 혼자 아쉬워하다 정신 차렸다. 어서 현실의 남자에게 눈을 돌려야 할텐데...

키질석굴 특유의 다이아몬드 모양의 벽화와 파란색 안료
▲ 석굴내부 키질석굴 특유의 다이아몬드 모양의 벽화와 파란색 안료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키질석굴은 실크로드의 주요 교역도시로 번성을 누리던 시절, 쿠처국의 왕들이 조성한 석굴이다. 황량한 고비사막을 지나왔는데 푸른 백양나무 숲이 보인다. 이곳 역시 오아시스다. 지금까지 발굴결과로는 총 250여개의 석굴이 있고, 그중 70여 개에 벽화가 남아있다. 저 산 너머에는 아직 발굴이 안 된 석굴도 많다고 한다.

석굴 내부는 온통 파란색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파란색 안료는 당시엔 귀한 보석인 아프가니스탄산(産) 청금석에서 빼낸 색이다. 이 동굴을 다 칠할 만큼의 안료였다면 그 가격이 상당했을 것이다.  옛 사람들에게 이곳은 얼마나 환상적이었을까. 밤에 홀로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할 때 파란색이 일렁대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키질석굴은 인도에서 발생한 석굴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벽화에 묘사된 구자국 사람들은 곱슬머리에 눈이 크고 윤곽이 뚜렷하다. 이들은 이란계 토하리인으로 알려져 있다. 키질석굴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파란색 외에도 다이아몬드 문양이다. 과거 중국에는 장식을 위해 꽃과 구름을 그렸지만, 기하학적 무늬는 없었다고 한다. 이 기하학적 무늬는 페르시아에서 발생해 키질석굴을 지나 중국 내 다른 석굴까지 닿았다.

 구마라치바라고도 하고 불교에서는 나습이라고도 한다
▲ 키질석굴 구마라치바라고도 하고 불교에서는 나습이라고도 한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키질석굴 앞에는 구마라습의 청동좌상이 있다. 지난번 화청지에서 당현종과 양귀비의 조형물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이곳 구마라습 좌상엔 감탄했다. 깡마른 어깨와 골반, 힘껏 다문 입과 예민한 턱선, 생각에 잠긴 듯 잔뜩 찌푸린 날카로운 눈매... 까칠한 그의 모습은 뒷모습으로 보면 더욱 멋지다.

공(空)을 공(空)이라 말한 사람, 구마라습. 그의 아버지는 지금의 인도인 천축국 사람이고, 어머니는 당시 구자국 왕의 누이동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7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출가해 학승으로 명성을 높였다. 때는 혼란의 오호십육국시대. 학식 있는 승려를 선망했던 전진의 왕 부견이 장수 여광을 시켜 구마라습을 데려오게 했다. 그러나 그가 전진으로 향하던 중, 전진은 동진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 여광은 후량의 왕이 되어 구마라습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를 사나운 말이나 소에 태운 후 떨어트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괴롭힘의 절정은 승려인 그를 강제로 쿠차의 왕녀와 결혼시킨 것이다. 결혼하지 않으면 여인을 죽인다는 협박에 구마라습은 파계를 하고 말았다.

고난의 17년이 지났다. 마침내 후량이 멸망하고 후진이 세워졌다. 장안으로 온 구마라습은 불경 번역을 시작한다. 그리고 <금강반야경>, <법화경>, <유마힐경>을 포함한 300여권의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도 그의 번역이다.

뛰어한 학문적 성과는 이루었지만 파계승이라는 꼬리표는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연꽃에서 연꽃만 볼 뿐, 진흙은 보지마라"라는 말을 남겼다. 파계를 했던 자신의 삶을 논하지 말고, 자신이 번역한 경전을 읽으며 진리를 깨우치라는 뜻이다.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사실 우리는 늘 본질을 보기보다 가십을 소비하며 즐긴다. 우리 뇌는 얄밉게도 편한 것을 쫓아간다. 본질은 마주하자니 골치 아프고, 허상은 쉽고 단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눈 부릅뜨고 본질에 맞설 때 비로소 진리는 연꽃처럼 피어난다. 산스크리트어 순야다(śūnyatā)를 공(空)이라 번역한 구마라습. 번뇌로 가득했던 삶에서 그는 끌까지 진리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기에 우리에게 공(空)이라는 가르침을 전해 줄 수 있었다.

쿠처의 두 번째 남자 - 예술적인  남자

키질석굴은 예배굴과 승방굴 등으로 되어 있다. 승방굴은 작은 공간에 창문 하나. 그리고 흙 침대와 책이나 소지품을 놓을 수 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다. 오롯하게 수행만을 위한 장소다. 작은 불상을 두고 명상하는 승려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이곳에서 불상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늘 깨어있으라 지켜봐주는 준엄한 스승이었을 거다.

10호 굴에 도착하자, 가슴이 뛴다. 실크로드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면서부터 이곳에 꼭 와보고 싶었다. 화가 한락연의 흔적이 남은 승방굴이다. 입구에 화가 한락연의 사진이 있고, 벽에는 그가 남긴 글귀가 새겨져있다. 내용은 키질석굴의 미적 가치와 벽화를 약탈한 외국인 고고학자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함께 지켜나가자는 다짐이다.

한락연은 당시 연변에서 태어난 조선족 화가이자 예술사학자였다.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와 9년 동안 프랑스유학을 했던 엘리트였고, 또 일제의 침략에 맞서는 항일운동가기도 했다. 그는 키질석굴의 아름다움에 반해 이곳을 외부에 알려내고, 여러 편의 모사도를 그렸다.

이렇게 한락연은 어려운 조국의 사정과 차별에도 굴하지 않고 미술가로서 또 항일운동가로서 활동을 펼쳤지만, 1947년 원인모를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그 후 중국 미술사에서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혼용된 독창적인 화풍으로 '중국의 피카소'로 추앙받고, 한국에서는 2005년 그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보훈처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처음 한락연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김호동 교수의 <황하에서 천산까지>라는 책에서였다. 티베트족, 몽골족, 회족, 위구르족 등 중국내 소수민족의 역사를 다룬 책인데, 이 책에 그의 그림이 다수 실려 있었다. 소수민족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이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색상의 그림 안에는 고된 삶을 살고 있는 소수민족의 애환이 잘 드러나 있다. 약자의 입장에서 소수민족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책의 내용과 한락연의 그림은 잘 어우러져서 인상에 깊게 남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이 구절을 노트에 적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진정한 아픔을 모르고 과연 그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 김호동, <황화에서 천산까지>

서울의 삶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도 페이스북으로 만나는 사람들도 그저 피상적 관계일 뿐이었다. 우리는 삶 속 그럴싸한 것을 일부만 잘라내고 확대해 전시한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왜곡이다. 아는 사람은 늘어가지만, 내가 이해하거나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는 일상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인간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까 생각할 때, 조언을 준 것이 이 책이었다. 상대의 아픔을 들여다보라고. 그럼 그 사람을 알게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책에 실린 한락연의 그림을 보면서 그 답에 확신을 얻었다. 그의 그림이 힘을 지니는 것엔 그 스스로가 소외된 소수민족의 삶에 더욱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자세의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가 내놓는 결과물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할 때 더욱 강한 목소리를 지니듯이, 그림도 아는 것을 그릴 때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림에 나타난 치열한 현실인식과 소수민족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이 그의 삶을 대신 설명해주고 있었다.

길 위에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이해할 것인가. 키질 석굴에서 한락연을 만나 다시 여행의 다짐을 되새겨보았다.

쿠처의 세 번째 남자 - 용맹한 남자

쿠처의 세 번째 남자는 고선지 장군이다. 고선지 장군을 찾아 쿠처고성으로 나섰다. 택시기사에게 크게 한문으로 써서 보여주었으나 잘 모르겠단다. 일단 구글지도의 GPS를 보여주며 여기로 가달라고 했다. 그리고 길을 헤매길 한참 후, 그는 날 무슬림 공동묘지 한가운데 내려줬다. GPS상으로는 여기긴 하다. 택시 기사는 한참을 괜찮겠냐고 묻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떠났다.

구글맵스에서 쿠처고성을 검색하면 정확하게 이곳에 도착한다. 실제 쿠처고성은 여기서 15분정도 떨어져있다.
▲ 무슬림의 공동묘지 구글맵스에서 쿠처고성을 검색하면 정확하게 이곳에 도착한다. 실제 쿠처고성은 여기서 15분정도 떨어져있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무덤 너머에 쿠처 고성이 있을까 가로질러 봤으나 아무것도 없다. 결국 물어물어 논밭과 마을을 건너 도착한 곳, 나무가 빽빽한 좁은 길 앞이다. 아무래도 동네주민 공동 쓰레기장 및 화장실인 것 같다. 온통 쓰레기에 똥 지뢰밭이다. 한참 걷다보니 길 중간쯤에 표지석이 하나 보인다. 쿠처 고성이라고 적혀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길옆에 있던 이 다 무너진 흙벽이 고성의 잔해인가보다. 허탈하다.

작은 통로를따라 흙벽이 조금 쌓여있다
▲ 쿠처고성 작은 통로를따라 흙벽이 조금 쌓여있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쿠처는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던 곳이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에서 이곳을 '중국 군사의 대규모 집결처다'라고 서술했다. 이곳은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이 안서 절도사로 있으며 서역정벌을 했던 전초기지였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들, 당시 군인은 유민신분으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신분상승이었다.

그는 스무 살에 군인이 되어, 11년 만에 절도사로 승격했다. 그리고 해발 4600m의 파미르 고원을 넘으며 서역정벌에 앞장섰다. 영국의 고고학자 오럴 스타인은 "고선지의 원정은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업적을 뛰어넘는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당시 멀리 떨어진 아랍에서는 중국의 왕을 고선지로 알 정도였다. 서쪽 실크로드의 모든 나라는 그의 지배영역이었다.

그러나 멸망한 나라의 유민으로서 그의 삶은 쉽지 않았다. 그가 지역사령관으로 토번을 함락하고 개선했으나, 그의 선임이었던 부몽영찰은 욕을 퍼부으며 "개의 창자를 먹을 고구려 놈, 개똥을 먹을 고구려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신을 거치지 않고 승전보를 황제에게 직접 고했다는 거다. 어느 직장에서나 무능한 상사는 쓸데없는 걸로 꼬투리를 잡는다. 고선지의 마지막 역시 암울했다. '안록산의 난' 때 장안을 수비하다 자신의 옛 부하에게 모함을 받고 처형된다. 그의 억울한 죽음에 부하들은 고선지장군은 죄가 없다고 울부짖었다 한다.

투르판 교하고성에서 만난 고선지가 어린 소년이었다면, 쿠처에서 만난 고선지는 중원이 좁을 정도로 기상이 넘치던 청년 고선지다. 이번 여행을 하며 그를 파미르고원, 힌두쿠시 산맥에서도 다시 마주칠 거고, 마지막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만날 거다. 실크로드는 고선지의 길이기도 했다.

쿠처는 세 남자외에도 정 많은 위구르사람들이 인상적이다. 양꼬치와 라그만도 맛있다.
▲ 골목길 쿠처는 세 남자외에도 정 많은 위구르사람들이 인상적이다. 양꼬치와 라그만도 맛있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늘 삶에 영감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구마라습은 고난의 삶을 살면서도 진리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았고 한락연은 소수민족이라는 설움을 딛고 예술가의 혼을 불태웠다. 고선지는 노예나 마찬가지인 유민의 신분에서 서역 72개국을 정벌한 '서역수호신'이 되었다.

우리는 늘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순리를 따르라고 충고한다. 쉽게 '불가항력'이라는 단어와 '계란에서 바위치기'라는 비유를 든다. 하지만 언제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한 이들은 있었다. 그리고 그 삶들은 지금껏 그 흔적이 굵게 패인 채 남아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매혹당하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주어진 현실을 거스르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삶이었다. 서역의 작은 도시 쿠처,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세 남자와 함께한 잊을 수 없는 도시로 남았다. 

덧붙이는 글 |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진행형 이야기입니다. 더블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



태그:#실크로드, #쿠처, #구마라습, #한락연, #고선지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