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에 관련된 이야기를 금기시하는 풍토는 서양보다 동양이, 동양에서도 유교적 문화가 지배하던 동아시아권이 더 깊은 경향이 있다. 이런 동아시아에 비해 성의식이 상당히 개방적인 유럽의 경우 포르노 숍은 물론 포르노 배우도 당당히 직업배우로 인정받으며 각종 영화제에도 참석한다.

또한 이성 간 사랑뿐 아니라 동성 간의 사랑도 국가 차원에서 점점 인정해가는 추세다. 아직은 동양 사람들이 넘어서기 힘든 다양성과 포용력 때문인지 유럽이나 북남미를 여행하는 동양인들로서는 길거리나 공원 등지에서 민망한 장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좋고 나쁨을 논할 수는 없다. 단지 사회문화적 현상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도 조선 초기나 고려시대, 혹은 이전의 삼국시대 기록을 보면 남녀 사이의 연애가 어느 정도 자유로웠고, 여성의 지위도 남성에 비해 크게 불평등하지 않았던 기록도 볼 수 있다. 또한 동성 간의 연애에 대한 기록도 흔치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 현재, 한국의 성문화는 아직도 '소곤소곤'대며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것처럼 밝은 대낮에 대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가 됐다. '어떻게 그런 얘기를 다 하느냐'는 식으로 부끄럽고 낯 뜨거운,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워야 할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기회에 <색즉시공>이나 <몽정기>처럼, 성에 대해 발칙하고도 노골적이지만 소중한 '사랑 찾기'에 대해 풀어내는 영화를 한 편 소개하고자 한다.

잘 나가던 워킹 걸, 성인용품 가게를 열다

영화 <워킹 걸> 조여정, 클라라, 김태우 주연의 유쾌발랄한 19금 사랑영화

▲ 영화 <워킹 걸> 조여정, 클라라, 김태우 주연의 유쾌발랄한 19금 사랑영화 ⓒ 메가박스(주)플러스앰


장난감 회사의 마케팅 팀장으로 일하는 백보희(조여정)는 회장의 눈에 들어 차세대 사업 계획의 PT를 맡게 되는데…. 아뿔싸! 그가 회장님을 비롯한 임원들이 즐비한 회의석상에서 공개한 차세대 장난감은 바로 성인용품이었다. 민망한 생김새의 각종 기구들이 쏟아져 나오며 그녀는 사색이 되는데, 밤새워 준비한 PT는 물 건너가고 그 자리에서 해고되고 만다. 어찌된 일인 걸까?

그녀가 야심차게 준비한 신제품은 같은 아파트에 살며 성인용품점을 운영하는 오난희(클라라)와 택배가 바뀐 것이다. 회의 장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는 회사에서 잘리고 집으로 돌아온 보희. 난희에게 분풀이를 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간다.

한바탕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의외로 보희와 난희는 어딘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어느 날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데 술자리를 나온 보희는 난희의 성인용품 숍에 구경을 간다. 난희가 추천해 준 기구를 수차례 망설임 끝에 사용해 본 보희, 그녀는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섹스리스 부부는 서로 어디를 바라보는가?

영화 <워킹 걸> 결혼 이후 남녀는 각자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는가?

▲ 영화 <워킹 걸> 결혼 이후 남녀는 각자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는가? ⓒ 메가박스(주)플러스앰

보희와 그녀의 남편인 구강성 교수(김태우)는 섹스리스 부부다. 가장 최근의 부부관계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강성은 워커홀릭인 아내가 사랑스럽지만 부부관계에 통 관심이 없는 보희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 보희는 남편과의 은밀한 관계보다 회사 업무를 보며 짜릿함을 느낀다. 사소한 일로도 다투는 등 틀어지던 둘의 관계는, 결국 그를 가출하게 만든다.

잘 나가던 보희 역시 직장도 잃은 데다 남편도 없는 싸늘한 방에서 홀로 긴 밤을 보낸다. 그 와중에 난희를 만나며 성인용품에 푹 빠지게 된다. 보희는 사업을 접기로 한 난희에게 사업비를 대주고 공동 사장으로 명의를 올려놓는다. 아울러 장난감 회사에서 마케팅 팀을 이끌던 실력을 발휘해 단숨에 성인용품 숍을 정상궤도로 올려놓는다.

승승장구하던 난희와 보희는 각자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아픔을 치유해주는 사이가 된다. 그때 난희는 보희에게 강성을 데려오라고 충고한다. 보희는 자신도 강성을 간절히 원하고 있지만 차마 부르지 못했던 마음을 접고 난희가 조언해주는 대로 강성을 찾아간다.

"사랑하면 이런 것은 필요 없지 않아?"

지금은 죽고 없는 난희의 옛 연인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다.

난희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연인이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이성을 찾지 못하고 게이인 남성들과 친분관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 대한 목마름은 그녀를 성인용품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 그녀가 성인용품 숍을 열게 된 것도 사랑에 대한 아픔과 떠나 보내지 못한 사랑 사이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보희 역시 모든 열정을 회사에 쏟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전업주부가 되며 그녀의 인생에서 갈 곳을 잃고 만다. 해야 할 일도 없고 사랑을 나눌 남편도 없다. 그녀는 난희와 함께 숍을 운영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그녀를 사랑했던 강성의 눈빛과 손길의 따스함을 잊지 못한다.

지난 2010년, <한겨레>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20~40대의 부부관계가 현저히 적다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부부는 별것도 아닌 일이 부부 싸움으로 이어지거나 지속적인 불만으로 쌓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황혼 이혼이 증가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부부관계라는 주장도 나온다.

신혼 초의 달콤함은 잠시, 아이들이 생기고 커가면서 남편은 가정 밖의 사람이 되고 아내는 육아에 치여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이 발생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부만의 여행시간을 갖는다든지 사소한 것까지도 대화의 주제로 삼아 친밀도를 높이는 것,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육아 분담도 중요하다. 하지만 덧붙여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부부관계는 그들의 삶을 더 풍성하고 끈끈한 감성의 씨실과 날실이 되어주는 역할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성(性)에 대한 담론이 공론화될 수 있을까?

영화 <워킹 걸> 성인용품을 착용하고 딸의 축구시합에 간 백보희! 음량에 맞춰 작동되도록 설정된 기구가 작동을 시작하자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비명을 질러댄다

▲ 영화 <워킹 걸> 성인용품을 착용하고 딸의 축구시합에 간 백보희! 음량에 맞춰 작동되도록 설정된 기구가 작동을 시작하자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비명을 질러댄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앰


성에 대한 이야기는 양지와 음지의 모든 면을 가지고 있다. 햇빛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수도 있고, 축축하고 어두운 그늘에서 꿈틀대는 지렁이처럼 대중의 시선을 피해 땅 속으로 숨어들어가 그들만의 세계를 건설하기도 한다.

성에 대해 적당한 담론이란 건 정말 쉽지 않을 거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만큼은 말이다. 그래도 꾸준한 시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학교에서 실시하는 성교육도 모자란 감이 있고, 가정에서도 자녀들에게 성을 주제로 한 질문에 제대로 상담을 해 줄만한 부모는 많지 않다.

박진표 감독의 영화 <죽어도 좋아>  이젠... 죽어도 좋아! 
내 나이 일흔셋, 그녀를 만났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

▲ 박진표 감독의 영화 <죽어도 좋아> 이젠... 죽어도 좋아! 내 나이 일흔셋, 그녀를 만났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 ⓒ 영화사 청어람

성교육은 한참 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이나 결혼을 앞둔 성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2002년에 개봉했던 박진표 감독의 영화 <죽어도 좋아>에서 보는 것처럼 성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이해는 중장년층을 너머 노년층에도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성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함께 해줄 상담자 역할은 모든 연령대를 아우른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때 '아름다운 우리들의 성'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던 '구성애' 신드롬은 일부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음지의 성을 양지로 끌어내 함께 고민하고 나누자는 의미에서 상당한 호응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후 일부 단체나 전문 강사들이 출현하여 꾸준한 강의와 상담활동으로 어느 정도 의식전환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살아온 역사와 문화가 다른 서양의 방식을 그대로 옮겨오는 건 문제가 있다. 과거 '구성애'식의 성 담론이 사회에 충격파를 던져주고 '성'이라는 주제를 대중 앞으로 끌어왔다면 이제는 우리만의 방법을 연구해야 할 때이다. 바로 내 아이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나와 내 동반자와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이란 주제를 음지에서 활동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독버섯을 키우는 것과 같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왜곡된 성의식을 심어주기도 하며 정상적인 이성관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양지에서 따뜻하고 열린 눈으로 보는 시도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워킹 걸>류의 '19금 섹시멜로 영화'가 정직한 연기와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가 제대로 결합한다면, 사랑하는 연인과 손가락 틈새로 영화를 보더라도 찜찜한 마음보단 유쾌한 웃음을 짓고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벗기만 하는 배우? 조여정과 클라라의 재발견

영화 <워킹걸> 몸과 마음의 사랑을 확인 한 보희와 강성은 그들 사랑의 선물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본다. 한편, 난희 역시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그녀들의 사업은 해외진출을 앞두고 있다. 다시 그들의 사랑에 장애물이 찾아올까? 정답은 본인들만 안다.

▲ 영화 <워킹걸> 몸과 마음의 사랑을 확인 한 보희와 강성은 그들 사랑의 선물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본다. 한편, 난희 역시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그녀들의 사업은 해외진출을 앞두고 있다. 다시 그들의 사랑에 장애물이 찾아올까? 정답은 본인들만 안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앰


영화 <워킹걸>은 해피엔딩이다. 보희와 강성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재결합하고, 난희도 새로운 남자(표경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물론 성인용품 숍도 해외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어 앞날이 창창하다.

조여정은 전작 <인간중독>이나 <방자전>에서 상당한 연기력을 보여줬지만, 여전히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어 있었다. 조여정은 이번 작품에서 클라라와의 찰떡궁합으로 능청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싶은 여성상을 만들었다. 클라라가 조금은 냉소적인 웃음을 깔고 '난희'역을 소화한 것도 의외의 발견이다.

TV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에서 대대장급 포스를 보여줬던 '라미란'은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강성 역의 김태우야 말할 필요 없는 연기자이다. 특히나 섹시 멜로에서 보여주는 그의 연기는 낯설면서도 남자라면 누구나 공감 가는 안쓰러움을 충분히 표현해 주었다.

거기에다 온갖 야한 상상을 자극하는 등장인물의 이름(백보희, 오난희, 구강성, 표경수)이나 차량 번호판 숫자는 이 영화가 얼마나 디테일하게 성인 코믹을 살리려 했는지 보이는 대목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드라마가 늘어지지는 않는다. 대신에 좀 더 과감한 결말을 끌어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하는 장르이긴 하나 그저 B급으로 치부하기에는 아까운 영화다. 연기력과 연출의 세밀함이 돋보이는, A급과 B급사이의 영화라 불러주고 싶다.

워킹걸 조여정 클라라 김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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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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