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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프놈펜에 위치한 주 캄보디아 프랑스 대사관 전경. 1975년 프놈펜 함락 직후 약 17년 동안 버려졌다가 지난 1992년 다시 대사관건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수도 프놈펜에 위치한 주 캄보디아 프랑스 대사관 전경. 1975년 프놈펜 함락 직후 약 17년 동안 버려졌다가 지난 1992년 다시 대사관건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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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살고 있는 캄보디아 여성 웅 빌롱(75)씨는 지난 4일(이하 현지시각) 프랑스 법원 판사의 최종 판결문을 듣는 순간, 그만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무려 15년이나 끌었던 지루한 법정싸움을 통해, 남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규명하려 애썼던 그녀의 그간 노력이 결국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

이날 법원은 1975년 4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이 함락됐을 당시 프랑스정부가 론놀정부 고위관료들을 '킬링필드'의 주역인 크메르루주군에게 인계했다는 혐의와 그 책임 등에 대한 선고를 했다.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내 웅 빌롱씨가 당시 론놀정부의 고위관료였던 남편 웅 버은 호우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75년 4월 10일 프놈펜 국제공항 활주로에서였다. 남편은 딸과 조카 2명을 데리고 캄보디아 국적 고물항공기에 오르는 그녀를 안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편을 본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 프랑스 집 거실에 놓인 TV 화면을 통해서였다. 4월 17일, 수도 프놈펜이 크메르루주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는 소식이 방송전파를 탔다. 이때 남편이 론놀정부 수뇌부들과 함께 캄보디아주재 프랑스대사관으로 피신하는 모습이 화면에 잠시 비쳤다. 남편 손에 들린 서류가방도 선명히 보였다. 그 안에는 미화 3만 달러란 거액이 들어 있었다. 혹시 모를 비상상황에 대처하란 뜻에서 처가에서 건넨 돈이었다. 방송을 본 뒤 그녀는 '이제 남편은 안전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크나 큰 착각이었다.

프랑스 대사관서 쫓겨난 남편, 그 후론 볼 수 없었다

장관 출신에 정부 대변인이었던 그녀의 남편은 대사관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정부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정부에 즉각 망명을 신청했다. 그러나 모두 거절당하고 말았다. 결국 대사관에 들어간 지 사흘 후인 4월 20일, 남편은 프랑스 경찰에 의해 강제로 대사관 문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밖에는 AK(에이케이)소총으로 무장한 10대 크메르루주 군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은 그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 이후로 남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1970년 시하누크 국왕을 쫓아낸 쿠데타의 주역 론놀 장군과 더불어 친미성향의 공화국 정권을 이끌었던 노로돔 시릭 마딱 왕자, 당시 총리였던 롱 보렛은 결국 지금 미국대사관 자리에 있던 스포츠 센터 수영장에서 크메르루주군에 의해 즉결심판을 받고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편 웅 버은 호우씨도 비슷한 시기에 처형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날 최종 판결문을 통해 엠마뉴엘 듀코스(Emmanuelle Ducos) 판사는 "1975년 4월 20일 당시 캄보디아 정부 인사들이 대사관을 빠져 나오는 당시 상황에 대해 여전히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이들을 인계 달라는 크메르루주정권의 최후통첩에 남편 웅 버은 호우씨를 비롯한 다른 전 정부출신 동료들이 프랑스 대사관 내에서 무력 개입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에 따라 남아 있던 이들의 안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대사관 밖으로 나갔다"고 판시했다고 지난 5일 현지신문 <프놈펜 포스트>가 전했다.

판사는 또 미국주간지 <뉴스위크> 1975년 5월 19일자에 게재된, 웅 버은 호우씨가 2명의 프랑스 경찰에 의해 대사관 밖으로 쫓겨나는 모습이 담긴 사진에 대해선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와 관련 지난 2006년 당시 부 총영사였던 장 디락(Jean Dyrac)과 대사관 소속 경찰관 중 한 명인 조르지 빌르비에이유(Georges Villevieille)는 한 프랑스 잡지와 한 인터뷰에서  <뉴스위크> 사진은 4월 20일 사진이 아닌 4월 17일 대사관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찍은 사진인데, <뉴스위크>가 잘못된 내용을 전달한 것이라 진술 바 있다. 그러나 사진 속에 등장하는 또 다른 경찰관 삐에르 구이옹(Pierre Gouillon)씨는 2007년 1월 프랑스 <르몽드>와 한 인터뷰에서 앞선 증인들과 반대 진술했다.

"솔직해 말해, 웅 보은 허우씨가 실제로는 대사관 밖으로 나가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버텼지만, 결국 밀려나가고 말았다."

프랑스 법원, 프랑스인들에 대해 무죄 선고... 여전히 남은 의혹들

한편 프랑스 법원 판사는 이날 다른 프랑스인 책임자들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무죄임을 선포했다.

"이들(캄보디아 정부고위관료들)의 망명을 거절한 프랑스 정부와 크메르루주 측에 이들의 이름을 알려준 대사관측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러한 결정들이 자발적이고 양심적인 동의에 반한 것으로 고려되어 질 수는 없다."

이에 대해 당시 대사관에 남아있던 프랑스 신부 프랑스아 퐁쇼(François Ponchaud)씨도 최근 <르몽드>와 한 인터뷰에서 "추측컨대, 당시 대사관 프랑스인 중 누군가 외부에 정보를 누출한 것이 분명하다"면서 "크메르루주군은 그들이 지칭하는 7명의 배신자들을 모두 내놓지 않으면 전기와 물, 식량을 끊겠다고 협박했다"고 밝혔다. 당시 대사관에 남아 있던 종군기자 알 로커프(Al Rockoff) 등 다른 외신기자들의 그간 증언도 이와 비슷하다.

프놈펜 함락 당시 당시 프랑스대사관으로 피신했던 미국 종군기사로 영화 <킬링필드>에도 등장하는 알 로커프(Al Rockoff)는 크메르루주군이 정부관료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이들을 대사관 밖으로 보내라고 협박했다고 과거 인터뷰를 통해 여러차례 증언한 바 있다.
 프놈펜 함락 당시 당시 프랑스대사관으로 피신했던 미국 종군기사로 영화 <킬링필드>에도 등장하는 알 로커프(Al Rockoff)는 크메르루주군이 정부관료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이들을 대사관 밖으로 보내라고 협박했다고 과거 인터뷰를 통해 여러차례 증언한 바 있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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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판사는 당시 프랑스대사관 총책임자였던 장 디락 부 총영사에게도 아무런 죄가 없다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영화 <킬링필드>의 실제 주인공이자, 대사관 안에서 당시 현장을 눈으로 목격한 <뉴욕타임스> 시드니 샌드버그 기자는 자신의 저서 <딧 프란의 삶과 죽음>(1985)을 통해 1975년 4월 20일 대사관으로 피신한 캄보디아인들을 모두 쫓아낸 프랑스 부 총영사 장 디락의 당시 결정에 대해 "매우 유감스러웠던 일"이라고 기술한 바 있다. 

한편, 이번 최종 판결에 대해 아내 웅 빌롱씨 역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말했다고 프랑스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그녀의 담당 변호사 패트릭 보우두엥(Patrick Baudouin) 역시 지난 5일 <프놈펜 포스트>와 한 전화인터뷰에서 "크나 큰 실망"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이번 판결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웅 빌롱씨에게는 지난 1975년 남편에게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마침내 밝힐 수 있는 그런 기회였다. 남편이 고문에 의해 굴복하고 말았다는 증거가 있었더라면, 그녀가 사법적 정의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인권보다 국익 우선하는 국제사회 현실 확인"

그녀는 현재 당시 프랑스대사관과 본국 외교부 사이에 오간 25장이 넘는 전보 내용을 갖고 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갖고 있던 미화 3만 달러를 나눠 가진 프랑스인 5명의 이름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판사는 이번 판결에서 그녀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후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슬하에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게 되었다. 다행히 전운이 감돌던 1973년, 그녀의 부모와 아들 둘은 프랑스로 이주해 잔인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캄보디아에 남아있던 그녀의 동생들과 친척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남편이 죽은 뒤 그녀는 프랑스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며 가족들을 부양했다. 최근까지 크메르루주 희생자 협회 사무총장으로 일한 그녀의 나이는 75세다.

"내 삶은 남편이 적에게 인계된 날 이후로 멈췄다. 소위 '사법정의', '인권의 요람'의 나라라는 프랑스가 그런 일을 한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당시 프랑스는 알고 있었다. 남편을 대사관 밖으로 내보면 그에게 어떤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걸..."

이 사건은 아직도 프랑스에서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캄보디아인들의 시선은 명확하다. 이번 판결 소식을 접한 현지 언론인 친 마데포(42)씨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상황에선 누구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크메르루주의 잔혹성은 이미 프놈펜 함락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아내 웅 빌롱씨에게는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지만, 이번 판결은 인권보다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국익만을 우선시하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다시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또 다른 선진국인 호주도 동남아나 아프리카 국가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국 난민을 캄보디아로 보내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지 않는가?"


태그:#캄보디아, #주캄보디아 프랑스대사관, #킬링필드, #KKMER ROUGE, #UNG BOUN 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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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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