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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책표지
 <나의 한국현대사>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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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역사책이 차지하는 위상은 '금성사 세계문학대전집' 정도인 것 같다. 폼이 나니까 일단 꽂아는 두는데, 막상 읽으려면 중고등학교 국사시간의 망령이 되살아나면서 없던 잠도 막 밀려오는 수면가스 같은 마력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그런 덕에 거개의 집에서 역사책은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의 역할을 담당하곤 한다.

그런 인테리어용 역사책 중 단연 으뜸은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아닐까 싶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국사책에서도 소개될 정도였으니 의무교육을 이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이름이기는 하지만, 정작 그 책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

'글쓴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

<역사란 무엇인가>에 담긴 카의 주장은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걸로 하나만 뽑자면 역사는 결코 과거 사실에 대한 객관적 재현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검토하는 과거의 기록에는 과거 사실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 사실이 일정 정도 '반영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호프집 안주로 나온 노가리 조각을 면밀히 뜯어 살핀 후에 오호츠크해 명태 어장을 설명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그 기록과 기억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주관과 관점이 개입되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기록과 기억을 취사선택해서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역사가의 주관과 관점이 개입된다는 점까지 생각하고 나면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은 그냥 애초부터 불가능한 작업이었다는 결론도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그래서 역사가의 작업이란 늘 불완전하고, 각자의 관점과 주관에 따른 논쟁도 끝없이 이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이 정도로 생각을 마무리하고 나면, 갑자기 뭔가 좀 석연찮은 구석이 생긴다.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고 거기에는 늘 역사가의 주관과 관점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건 그냥 "개똥이 말도 맞고, 말똥이 말도 맞고, (이런 나에게 지적질을 하는) 부인의 말도 맞소"라고 말했다는 황희 정승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내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고 한다면, 역사가들끼리 서로 논쟁할 필요도 없는 거고,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도 '그래, 당신네들 입장에서 보면 당신네들 말도 맞기는 맞소, 허허허' 하고 웃어넘기고 말아야 한다는 건가. 뭐지. 이야기가 왜 갑자기 이렇게 이상하게 흘러가는 거지.

이런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팠던 것이 우리만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카 이후의 많은 역사가들이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았다. (물론 카 스스로도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궁금하신 분은 <역사란 무엇인가>를 직접 읽어보시길.)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키스 젠킨스라는 사람의 대답인데 그는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re-thinking history)>라는 책에서, 역사의 그러한 본질 때문에 어떤 역사서술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것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애써 객관적인 서술인 척 하려는 시도들을 경계하면서, 오히려 서술하는 이의 당파성과 주관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혹은 발견하는) 방식으로 역사서술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유시민의 책인 <나의 한국현대사>는 퍽 재미있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나의 한국현대사>라는 책에서 '한국현대사'에 주목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진짜 가치는 '나의'라는 수식어에 있다.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려고 노력한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저자의 관점과 이해관계에 따라 취사선택하고 재구성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시민 스스로도 서론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서점 역사 코너에 차고 넘친 한국현대사 책들과 이 책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다.

한국현대사를 보는 유시민의 돋보기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열쇳말은 유시민이 스스로를 규정할 때 쓴 '프티부르주아 리버럴'이라는 단어이다. 저자가 스스로를 '프티부르주아'로 명명한다는 것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한미관계를 중심에 두거나 혹은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자본-노동관계를 중심으로 두고 한국사회를 설명해왔던 기존의 서술과는 거리를 두겠다는 포석으로 보아야 한다. 이점은 한국현대사를 다룬 기존의 책들과 이 책을 비교하면 금방 드러난다.

한국현대사를 서술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에 놓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 끼친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때문이다. 한미관계를 서술의 중심에 놓게 되면 자연스럽게 미국의 반공주의 정책과 한국의 군사독재가 일정 정도 이해관계를 공유했던 불행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면 이야기는 자연스레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결론으로 이어지곤 한다.

8, 90년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왜곡된 한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현대사를 공부하고, 그 논리적 연장으로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라는 과격한 결론에 도달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국근현대사 입문서로 지금도 널리 읽히는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를 생각하면 쉽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중심에 두는 방법도 있다.

한국현대사라는 것이 급격한 산업화와 자본주의화의 과정이었던 만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역관계라든지 노동계급의 형성과 투쟁 같은 것들은 한국현대사를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경기 불황에 따른 이윤율의 저하와 노동운동의 심화와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고, 87년 6월 항쟁의 성취를 온당히 설명하기 위해서 노동자대투쟁을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의 한국현대사>는 이러한 기존의 독법으로부터 살짝 벗어나있다. <나의 한국현대사>에는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 않고 종속이 어쩌고 미제가 저쩌고 하는 이야기도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서술에 중심에 놓지도 않으며 노동계급이야말로 역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계급이라는 식의 주장도 없다.

그 대신 <나의 한국현대사>는 4·19나 6월 항쟁 같은 역사적 고빗사위를 추동했던 힘으로, 조직되지 않은 시민 대중에 주목한다. 조직되지 않은 시민이라는 것은 아마도 서론에서 그가 말했던 '프티부르주아'의 다른 이름일텐데,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핵심 열쇳말을 이런 식으로 모호하게 잡으면 좀 곤란하긴 하다. 말이 좋아 '미조직'이고 '시민'이지, 달리 말하면 뚜렷한 실체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딱히 정해진 누군가에게 공통으로 착취 받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뚜렷하게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기에 객관적으로 실체가 명확한 것도 아닌 '조직되지 않은 시민'이야말로 4·19니 6월 항쟁이니 하는 역사적 고빗사위를 이끌었던 핵심이라고 하면, 이건 결국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러면, 임진왜란 때의 의병들도, 동학농민혁명 때의 농민군들도 '미조직된 시민'이라고 퉁치고 넘어갈텐가?

물론 유시민 정도 되는 사람이 자기 이름하고 운율 맞추려고 억지로 '시민' 운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유시민이 한국현대사를 설명하기 위해 그처럼 모호한 개념을 사용한 것은, 그의 정치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이의 곤혹스러움

마르크스가 "인간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설파한 이래로, 사람들은 으레 역사를 바꾸는 힘이란 (위대한 소수가 아니라) 이름 없는 장삼이사들에게 있는 거라고들 말해왔다. 실제 역사를 봐도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지 정책의 기조를 바꾸게끔 한 것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3·1운동이었고, 김재규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반유신운동들이었으며, 기세등등한 군부독재를 무너뜨린 것은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었으니까. 사회의 진보를 바라는 사람들이 '노동계급'이니 '민중'이니 하는 개념들로부터 변화의 동력을 끌어내고 싶어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노동계급'이나 '민중'이 원하는 것, 혹은 그들이 가는 방향이야말로 사회의 진보요 역사의 전진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세상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은 것 같다. 이름 없는 장삼이사들, 그러니까 '노동계급'이니 '민중'이니 하는 사람들이 가는 방향이 반드시 '역사적으로 올바른' 방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도 그들이었지만, 이명박과 박근혜를 청와대로 보낸 것도 그들이었다.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탄핵된 대통령을 응원한 것도 그들이었고, 노무현에게 가장 가혹하게 돌팔매질을 했던 것도 그들이었다. 이명박을 지지한 사람과 노무현을 지지한 사람은 분명히 다른 집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은, 모호한 덩어리처럼 뭉쳐진 '그들' 속에서 이편저편을 뚜렷이 나누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설사 가능하다 해도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 일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노무현과 이명박의 경계에서 요동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 2002년과 2007년의 민심 차이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유시민이 뚜렷한 실체나 공통의 이해관계가 없는 '조직되지 않은 시민'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는 아마도 그러한 곤혹스러움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아, 그리고 역사가 당위적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에 대한 반성도)

결국 우리들의 문제

하지만 유시민이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단지 '젠장 이제는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다' 식의 낙담은 아닌 것 같다. 역사적 고빗사위에서 결정적인 힘을 발휘했다고 하는 '조직되지 않은 시민'이란, 사실 우리들 각자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니 '민중'이니 하는 식으로 뭔가 역사적으로 어마무시한 일을 해낼 것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매일매일 미어터지는 출퇴근 전철에서 내 인생 하나 건사하기도 급급한 보통 사람들 말이다.

<나의 한국현대사>가 말하는 한국현대사란 바로 그런 사람들이 걸어온 자취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역사란, 엄청난 능력을 가진 '네오'가 짠하고 등장해서는 알아서 해방세상을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었고, '노동계급'이니 '민중'이니 하는 정의의 군대가 나타나서 적군을 쳐부수 듯 문제를 해결해온 과정도 아니었다.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보통 시민들의 일상적인 선택과 의사표현들이 차곡차곡 쌓여온 결과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인 <나의 한국현대사>는 '유시민이 본 한국현대사'가 아니라 '우리들 각각이 만들어온 한국근현대사'의 의미로 독해되어야 한다.

꼭 촛불 들고 광화문 광장에 나서지 않아도 되고, 진보적인 시민단체에 꼬박꼬박 후원금 안 보내도 괜찮고, 시사주간지 끼고 살면서 세상만사에 다 정통할 필요도 없다. 유시민 말마따나 미래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안에 와 있는 미래를 우리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며, 우리들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돌베개(2014)


태그:#역사책, #나의 한국현대사, #서평,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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