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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김승희 시인의 시집 <희망은 외롭다>를 읽고 이렇게 썼다.

굳이 분석 비슷한 것을 해보자면 이렇다. 이 시에서 '희망이 외롭다'라는 명제는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다. 첫째, 희망은 지금 외로운 처지라는 것. 희망이라는 말만 있을 뿐 어디에도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둘째, 희망 때문에 내가 외롭다는 것. 희망 같은 거 없다고 생각해버리면 마음껏 망가질 수 있을 텐데 희망 때문에 그럴 수도 없어서 내가 외롭다는 것. - <한겨레 21>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에서

김승희 시인은 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해야 하기에 외롭다고 썼다. 김승희 시인에 공감하며 신형철은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으련다'라고 썼다. 그에게 희망은 종신형 같은 것이었다.

2012년 12월에 쓰인 이 칼럼을 읽으며 나는 신형철이 희망을 놓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글과 생각을 믿고 좋아했기에, 왠지 그가 희망을 놓아버리면 나도 희망을 놓아버리게 될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결국 희망을 놓아버리진 않을 것이다. 나는 계속 희망하고 싶다.

'희망하기' 위해 떠난 여정

<로드> 표지
 <로드>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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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코맥 매카시 소설 <로드>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희망하고 싶지만, 희망하는 게 쉽지 않을 땐 다시 이 책을 읽자' 의도적으로 희망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삶의 '추'가 희망이 아닌 절망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일 테다.

'행복을 논하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이다'라는 말이 있듯, 내가 자꾸 희망하려는 이유도 희망보단 절망하기가 쉬운 지금이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절망하기 싫어서, 다시 책을 펼쳤다.

책 속의 세상은 이미 끝나 있었다. 끝이 나는 과정은 설명돼 있지 않았다.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이미 세상은 죽어 있었고, 죽은 세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도 점차 세상을 따라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죽음 가운데, 아빠와 아들이 있다. <로드>는 그렇게 죽음의 길 위를 걷는 부자를 그리고 있었다.

모든 것은 불탔고, 재만 남았고, 어둡고 추우며,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야만 하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선 사람은 더욱 잔인해지기 마련이고, 더욱 인간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식인이 시작되었다.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아빠와 아들은 남쪽으로 향한다. 남쪽으로 향하는 뚜렷한 이유는 없다. 그저 남쪽이 목표이고, 목표를 향해 간다는 목표만 있다.

남자는 회색빛이 비치자마자 일어났다. 소년을 그냥 자게 놓아두고 길까지 걸어가 쭈그리고 앉아 남쪽 땅을 살폈다. 황폐하고, 고요하고, 신조차 없는 땅. 10월일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은 없었다. 날짜를 확인하지 않은 지 몇 년은 되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한 번 더 겨울을 난다는 것은 죽음을 뜻했다.

서로가 세상의 전부인 아빠와 아들은 울며, 굶주리며, 두려워하며, 포기할 수 없어 나아갔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책 속 세상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마치 공포 영화 속의 서슬퍼런 악마의 눈동자를 본 듯한 기분이 들어 방을 뛰쳐 나갔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옆에 가족을 앉혀 놓고 읽어야만 했다. 너무 무서워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책보다, 그 어떤 영화보다 나는 이 책이 무서웠다. 세상의 끝이, 그렇게 무서웠다. 무엇보다 그 속에서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 무서웠다.

남쪽으로 간다고 해도 부자의 삶은 달라질 리 없었다. 누차 말하지만, 세상은 이미 끝났고, 동물은 멸종됐으며, 땅엔 재와 먼지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희망을 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빠와 아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나는 계속 책을 읽어 나갈 수 있었다. 끝이 선명히 보였지만, 그래도 그 끝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서.

우린 괜찮은 거죠, 그죠 아빠?
우리한텐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죠.
그래.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요.
그래.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

아들이 운반하고 있다는 불이 바로 희망이었다. 책에서 아들은 아름다움이었고, 선이었다. 아름답고 선한 것이 죽은 세상에서 여전히 아름답고 선한 아들이었기에 아들은 그 자체로 신인지도 몰랐다. 아들은 또한 착한 마음이었고,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며,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주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이 마음들을 품고 있는 아들이었기에 아빠는 아들을 죽일 수 없었다.

"네 안에 있어, 늘 거기 있었어"

아빠는 여차하면 아들을 죽이려고 했었다. 누군가에게 먹힐 바에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죽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는 아들을 죽이지 않기로 한다. 아들에게 세상의 운을 걸어본 것이다. 아직 아름다움과 선을 간직한 세상이라면 희망이 있는 건지도 몰랐다.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
제발.
안 돼. 너는 불을 운반해야 돼.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요.
모르긴 왜 몰라.
그게 진짠가요. 불이?
그럼 진짜지.
어디 있죠?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왜 몰라. 네 안에 있어. 늘 거기 있었어. 내 눈에는 보이는데.

절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놓지 않은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더는 절망이란 말을 쉽게 꺼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세상을 보고도 어떻게 감히, 절망을, 죽음을 말할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 이런 생각도 했었다. 어쩌면 절망이란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 '진짜' 절망이 찾아오기 전까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다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 열 살이 채 안 된 아들을 두었던 저자 코맥 매카시는 아들이 잠이 든 모습을 보며 이 소설의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는 왜 아들을 보며 이렇듯 절망스런 세상을 구현해 냈을까. 조금 더 희망찬 세상을 그려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희망은 절망 후에 찾아오는 것이라는 걸 아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덧붙이는 글 |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은이) / 정영목 (옮긴이) / 문학동네 / 2008-06-10 / 원제 The Road (2006년) / 정가 1만 1000원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2008)


태그:#코맥 매카시,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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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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