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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내가 사기죄로 고소하지 않은 걸 다행인 줄 알아."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말인가. 아내가 가끔 하는 농담에 나는 별 대꾸를 하지 않는다. 20년이 넘었으면 이제 그만할 만도 한데 여전히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조금 안 됩니다' 속에 숨은 의미

이 이야기의 시발점이 된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90년 어느 화사한 일요일 봄날이다. 난 강원도 정선 시골 다방에서 22살의 여인과 마주하고 있다. 전부터 눈여겨 봐온 사람이었다.

"키가 어떻게 되세요?"
"갑자기 키는 왜?"
"아니 그냥 커 보이셔서..."

앉자마자 키에 대한 질문을 먼저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으나, 대화 내용 중 유일하게 그것만 기억난다.

"1미터 80센티미터 조금 안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5년간 했다. 아내 키가 조금 작기 때문일까, 그 이후로 내 키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사건은 결혼 후 2개월 만에 터졌다. 아내는 장인 어르신과 나란히 걷는 내 모습을 보았단다.

"아빠 키가 175인데, 솔직히 당신 몇이야?"

아내의 갑작스런 추궁에 난 엉겁결에 "170"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연애할 때 왜 "180 조금 안 된다"고 대답했냐고 따진다. 아내가 고소 운운하는 이유다. 그런데 나도 할 말이 있다. '조금 안 된다는 기준'에 대해 나는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는 것이 10cm인지, 5cm인지 물어봤느냐 말이다. 따라서 난 무죄다.

"그런데 왜 앉은 키가 그렇게 크냐"고 이어 묻는다. 그것도 내 잘못 아니다. 내 신체 구조의 문제다. 난 이상하게 다리보다 상체가 좀 긴 편이다. 다시 말해서 '숏다리'다. 덕분에 옛날, 삼류영화관 뒷좌석에 앉을 때도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상체가 긴 편이니 화면이 훤히 보였다. 벌떡 일어나도 앉아 있을 때와 큰 변화가 없는 이 몹쓸 신체 구조. 늘 키높이 구두를 신는 이유다. 상체와 하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키에 대해 민감하다. 작은 사람일수록 피해 의식이 더 크다. '키존심'이라고 해야 하나. 키 작은 사람에게 "너 왜 그렇게 작냐?"고 말하면 아무리 순한 사람이라도 화를 벌컥 낸다. '네가 내 키 작은데 보태준 거 있느냐'는 거다.

내 키 높이 구두. 상체보다 하체가 짧은 신체구조 때문에 신는다.
 내 키 높이 구두. 상체보다 하체가 짧은 신체구조 때문에 신는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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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보건 의료원에 걷기 운동하는 기계 있다던데, 너 그거 사용 방법 아니?"
"나 맨날 오후에 거기 다니잖아. 나랑 같이 가, 알려줄게."

그날 딸 아이와 화천군 보건 의료원에 가는  게 아니었다. 아니 갔더라도 기계 사용법만 알고 나왔어야 했다. 딸 아이와 함께 비만 측정을 위해 키 재는 기계에 올라섰다.

'166cm'

이게 내 키다. 아내와 딸에게 철저히 숨겨온 정확한 내 키다. 딸 아이는 굽이 높은 구두를, 난 키높이 신발을 늘 신어왔기 때문에 누가 더 큰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맨발로 딸 아이 옆에 서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제대로 들켰다. 자존심 아니, 키존심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뭐야, 아빠 나보다 작아? 1cm 작네!"
"어... 아빠가 나이가 들어 키가 좀 줄어서 그래."

뭐가 재미있는지 한참 까르르 웃는 딸아이에게 '실제 내 키를 비밀로 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제안했다. 엄마에게 용돈 인상을 정식으로 건의해 준다는 게 내게 제시한 조건이었다. 나도 용돈을 타 쓰는 주제이니 내가 올려주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며칠 후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 딸 이제 대학 4학년 올라가니까, 용돈을 좀 올려 주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 그럼 당신 용돈 줄여서 아이에게 주면 되겠네."

협상 결렬. 딸 아이의 눈에 은근히 힘이 들어갔다고 느껴졌다. 이젠 키에 대한 자존심이고 뭐고 또 다른 압박감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자수해 광명 찾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듯싶었다.

"당신이 보기에 내가 요즘 허리가 좀 휜 거 같지 않아?"
"뭘 멀쩡하구먼."
"사실 내 키 말인데, 키 재는 기계가 옛날하고 달라졌나봐. 의료원에 있는 걸로 재보니까 166이 나오더라구."
"그 기계 참 이상하네. 딸애는 정확하게 나오는데 왜 당신만 틀리게 나올까?"

아뿔싸. 딸아이가 벌써 제 엄마에게 다 말한 모양이다. 20년을 넘게 숨겨 온 '핵존심'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신광태 기자는 강원도 화천군청 기획담당입니다.



태그:#자존심, #키존심, #키높이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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