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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 이소선 어머니 서거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 이소선 어머니 서거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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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전을 위한 준비 작업은 특별히 누가 시키고 지시할 것도 없이 저마다 할 일을 스스로 찾아가며 척척 진행됐다. 이소선은 그 모습을 보면서 노동자들이야말로 모든 것을 창조하는 위대한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에서 "우리끼리는 높은 사람·낮은 사람이 따로 없고, 시키는 사람 시킴을 당하는 사람도 구별이 없다", "모두가 대등하고 자유스럽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대동세상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농성 투쟁의 날이 길어져 농성 참가 조합원들이 귀가하지 못하자 그 부모들이 농성장에 찾아와서 자식을 데려가려는 소동이 벌어졌다. 어떤 부모들은 농성에 참가하는 노동자들 보내주지 않는다며 노동조합에 항의를 하기도 했다.

이에 이소선은 이들 부모들한테 강제로 붙잡아두지 않았으며 저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가한 것이라고 설득하는 일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 부모들까지 투쟁에 동조하게 만드는 일을 했다.

날이 갈수록 농성 참가자들은 더 늘어났다. 참가 조합원들은 동조자를 더 모으기 위해 각 상가마다 돌며 선동을 하고 시위를 했다. 그럴 때마다 기동경찰들과 충돌하여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소선은 부상당한 노동자들을 보살피고 격려했다.

농성을 시작한지 닷새째 밤이 되었다

농성인파가 계속 늘어나 잠자리가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조합원들한테 집에 가야될 사람은 가고 낮에만 오라고 해도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함께 고생을 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집에 가지 않았다.

봄이라지만 4월의 추위는 한 데서 잠을 자기에는 너무 춥다. 그래서 긴급하게 담요와 이불을 사왔다. 이소선은 추위에 떠는 농성조합원들의 추위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사무실 안에서 밤을 새는 사람은 비좁아서 매우 불편하고, 사무실 밖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은 추워서 견디기 힘들었는데 그나마 이불과 담요를 마련했으니 다행이었다. 이소선은 담요와 이불을 지원해준 재야 시민단체 인사들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추위를 견딜 수 있게 덮을 것을 마련해 이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제는 밤늦게 비가 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담요와 이불을 덮고 누웠던 농성조합원들은 한밤중에 일어나야했다. 조합 간부들과 열성 중견조합원들은 부랴부랴 비닐로 천막 치고 주방에도 비닐을 쳐 비바람을 가렸다. 그리고 모래를 갖다가 천막 주변을 막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와서 낙수까지 떨어진다. 하는 수 없이 사무실과 천막과 주방에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은 평화시장 3층 복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복도 맨바닥에 종이 상자를 깔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조합 간부들은 잠을 자지 않고 아직 농성에 참가하지 않은 조합원한테 보내는 유인물을 밤새워 만드는 등 다음날 준비에 분주했다.

비는 다음날에도 계속 왔다. 빗속에서도 참가자들은 열심히 구호를 외치고 프로그램에 따라 상가 주변을 돌면서 시위를 계속하고 선전전도 이어갔다. 이소선은 비닐로 둘러쳐진 비가림막에서 수백 명의 조합원들이 먹을 주먹밥을 만드는 일을 함께 했다. 이소선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나 조합원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에 신경을 쓰는 것이 일상화 됐다.

빗속에서 주먹밥을 맛있게 먹는 조합원들의 모습은 마치 전쟁통에 보았던 장면 같다는 생각을 이소선은 했다.

비는 계속 내리는데 농성 참가 조합원들은 계속 늘어나서 밤이 되면 이들을 감당해 낼 잠자리가 큰 문제였다. 그래서 밤에는 100여 명의 조합원만 남아 계속해서 철야농성을 하고 나머지 조합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농성 투쟁을 계속 하는 가운데 노사교섭위원들은 계속해서 교섭을 했다. 그러나 의견접근은 크게 진전되는 것이 없었다. 이소선은 고생하는 조합원들을 볼 때 하루라도 빨리 타결이 되어야 할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어 연신 담배를 피우며 안타까워했다.

농성투쟁은 주말이나 일요일에도 계속 이어졌다

4월 16일에는 평화시장 옥상에서 '전태일 모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날의 장례식은 "지금까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던' 우리들의 노예근성을 동지 앞에 활활 불태워 버리"는 자리였다. 이날 청계노조 한 간부는 "1970년대에 우리가 깨우치지 못해 우리 손으로 동지를 죽게 했지만, 1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동지의 커다란 외침을 통해 눈과 귀가 뚫려 이제 우리는 동지를 결코 죽음으로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또한 "우리들 가슴마다에 당신의 넋을 활활 불타게 하고 임금인상 투쟁에 당신이 임하셔서 우리의 투쟁대열에 선봉이 되어 힘과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호소하기 위해서 마련된 장례식이다"라고 의미를 밝혔다.

이 자리에서 이소선의 기도 순서가 있었다. 

"주여! 여기 억눌리고 약한 당신의 딸들이 일주일째 밤잠을 못자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약한 근로자들을 보살펴 주시어 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시고 업주들의 잘못된 마음을 주님의 능력으로 돌려주십시오. 우리는 주님이 약한 자의 편임을 믿사옵니다. 우리 앞에 임하셔서 우리의 투쟁에 힘이 되시고 이들의 건강을 돌봐 주시리라 믿고 싸워서 이기겠습니다."

이소선의 간절한 기도에 500여 명의 농성 참가 조합원은 모두 다 눈물을 흘렸다. 행사는 추모가를 부르며 모의관을 메고 대형만장을 앞세운 장례행렬이었다. 그 행렬은 평화시장 옥상을 몇 바퀴 돌고 각 상가를 돌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전태일의 영정을 선두로 진행되는 행렬을 기동경찰이 가로막았다. 조합원들은 "전태일 동지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와 추모가를 부르며 기동대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다시 옥상으로 밀려 와 농성에 들어갔다.

이소선은 10년 전 죽은 아들 태일이가 또 다시 죽어서 장례를 두 번이나 치르는 모습에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아 애꿎은 담배만 태웠다.

이런 투쟁을 배경으로 노조는 그동안 사용주 측과 교섭과정에서 숱하게 밀고 당기며 점점 합의점에 도달해 가고 있었다. 이소선은 이럴 때 조금만 더 버티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재에 나선 노동청 중부사무소장은 사용주 측 노사협의위원 측에 임금 29% 인상, 퇴직금 10인 이상업체 100% 실시의 조정안을 상정했다. 저녁 7시30분까지 회의를 한 끝에 사용주 측이 이 중재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것을 통일상가 일부 사용주들이 항의, 가계 문을 닫고 동화상가 옥상에 있는 근로감독관실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일이 있었다. 노조 측에서도 이 협상안을 놓고 철야회의 끝에 상여금 80%, 미싱사 최저 30% 인상을 추가하여 협상하자고 통보했다.

결국, 노조 측에서 추가 협상안을 철회하고 4월 17일 밤 조정안으로 타결되어 조인까지 마쳤다. 평화시장 옥상 농성장에서 회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조합원들이 사무실을 천막과 비닐로 막아놓은 곳에 옹기종기 모여 얘기하다가 누군가 교섭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행을 발견했다.

"어떻게 됐어요?"하며 소리치자 2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회의 결과를 다그쳐 묻는 것이었다. "잘 됐어!"하며 금방 조인한 단체협약서를 높이 쳐들자 일제히 "만세!", "우리가 이겼다!"는 환호와 함께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껑충껑충 뛰었다.

여기저기에서 "언니 수고했어!", "아니야, 네가 고생 많았다", "형 수고했어요.", "뭘 모두 다 수고했지"하며 인사를 했다.

농성 조합원들은 일제히 이소선을 향해 "어머니, 수고하셨습니다" 며 모두가 이소선한테 큰 절을 했다. 이소선은 가슴이 울컥 하여 즉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너희들이 고생 많았다. 장하구나! 청계노조 조합원!"

이 말이 떨어지자 일제히 "우리 승리하였다"는 노래를 즉석에서 지어 쉴 새 없이 부르며 만세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아무나 붙잡아 헹가래를 치며 손에 손을 맞잡고 줄을 지어 "우리 승리하리라" "전태일 동지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는 노래를 부르며 평화시장 옥상을 돌며 꽹과리, 징, 장고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춤을 추다 지치면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또 일어나 노래하고 춤추며 승리의 함성으로 날 새는지 몰랐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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