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포스터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주)


산드라는 자신의 복직 대신에 보너스를 택한 다수의 직원들로 인해 해고 당한 상태다. 그녀의 동료 줄리엣은 공장장이 투표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사장에게 재투표를 요청하고 직원들의 주소를 보내주는 등 산드라의 복직을 위해 애쓴다. 월요일로 정해진 재투표를 위해 산드라는 주말 이틀 동안 동료 직원들을 만나 자신의 복직을 위해 투표해줄 것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병가를 낸 직원의 부당해고라는 사회적 상황을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으로 엮어내는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주인공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의 복직을 위한 투쟁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극적인 사건을 연출하고 과잉된 감정을 표출하는 영화적 기법과는 달리 다르덴 형제의 사실적이고도 객관적인 연출 기법은 설득과 훈계가 아닌 보여주기에 방점을 찍는다.

이러한 방식은 감독의 전작 <자전거 탄 소년>에서도 드러난다. 보육원을 벗어나 아버지의 행방을 찾으려는 어린 소년 시릴(토마 도레)의 안간힘과 아버지의 냉대로 인해 시릴이 마음을 다치는 장면에 이르러서도 카메라 앵글은 그저 묵묵히 그의 모습을 담아낼 뿐이다. 하지만 이들의 영화는 개인적 일상을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특정 상황에 인물을 툭 던져놓고 인물과 상황이 어떻게 조응하고 반목하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극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정교한 짜임새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주인공 산드라를 연기한 프랑스 배우 마리옹 꼬띠아르는 화려하고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시종일관 후줄근한 청바지와 나시티를 입고 머리를 질끈 동여맨 수수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민낯과 다크 서클을 그대로 보이고 우울한 얼굴로 자괴감을 드러내는 산드라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녀는 우리의 또 다른 민낯이기 때문이다. 산드라가 힘들 때마다 찾는 신경안정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찾는 술과 담배, 드라마와 게임의 다른 이름이다.

'심리적 회복 탄력성'이라는 게 있다.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꿋꿋이 되튀어 오르는 능력(위키백과 참조)을 말한다. 물체마다 탄성이 다르듯 사람도 실패나 좌절 이후에 회복하는 능력이 다르다는 것인데, 우울증을 겪은 산드라는 이 심리적 회복 탄력성이 현저히 낮아 보인다. '유리 멘탈'처럼 작은 충격에도 깨지거나 부서지기 쉬운 내면의 취약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까닭이다. 그런데 간혹 고난에 부딪쳐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강한 회복 탄력성으로 되튀어 오르는 사람들은 본래 있던 곳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고 한다. 이는 산드라에게도 해당되는 것일까.

이틀의 낮과 하룻밤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산드라는 열두 명의 직원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직원 만남-설득-반응 및 결과'라는 서사의 반복된 구조는 영화의 흐름을 느슨하게 하지만 각각의 상황들이 다양하게 변주됨으로써 자칫 지루해질 법한 서사에 긴장감이 돈다. 여기에 서사의 전개에 따라 '기대-좌절-희망'으로 변화하는 산드라의 감정 곡선이 더해져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영화는 산드라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집요하게 던진다. 돈과 사람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가.

질문 자체의 불합리성은 차치하고라도 돈의 교환가치와 인간의 가치를 등가로 환원시킬 수 있는지를 먼저 의심해 봐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주체이자 객체로 전락한 인간은 더 이상 본래적 가치가 아닌 수단적 가치로 치부된다. 생산성의 정도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돈이야, 나야?' 라는 물음은 무의미해진다. 자신이라도 당연히 보너스를 택할 것이라는 산드라의 자조 섞인 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과반수의 동료 직원이 보너스를 포기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라면 사장은 왜 직원들에게 택일을 강요했을까. 직원들에게 선택할 권리가 있기는 한 것일까.

실존주의는 인간을 자유의지로 자신의 행동과 운명을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본다. 다른 사람(공장장)의 강요와 협박, 가장이라는 책임과 곤궁한 살림살이 등의 상황적 억압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직원들 모두가 자유의지로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건 지나친 낙관이다. 그렇다면 이 선택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 주어진 것을 택하는 것이 어떻게 선택이 될 수 있겠는가. 진짜 선택은 가질 수 있는 것을 포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남편을 떠나 산드라를 찾아온 동료 직원 안느가 "나를 위해 뭔가 결심한 건 처음이야"라고 말했을 때 그녀가 행복해 보였던 것처럼 사장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온 산드라의 표정도 행복해 보였다. 굳이 그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이 영화를 통해 영화적 재미를 추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산드라의 우울한 상황은 우리가 빗겨가고 싶은 불편한 현실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일상이 아무리 버거워도 일상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이 불편한 현실과 마주하다 보면 문득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래, 조금만 더 힘을 내 보자. 안 될지도 모르지만 한 번 더 해 보자'라고 말이다. 그것이 일상을 버티게 하는 용기가 아닐까.

영화의 제목인 '내일을 위한 시간'의 '내일'은 'my job'과 'tomorrow'의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나 덧붙인다면 '내가 할 일' 즉, '나의 자아를 회복하는 일'이 아닐까. 이 영화는 일상에 지친 우리에게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숙제를 던져준다.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형제 마리옹 꼬띠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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