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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싸리꽃
 싸리꽃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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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선

이튿날(2000. 8. 19.) 이른 새벽 나는 김택현 기사의 승용차를 타고 하얼빈을 출발했다. 경안까지는 2백여 킬로미터가 넘었다. 게다가 초행길이기에 그날로 돌아오려면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하기에 미처 어둠이 가시지 않은 5시 30분에 떠났다.

하얼빈 시가지를 벗어나자 경안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로 요철(凹凸)이 몹시 심했다. 마침 도로 곁에는 새로 고속도로를 만들고 있었다. 아직 개통 전이지만 김 기사는 거기로 오르며 나에게 여권과 한국담배를 달라고 했다. 나는 출국 전 마침 선물용으로 담배 2상자를 사갔기에 그때까지 몇 갑이 남아 있었다. 나는 여권과 담배 두 갑을 그에게 건넸다.  

요철이 심한 진흙길을 달리다가 포장된 고속도로를 달리자 승차감도 좋고 차의 속력도 빨랐다. 조금 달리자 도로 공사요원이 지시봉으로 차를 세웠다. 김 기사는 내 여권을 보이며 한국에서 온 귀빈으로 경안에 가는 중이라는 말과 함께 담배 한 갑을 슬그머니 건너자 통과 신호를 보냈다.

곧 망망대해와 같은 북만주의 벌판이 펼쳐졌다. 내가 그 경치에 감탄하자 김 기사는 차를 세웠다. 나는 그 만주벌판을 두어 컷 촬영했다.

"겨울철에는 설원(雪原)으로 황량하지요."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은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나는 문득 육사의 광야의 한 구절이 연상되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지평선이었다. 흔히들 중국인을 대륙인이라고 일컫는데, 이 넓은 대지를 바탕으로 그들이 비상할 때 세계의 판도는 달리질 것 같았다.

헤이룽장성의 지평선
 헤이룽장성의 지평선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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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綏化)

중국은 이제야 그것을 자각한 듯 가는 곳마다 개발과 건설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도로 공사장에는 포크레인과 같은 장비도 있는 반면에 아직도 삽과 괭이를 든 인부도 많았다. 게다가 도로 가드레일 페인팅을 하는데 10미터 정도 마다 한 사람씩 붙어 도색을 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엄청난 인력 낭비 같아 그 까닭을 묻자 김 기사는 중국정부가 실업자 대책으로 그런 정책을 쓴다고 했다.

나는 그 전해 창춘(長春)에서 지린(吉林)까지 승용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톨게이트에서 통행권을 사자 5미터 뒤 그 통행증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동승한 김중생 선생은 그렇게 하는 것은 부정부패도 막고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중국정부의 노동정책이라고 했다. 아무튼 지구촌 곳곳이 일자리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는 듯했다.

김 기사는 김우종 선생의 지시대로 도중에 수화(綏化)에 있는 중국공산당수화시위원회에 들렀다. 그 건물 주위는 온통 붉은 깃발로 숲을 이루었다. 지난 세월 반공사회에 살았던 나는 그 붉은 깃발에 섬뜩함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이 잠재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 기사가 김우종 선생의 소개장을 가지고  중국공산당수화시위원회 사무실로 들어가자 곧 당사연구주임 임희귀(任希貴) 씨가 나와 영접하는데 앞으로는 자기들이 안내하겠다고 하면서 한 찬청(식당)으로 데려가 아침을 대접했다.

허형식 장군 희생지기념비(2000. 8. 촬영)
 허형식 장군 희생지기념비(2000. 8.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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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희생지 기념비

조반 후 수화를 출발하려는데 그곳에서 세 사람이나 따라 나섰다. 당사연구주임은 우리 차에 오르고, 비서장 추희순(鄒喜順), 과장 손계동(孫繼東)은 당사 전용승용차를 타고 뒤따랐다. 수화에서 경안까지도 건설 중인 새 고속도로를 탔는데, 중국에서는 공산당원들은 무소불위로 도로 공사요원들이 터치하지 않았다. 임희귀(任希貴) 당사주임은 옆자리에서 허형식 장군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동북항일연군 제일가는 명장이었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김 기사는 핸들을 잡은 채 그의 말을 통역했다.

"중국이 해방된 것은 바로 이런 혁명렬사 때문입니다."

김 기사도 오늘 중국 동북지방에서 조선인들이 당당하게 살아가고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세워진 것은 항일열사 덕분이라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12시 무렵 경안현에 이르렀다. 흔히들 우리나라 사람들은 "호떡집에 불났다"는 말로 중국인들의 야단법석을 말하는데, 그 말 그대로 두 지역 공산당원과 관리들은 요란하게 허형식 장군 고향작가를 영접했다.

거기서 경안현 부국장 왕무빈(王武斌), 주임 양옥규(楊玉奎)가 앞장서며 허형식 희생지기념비가 서 있는 대라진(大羅鎭)인민정부로 가자 임장갑(林長甲) 부서기가 다시 길안내를 했다.    

마침내 청송령 들머리 허형식 희생지 기념비에 이르렀다. 청봉령으로 가는 길가에 호젓하고 조촐하게 선 기념비 앞면에는 '抗聯第三路軍總參謀長 許亨植犧牲地'(항연제3로군총참모장허형식희생지)'라고 새겼고, 뒷면에는 허 장군의 약력이 새겨져 있었다. 

풍림촌에서(뒷줄 오른족에서 임희귀 중공당수화시당사연구실장, 추희순 비서장, 임장갑 대라진부서기, 앞열 필자, 손환무 호로)
 풍림촌에서(뒷줄 오른족에서 임희귀 중공당수화시당사연구실장, 추희순 비서장, 임장갑 대라진부서기, 앞열 필자, 손환무 호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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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우리 일행은 참배 전 그 일대에서 들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 비석 앞에 헌화한 후 깊이 고개 숙였다. 나는 오래도록 눈감고 묵념을 드리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허 장군이시여! 이역의 산하에서 고이 잠드소서.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면 장군의 대한 바른 평가가 내려질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장군께서 몽매에도 그리던 구미 금오산 아래 가장 양지 바른 곳에 장군을 기리는 동상이나 기념비가 우뚝 설 것입니다.'

그날 동행한 당사 관계자와 경안현 관리들은 1998년 10월,이 기념비를 세운 이후 가장 의의 있는 날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도 그들에게 허형식 희생지기념비를 세워준 감사의 말로 답했다. 나는 그 순간이 너무 기뻐 수륙만리를 달려온 피로도 다 사라졌다.

대라진인민정부 임장갑 부서기가 그곳에서 가까운 풍림촌에 허 장군을 아는 노인이 있을 거라면서 다시 앞장섰다. 우리 일행은 곧 풍림촌에서 손환무(82세) 노인을 만났다. 내가 가져간 허형식 장군의 사진을 보이자 손 노인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곧 "허형식 장군"이라고 크게 소리쳤다.

손 노인은 만주국 시절, 자기 집은 산 아래 외딴집에서 살았다는데, 이따금 한밤중에 항일연군 허 장군 일행이 찾아왔다고 했다. 자기는 그때 10대 소년으로 기억이 뚜렷하다고 했다. 허 장군 일행은 한밤중에 집안으로 들어오면 먼저 방안의 불부터 끄게 하고는 밥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는 그때마다 캄캄한 부엌에서 밥을 지어 주면 그들은 후딱 먹은 뒤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했다.

손 노인이 기억한 바, 허형식 장군은 기골이 장대한 풍채로 늘 실탄과 비상식량을 두 어깨에다 엑스 자로 메고 다녔다고 회고했다. 손 노인은 허형식 장군이 토벌대에게 희생된  뒤, 마을사람들이 청송령 계곡을 찾아가 보니 허 장군의 머리는 토벌대가 잘라가고 나머지 시신은 산짐승들이 다 뜯어먹고 뼈다귀 몇 개만 남아 있더라는 얘기도 전했다.

나는 그냥 떠나오기가 섭섭하여 손 노인에게 1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자 안 받겠다고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이 돈은 그때 밥값으로, 허 장군 고향사람이 60년 만에 갚아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손 노인은 그제야 "세 세"를 연거푸 말하면서 받고는 대단히 좋아했다.

떠나는 필자에게 환송하는 풍림촌 마을사람들. 맨 오른쪽이 손 노인이다.
 떠나는 필자에게 환송하는 풍림촌 마을사람들. 맨 오른쪽이 손 노인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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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

그 새 서산 해가 기울었다. 하지만 동행한 중국공산당원과 관리들은 나를 귀한 손님이라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네는 경안에서 가장 좋은 요리 집으로 안내한 뒤 만찬을 베풀었다. 경안현 부국장은 그즈음 경안현 중심지에다 공원을 만들고 있는데 그 이름을 '형식공원'으로 짓기로 하였다고 하면서, 이참에 허 장군 고향 구미시와 경안현이 자매결연을 하였으면 좋겠다고 제의를 했다. 나는 그들의 호의를 실망시킬 수 없어 연구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우리나라의 실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한 작가의 역량을 대단케 아는데 실소했다.

허형식 장군 생가는 폐허가 되고, 구미 시내 지나가는 사람에게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 대통령을 물으면 다 알겠지만, 동북항일연군 '허형식' 제3로군장을 아느냐고 물으면 단 한 사람이나 나올 지 의문인 현실을 너무 몰랐다. 솔직히 나도 그 전해 하얼빈에 와서야 허형식 장군의 이름을 처음 듣지 않았던가.

그들은 만찬이 계속되는 동안  대여섯 차례나 술잔을 치켜 올리면서 "허형식 장군 만세!"를 소리쳤다. 추희순 비서장은 나에게 꼭 다시 이곳을 찾아달라고 하면서, 그때는 허 장군 유족들을 모시고 오면 침식 일체는 모두 자기네가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늦은 밤임에도 허형식 고향작가를 환송하고자 수화 시가지를 벗어나는 경계 지점까지 따라온 뒤 내가 탄 승용차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도로 위에서 솜방방이로 만든 횃불을 켜들고 손을 흔들었다. 영웅은 갔지만, 그를 기리는 마음과 정성은 아직도 만주벌판에 푸르게 살아있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박도 실록소설 '들꽃'은 40회 내외로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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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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