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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돌이를 위한 과학책
▲ <파토의 호모 사이언티피쿠스> 문돌이를 위한 과학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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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유명한 우스개 질문 하나 해보자.

"'정의'를 영어로 하면 무엇일까?"

이 질문은 난센스가 아니다. 저스티스(justice)와 데피니션(definition), 엄연히 정답이 있는 질문이다. 다만 이 질문에 많은 이들이 웃는 이유는 그 해답에 따른 해석 때문인데, 그 내용이 매우 그럴 듯하다. 대한민국 고등교육의 구분상 문과생은 justice(正義)로, 이과생은 definition(定義)으로 옮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실 문과와 이과 구분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종종 힘을 발휘하는 담론이기도 하다. 비록 많은 전문가들은 그 구분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개선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쨌든 친구들끼리 모여 뭔가를 하다가도 한 녀석이 숫자 계산을 잘못하면 그 녀석이 문과이기 때문이고, 또 한 녀석이 상대방의 마음을 어처구니없이 못 헤아리면 이과이기 때문이라며 낄낄거린다.

우리의 뇌리 속에 강하게 박혀 있는 문과와 이과에 대한 편견. 그런데 여기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정체불명의 기이한 책이 한 권 있다. 파토 원종우(아래 필명 '파토')가 쓴 <파토의 호모 사이언티피쿠스>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책에 적혀 있는 지은이 파토 원종우의 약력을 들여다보자.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다가 20대 중반에 인디레이블 운동을 주창, 스스로 록 뮤지션으로 데뷔하고 음악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이후 영국에서 다시 음악을 전공했다. 1999년 <딴지일보>에 합류, 15년 동안 음악, 문화, 역사, 과학 등을 주제로 수백 편의 글을 썼다. 2008년 SBS 창사 특집 환경 다큐멘터리 <코난의 시대> 작가로 휴스턴 영화제 대상을 받았으며 2012년에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유럽편>을 출간해 역사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어쨌든 문과생다운 경력이다. 물론 철학 전공자가 음악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나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유명한 뮤지션으로 거듭난 신해철의 경우도 보지 않았던가. 문제는 파토의 그 다음 약력이다.

최근에는 과학 커뮤니케이션에 전념해 팟캐스트 방송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로 1년 6개월 만에 350만 다운로드를 기록했으며, 벙커원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공개 토크쇼 <과학같은 소리하네>로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또한 과학자, 작가, 예술가들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과학 전시, 강연, 공연을 기획/연출하면서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잉? 과학? 그렇다. 파토는 문과생들이 대입 시험을 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배우는 과학에 대해 일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모아 이렇게 책까지 냈다. 중력, 현대물리학, 타임머신, 평행우주, 인간복제 등 그 분야도 다양하게 말이다.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일까? 놀랍게도 파토는 그 일을 해냈다. 그리고 그 일이 꼭 자신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근대의 합리성을 추종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지식이 아닌 방법론이다

파토는 과학이 지식 그 자체라기보다는 진실을 찾아가는 하나의 태도이자 방법론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들은 흔히 과학을 기계적인 사고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과학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험을 통해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에 붙여진 오해일 뿐,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과학이 추구하는 합리성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애초에 합리성을 추구하기가 쉽지 않은 존재다.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물의 근원적인 힘은 생존과 번식에 관련된 본능이다. 그런데 본능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복잡해지면 제 역할을 잘하지 못한다. 인간이 본능의 명령을 뛰어넘어 타자의 고통이 단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줄임) 하지만 '측은지심'만으로 공감력이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줄임) 그리하여 근대 이후로 인류는 이 공감력을 조직화하고 제도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줄임) 이를 위한 기본이 바로 합리성이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일은 인문학 이상으로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 203p

문제는 그와 같은 과학이 소위 이공계생들의 전유물로 생각되는 작금의 상황이다. 합리성이란 곧 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이성을 뜻하는데,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그 합리성을 증진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과학으로부터 이성을 중시해야 하는 인문사회학도들이 소외되고 있다. 아니, 그들이 자진해서 스스로를 과학으로부터 배제시키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당시 운동권 선배와 동료들은 '과학'이라는 단어를 계명처럼 숭상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과학은 오로지 사회과학, 그것도 19세기 결정론의 그림자가 잔뜩 드리운 마르크시즘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마저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과학에 관해서는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20세기 전반에 걸친 혁명적인 자연과학의 성과가 그들에게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는 전혀 '과학적인' 태도가 아니다. - 64p

파토는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이념, 복잡한 사상, 기발한 전략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감성과 이성이며 이는 과학적인 태도에서 효과적으로 길러질 수 있다고.

서구의 데카르트나 버트런드 러셀 등이 위대한 철학가이자 동시에 수학자로서 묘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교육 시스템으로 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실제로 철학과 수학은 매우 밀접한 학문으로서 논리적인 사고가 그 전제가 되어야 한다. 혹자들은 철학을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폄훼하지만, 제대로 된 철학은 인간의 삶에 대해 그 인과관계를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과학은 희망이다

따라서 저자는 과학 그 자체를 희망이라고 본다. 과학이 이끌어내는 인간의 합리성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면, 과학이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기존의 종교와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결국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는 존재의 허망함을 극복하기 위함이요, 종족의 연속성을 보장받기 위함인데, 과학은 비록 '달나라의 토끼'라는 등의 허황된 낭만은 거세했을지언정 존재의 허망함과 연속성은 다른 방식으로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즉 과학을 통해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이지, 궁극적으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새로운 별,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오랫동안 종교가 불완전하게 제공했던 구원을 좀 더 합리적인 형태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이란 보잘 것 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 우리가 과학의 눈을 통해 우주의 질서를 논하고, 장엄한 천체의 운행을 이야기하며,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줄임) 우리가 사는 동안 우주의 진실을 모두 알지는 못하더라도, 오늘보다는 내일 조금씩 가까워짐을 느낀다면 우리는 의미 없이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그 느낌은 단순한 신비감이나 경이감을 넘어 우리의 삶에 깊은 위안을 주는 힘이 될 수 있다. - 268p

너무 오랫동안 과학을 등한시했다고? 더 이상 두려워 말고 책장을 펼치시기를.


파토의 호모 사이언티피쿠스 - 현대과학·인문학·SF를 통섭하는 재미

원종우 지음, 생각비행(2014)


태그:#파토의 호모사이언티피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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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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