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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사라졌다. 평생 죄를 지은 적도 없고 주위에 원한을 살 만한 일도 하지 않았다. 가족, 부모, 친척과 연락을 끊고 산 적도 없고 외국 한 번 나간 적 없다. 그런 30대 남자가 사라졌다. 출입국 기록도, 남자의 이름으로 된 전화, 카드, 통장, 의료보험은 물론 인터넷 사용 기록도 남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지난 2008년 실종된 조아무개(당시 31세)씨의 이야기다. 휴대폰을 바꾼 것으로 확인된 4월 28일을 마지막으로 그의 종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기를 애타리게 기다리던 가족들 말고는 관심을 가지는 이들도 없었다. 그런데 2011년 경찰로 한 통의 국제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이죠? 살인사건을 제보하려고요"

"경찰이죠? 살인사건을 제보하려고요."

전화를 건 사람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여성 이아무개씨였다. 이씨는 한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살다가 2008년 5월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제보하겠다는 사건은 조씨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씨는 한국에서 굴삭기 운전사 박아무개(43)씨와 동거했다. 그런데 박씨가 2008년 4월 말 갑자기 중국에 가서 살자고 제의했다. 불법체류자인 이씨는 중국으로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처지여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며칠간 박씨의 설득으로 이씨는 함께 중국행을 택하게 된다. 출국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여권을 만들고 차를 팔고, 전세보증금을 빼고 13일 만에 중국으로 간다. 심지어 박씨의 아들은 전학 절차를 밟지 못해 며칠 후에 데려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씨와 박씨는 2010년 헤어졌고, 이씨는 2011년 중국에서 제보를 결심하게 된다. 이씨의 입에선 3년 전 실종된 조씨의 이름이 나왔다. 이씨의 얘기는 이랬다.

"한국에서 살 때였어요. 박씨가 어느날 갑자기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와선 중국으로 가자고 했어요. 저는 못 간다고 했죠. 그러자 며칠 뒤 사람을 죽여서 불안하다고, 자기와 함께 일하던 조씨를 죽였다고 박씨가 털어놓더군요. 조씨가 나이는 몇 살 어린데 이혼했고 애가 3명 있다고 들었어요. 둘이 동업을 하고 있는데 박씨가 돈을 안 돌려주면 경찰에 고소하겠다고 했대요. 그래서 겁을 먹고 땅에 묻어서 죽였다는 거예요. 그 말 듣고 같이 정리해서 중국으로 가게 된 거죠."

경찰은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살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실이었다. 조씨는 가족의 실종신고 이후로 아무런 행적도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은 박씨를 불러 조사한다. 박씨는 "내가 죽였다"고 자백을 한다. 그리고 범행동기와 살인방법까지 진술한다. 2012년 검찰은 박씨를 살인죄로 기소한다.

경찰에서 "내가 죽였다"던 피고인, 법정에서 범행 부인

하지만 재판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박씨가 태도를 바꿔 살인 혐의를 전면 부인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자백하면 15일간 자유를 주겠다는 수사기관의 약속을 믿고 허위진술을 했다"고 주장했다.

검찰과 피고인 박씨는 사사건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조씨의 사망을 놓고 검찰은 '여러 증거로 비춰볼 때 박씨가 조씨를 살해했다'고 단정했지만, 박씨는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고 내가 죽이지 않았으며 사망 여부도 알 수 없다'고 맞섰다. 검찰이 동거녀 이씨의 진술을 제시하자 박씨는 '위자료를 주지 않자 이씨가 거짓제보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살인 후 범행 발각이 두려워 중국으로 도망간 것"이라고 하자 박씨는 "계획대로 가족과 이주를 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결정적으로 조씨가 사망했다는 증거나 더 나아가 박씨가 살인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살인사건에서 피해자의 시체도 없고 사망했다는 직접증거도 없는데 기소하거나 유무죄를 판단할 수 있을까. 판례로 볼 때 간접증거만으로도 유죄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은 앞서 설명했다.(연재기사 ⑧-1 참고)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사건도 마찬가지다.

다만 대법원은 "시체가 발견되지 아니한 상황에서 범행 전체를 부인하는 피고인에 대해 살인죄의 죄책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사망 사실이 추가적·선결적으로 증명되어야 함은 물론, 그러한 피해자의 사망이 살해의사를 가진 피고인의 행위로 인한 것임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어야 한다"며 신중한 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시신도 없고 직접 증거도 없는데 증인만으로 살인죄 가능?

다시 사건을 살펴보자. 유무죄를 판가름 할 유력한 증거는 이씨의 진술이었다. 그런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전문증거(傳聞證據)라는 점이다. 전문증거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사실을 진술한 증거를 말한다.

이러한 전문증거는 원칙적으로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단, 예외는 있다. 형사소송법(316조 1항)에는 "피고인 아닌 자의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서의 진술이 피고인의 진술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인 때에는 그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 하에서 행하여졌음이 증명된 때에 한하여 이를 증거로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법원은 "두 사람이 동거할 당시 아들을 재우고 난 뒤 박씨가 이씨에게 고백한 점을 볼 때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 다행히도 이씨의 진술은 이 관문을 통과해서 증거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증거로 쓸 수 있다고 해서 그 증거를 법원이 신뢰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씨의 증언은 믿을 만했나. 1심 법원(제25형사부 재판장 최동렬)은 '그렇다'고 답했다. 법원은 ▲ 이씨가 6시간 동안 법정에서 증언하였고 ▲ 신고 경위나 내용으로 보아 꾸몄을 가능성이 매우 낮으며 ▲ 박씨가 이씨의 중국행을 설득하기 위해 고백을 한 점이나 ▲ 박씨가 밝힌 범행동기로 볼 때 납득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분석하고 추론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조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줄곧 포클레인 기사로만 일하면서 처와 3명의 자녀를 부양해 왔다. 조씨는 전과도 없고 외국에 나가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함께 일하던 박씨가 동업을 제안해 8백만 원을 투자하고 차량도 매각했다. 심지어는 이혼하고 여관방에서 생활해 왔다. 사업이 어려움을 겪자 박씨가 제안한 위조여권 판매사업도 그만두고 돈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씨는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고 집행유예 상태에서 조씨의 고소가 두려웠고, 자신을 따르던 조씨가 돌변하자 분노를 느껴 살해를 결심하였음직하다. 

법원이 "살해 인정된다"고 3가지 '간접' 근거

굴삭기 살인사건 개요와 쟁점별 피고인 검찰 입장 대비
 굴삭기 살인사건 개요와 쟁점별 피고인 검찰 입장 대비
ⓒ 김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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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법원은 살해 사실을 뒷받침하는 간접사실 3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불과 100m 이내에 사는 동료의 소지품을 불태웠다. 이씨는 박씨가 조씨의 휴대폰, 지갑, 신분증을 태우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는데 박씨는 "옷가지만 태웠다"고 했다. 어쨌거나 이것은 "실종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는 할 수 없는 행위"라는 것이다. 

둘째, 거의 매일 만나는 사이였던 동료가 사라졌는데도 찾지 않았다. 박씨는 "내가 만들어준 위조여권으로 중국을 간 것으로 알고, 조씨를 찾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조씨는 자신의 여권을 두고 위조여권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고 혼자 중국에서 위조여권 판매사업을 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마지막으로, 박씨는 갑작스럽게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동거녀 이씨에게 제안한 지 13일 만에 출국했다. 그 사이 매입한 지 15일된 차량을 다시 팔고, 임대차 계약을 중도해지한 후 보증금을 정산했으며, 보호관찰 중인데도 기관에 알리지 않은 채 떠났다. 그리고 아무일도 하지 않고 지내다가 한 달 뒤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재판부는 이것이 '피해자를 살해하여 불안하니 중국으로 가자고 하여 가게 되었다'는 이씨의 진술과 일치하는 부분이라고 보았다.

법원은 "박씨가 조씨를 굴삭기를 이용해 구덩이에 묻어 살해했다는 공소사실은 합리적 의심없이 인정된다"고 결론지었다. 퍼즐을 맞추듯 사실을 추려낸 법원은 끝내 밝히지 못한 살인 날짜를 '4월 28일경부터 4월 30일경까지'로, 장소를 '용인시 또는 평택시 물류창고'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종자는 어디로...피고인은 알고 있을까

법원은 박씨에 대해 징역 13년 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는데 배심원 9명도 만장일치 유죄 평결을 했고, 양형의견은 13~15년이었다. 박씨는 "이씨의 진술은 거짓이고, 조씨는 자연사나 자살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믿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재판부는 "유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 처벌만 모면하려는 태도로 일관하였다"며 "자신을 믿고 따르던 친한 후배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고 꾸짖었다.

항소심과 상고심에서도 박씨는 "사망날짜나 사망장소도 확인되지 않은 위법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법원은 "범죄의 성격에 비추어 부득이하며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지장이 없다"며 배척했다.

경찰은 수사 도중 박씨가 조씨의 소지품을 태운 장소에서 담배에 불을 붙여 꽂았다고 밝혔다. 이런 행동이 고인을 추모하는 방식임을 감안할 때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데도 검찰은 박씨의 침묵으로 조씨가 실종된 날짜나 매장 장소 등 일부 확인되지 않는 사실이 있음을 아쉬워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박씨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리라.


태그:#살인, #판결대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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