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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자작나무들이 빼곡히 서 있는 광경.
 인제 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자작나무들이 빼곡히 서 있는 광경.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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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은 황량하다. 잎이 지고 난 뒤의 나무들은 수액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말라, 산등성이에 마치 꼬챙이라도 꽃아 놓은 듯 날카롭다. 땅은 버석거리고, 공기는 차갑고, 하늘은 무겁다. 계곡에 갇힌 물은 꽁꽁 얼어붙고, 잡풀은 누렇게 시들어 생기를 잃은 지 오래다. 바람이 휑하게 지나가는 숲 속에서는 작은 새 한 마리 찾아보기 어렵다.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 섬뜩한 기운마저 감돈다.

한겨울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길마저 얼어붙는다. 인적이 끊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산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일부러 사람이 찾아가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무슨 일에서인지 이처럼 황량한 산을 찾아가는데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눈이 내리길 기다려, 서둘러 길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강원도의 산은 이 추운 한겨울에도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자연이 만든 '신전'

자작나무 숲 사이를 걷는 사람들.
 자작나무 숲 사이를 걷는 사람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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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겨울산 중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태백산'이 있다. 태백산 정상에서 마주하는 눈꽃은 황홀경을 자아낸다. 눈꽃이 절정을 이룰 때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잇는다. 순백으로 뒤덮인 산 정상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성지순례를 떠난 사람들처럼 보인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물결이 그렇게 경건해 보일 수 없다.

눈이 내리고 난 뒤, 그 산 정상에서 하얀 색 말고 다른 색을 찾아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산 이름에 '흰 백(白)' 자가 들어가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푸른 나뭇잎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하얀 색 일색으로 뒤덮여 있는데도, 한겨울에 태백산을 황량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늘 높이 서 있는 자작나무들.
 하늘 높이 서 있는 자작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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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겨울산 중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또 있다. 겨울이 되면, 인제군 원대리에 있는 응봉산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다. 사람들이 그 산을 찾는 이유는 그 산 언저리에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숲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숲은 아름답기로, 충분히 태백산의 눈꽃과 견줘볼 만하다. 그리고 경건한 분위기로 따져 봤을 때도 태백산 못지않은 무게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 숲에서는 무엇보다 하늘 높이 곧게 뻗은 하얀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그 나무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하얀 눈밭 위에, 하얀 대리석 기둥들이 무수히 서 있는 것 같은 낯선 풍경과 마주한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하얀 나무들이 깊은 산 속에 누군가 은밀하게 세워놓은 신전을 연상시킨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숲은 자연이 만든 신전이다.

수피가 벗겨진 곳에 검은 반점이 드러나 있는 자작나무.
 수피가 벗겨진 곳에 검은 반점이 드러나 있는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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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했다. 이 숲속에서 자라고 있는 이 하얀 나무들은 아마도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나무들 중에 으뜸이 되는 역할을 수행했을 게 틀림없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숲에 들어서면 은연중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 숲의 이름은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다. 숲속에 앉아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바람이 자작나무를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누군가 내게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자작나무 숲에 앉아 나뭇가지 위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 사람의 음성이 들릴지도 모른다.

도시에 하루 종일 눈이 내리는 날, 눈앞에 슬며시 자작나무숲이 떠오른다. 사각형 건물 위로 눈이 펑펑 쏟아지는 광경을 올려다 보고 있으려니, 눈 덮인 산비탈에 줄지어 서 있는 하얀 나무들이 꼭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 시작한다. 살을 에는 한겨울, 흰 눈이 소복이 쌓인 자작나무 숲에서 오늘 누군가 그렇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자작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숲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입구. 임도를 따라 3km 이상 걸어들어가야 겨우 나타난다.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입구. 임도를 따라 3km 이상 걸어들어가야 겨우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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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자작나무숲에는 25ha 넓이의 산자락에 4만여 그루의 자작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숲은 한 제지회사가 1970년대 중반부터 펄프용 원목을 생산할 목적으로 조성했다. 지금 남아 있는 자작나무들은 그때 심은 나무들 중 일부다. 수령은 짧게는 15년, 길게는 25년 사이로 형성돼 있다.

자작나무는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나무 조직이 단단하고 치밀해 가구나 건축 재료용으로도 쓰이고, 목공예 소재로도 쓰인다. 껍질은 특히 불에 잘 타는 특성이 있다. 나무껍질이 불에 타면서 '자작자작' 하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자작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말이 있다. 북유럽에서는 아직도 이 나무 껍질을 불쏘시개용으로 사용하는 곳이 있다.

자작나무는 추운 지방에서 잘 자란다. 한반도에서도 북쪽에서 잘 자란다. 그러니까 남쪽에서는 보기 드문 나무다. 자작나무가 서 있는 풍경이 이국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작나무에도 꽃이 핀다. 그런데 그 꽃의 꽃말에 '당신을 기다린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은 결코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자작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자작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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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자작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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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자작나무숲으로 들어가려면, 숲속으로 이어지는 임도 아래 도로가에 차를 주차해야 한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주차장이 없어서 도로 위에 차를 세워둬야 했다. 차를 도로 위에 세워둔 채 산길로 들어서야 하는 마음이 꽤 불편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근처에 넓은 주차장이 생기면서 그 같은 불편은 이제 거의 해소됐다. 주차료 같은 건 따로 받지 않는다.

자작나무숲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임도로 들어서기 전에, 먼저 안내소(산림감시초소)에 들러 방문록에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어야 한다. 산림초소에서 자작나무숲까지는 3km가 넘는 임도를 1시간가량 걸어서 올라간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길이 꽤 길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산길이라 평지를 걷는 것하고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길이 눈에 덮여 있을 때는 길이 꽤 미끄러울 수도 있다. 올라가는 건 큰 문제가 없지만, 내려올 때는 꽤 조심해야 한다. 차가 다닐 수 있는 정도의 임도라 걸어 오르는 데 큰 힘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가능하면 등산화를 신고 가는 것이 좋다. 올해 자작나무숲은 3월 15일까지 개방한다. 그 이후에는 산불 방지를 위해 통행이 금지된다(인제국유림 관리소 : 033-460-8031).

자작나무숲을 걷는 사람들.
 자작나무숲을 걷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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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른 소나무와 늘 하얀 자작나무의 선명한 대비.
 늘 푸른 소나무와 늘 하얀 자작나무의 선명한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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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자작나무숲, #인제 원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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