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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종덩굴꽃
 종덩굴꽃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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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울음도 그치게 한 맹장

심양감옥을 나온 허형식과 김책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아래 중공당 만주성)의 지시에 따라 중공당 빈현특별위원회 선전위원, 서기 직책을 맡았다.

허형식 선전위원은 김책 서기를 도와 빈현 일대의 각종 반일부대를 찾아다니면서 항일무장 대오를 세우는 데 전심 전력을 다하였으며, 인근 조하, 가판점(빈안진) 등지에 반일단체들을 새로 조직하였다.

이후 허형식은 반일투쟁 선봉에서 일제의 탄압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친일 주구(走狗, 앞잡이)들을 잡아내 족족 처단했다. 허형식은 어떻게나 사납고 용맹했는지 북만주에서는 아이가 울면 "이희산(허형식 이명)이 온다"고 하면 우는 아이들도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그 무렵 관동군은 허형식을 조상지, 양정우(楊靖宇, 중국인) 다음 가는 거물로 취급하고 있었다.

 선양의 9.18 기념탑
 선양의 9.18 기념탑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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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류타오후(柳條溝)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빌미로 선양(沈陽)을 공격한 뒤 곧이어 봉천성과 길림성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관동군은 그 여세를 몰아 1932년에는 하얼빈도 점령하였다. 그런 뒤 일본은 1932년 3월 1일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수도를 창춘으로 정한 뒤 푸이(溥儀)를 황제로 취임시켰다. 관동군은 만주국 건설과 함께 치안숙정공작을 대대적으로 벌여 항일무장대를 대대적으로 토벌했다. 그 결과 1932년 3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항일무장대가 1935년에는 1/10인 3만여 명 정도로 격감했다.

하지만 허형식은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끝내 굴하지 않고, 항일무장대 최선봉에서 유격근거지를 지켰다. 전투가 없을 때 허형식은 부대원을 인솔하여 농민들의 밭일을 도와주었으며, 군 규율을 엄하게 하여 절대로 민폐를 끼치지 않게 했다. 그러하여 동북 민중들은 항일유격대를 믿고 따랐으며, 부녀들은 솔선하여 유격대원에게 밥을 지어주거나 옷도 만들어주고, 세탁도 해주었다. 마을 청년의용대나 아동단원들 조차도 항일유격대를 위하여 보초를 서주는가 하면, 관동군이나 만주군의 정보도 수집해 주었다. 동북항일군과 민중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로 지냈다.

1934년 6월 28일, 주하유격대는 주하중심현위의 지시에 따라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로 확대 편성되었다. 조상지가 사령으로, 장수전은 정치위원으로, 허형식은 제3대대 정치지도원 사업을 맡았다. 그해 12월, 허형식의 아들 창룡(昌龍)이 태어났다.

 창춘의 일본 관동군사령부
 창춘의 일본 관동군사령부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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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는 반파쇼 인민전선 방침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중공당은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 않으면 모두 단결하여 항일연군을 조직하라"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동북인민혁명군, 동북반일연합군 등을 모두 결집시켜 이를 바탕으로 동북항일연합군 총사령부를 결성시켰다.

1936년 2월, 동북반일연합군 제5군이 동북항일연군 제5군으로 개편된 것을 시작으로, 1937년 10월까지 1~11군이 결성되었다. 허형식이 소속된 동북인민혁명군 3군은 1936년 8월 1일 정식으로 동북항일연군 제3군으로 개편되고, 허형식은 중공당 만주성위 위원 겸 동북항일연군 제3군 1사 정치부 주임이 되었다. 

1936년 11월, 허형식은 선견부대 200여 명을 거느리고 철려, 해륜 지방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그들은 영하 40도를 넘는 북만의 설원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적들을 소흥안령의 삼림으로 유인한 뒤 10여 차례 유격전으로 큰 피해를 안겼다. 그 가운데 손령각전투는 북만주에서 가장 큰 전투의 하나였다. 그 무렵 동북항일연군들이 불렀다는 노래다.

눈 쌓인 대지의 유격전쟁은 여름에 비교할 수 없네
삭풍 불고 큰 눈 날리니 눈 쌓인 대지는 다시 얼음하늘이 되네
바람은 뼈를 에이고 눈은 얼굴을 때리니 손발이 얼어서 찢어진다
애국남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어찌 다시 간난을 두려워하랴

허형식이 지휘하는 선견부대는 이런 노래를 부르며 손령각 부근 산속에서 500여 일본 관동군과 맞붙었다. 허형식은 이 전투에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신출귀몰하는 전술로 관동군 80여 명을 쓰러뜨리고 박격포, 중기관총, 경기관총 등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안동 소재 육사시비 '광야'
 안동 소재 육사시비 '광야'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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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타고 오는 초인'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은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광야'

 이육사
 이육사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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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나 소설가들은 전혀 허무맹랑한 얘기는 쓰지 않는다. 어떤 작품이건 대부분 그 배경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허형식을 알게 된 1999년 이후 여러 증인들을 만났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허형식은 키가 크고 무척 잘 생겼으며, 북만주에서 늘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말했다.

많은 여성들이 허형식의 인물과 인품, 그의 전투력과 용맹성에 반해 그를 흠모하며 따랐다는 일화도 전해 주었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 말, 만주 여행을 하던 이육사는 독립운동 자금책으로 활약한 외삼촌 허규(許珪)와 함께 동북항일연군 허형식 장군을 만주 전구에서 만났다. 이육사는 인척이기 이전에 한 독립군 전사로서, 백마를 탄 허형식의 인품에 매료되어 그를 흠모한 나머지 시 <광야>를 읊었다. 이 시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허형식 장군으로, 그가 조국에 광복을 가져다 달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마침내 군장이 되다

1939년 4월 12일, 중공당 북만성위는 제2차 확대회의를 열고, 김책을 서기로 선출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새로운 정세에 대비코자 동북항일연군 제3군, 6군, 9군, 11군을 기초로 제3로군을 만들었다. 제3로군은 총지휘 장수전(이조린), 정치위원 풍중운, 참모장 허형식으로 편성했다. 곧 조상지가 소련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허형식은 제3군장을 겸하게 되었다. 

1940년 봄, 허형식 군장은 소부대를 거느리고 풍락진을 습격하여 경찰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진장(鎭長, 한국의 면장에 해당)을 생포하였다. 허형식 부대원들은 은행과 창고를 털어 물자와 양식을 몰수한 뒤 그곳 인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41년 여름, 일제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관동군을 40만 명에서 76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시키고 만주에 전시상태를 선포했다. 그런 뒤 후방치안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시 항일연군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항일연군의 활동은 극도로 곤란에 빠지며 희생자와 투항자는 더욱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제3군 부대원 대부분은 장수전, 풍중운 지휘 하에 소련 경내로 들어갔다.

이 어려운 시기에 허형식 군장은 중공당 북만성 서기 최용건과 함께 계속 동북에 남아 항일연군 제9, 12지대에 남은 동지들을 지휘하며 동북의 전구를 지켰다. 허 군장은 적들의 토벌을 피하기 위하여 제3로군을 소부대로 나누어 각지에서 독립적으로 활동케 하였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전구의 여러 소부대를 순시하며 지도하였다.

1942년 7월말, 허형식 군장은 경위원 진운상을 데리고 파언, 목란, 동흥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부대 사업을 지도하기 위해 떠났다. 그는 소부대 책임자 장서린이 두도하자, 이도하자 등지에서 숯구이를 하는 노동자들 속에서 비밀리에 항일구국회를 조직하고, 100여 명의 회원으로 발전시킨데 대한 보고를 받았다. 허 군장은 그 보고를 매우 만족스럽게 듣고 그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격려했다.

1942년 8월 2일, 허형식 군장과 경위원 진운상은 정서린이 보내준 왕조경 경위원의 안내를 받으며 그곳을 떠나 철려 후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 소릉하 기슭에서 노숙케 되었다.

한편, 괴뢰 만주국 경안현 경찰서 경좌인 국장유는 이런 정보를 입수한 뒤 30여 명(일부 기록에는 300명)으로 토벌대를 편성하여 밤새 허형식 군장을 추적하고 있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박도 실록소설 '들꽃'은 40회 내외로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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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