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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드러커 자서전 표지
 피터드러커 자서전 표지
ⓒ 한국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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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천만이 넘는 영화는 보지 않으련다. 이미 본 영화가 이후 천만이 되는 것이야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천만이나 봤다고 해서 '나도 봐야지'하는 마음에 극장을 찾지는 않으련다. 대신, 거대 기업과의 경쟁에서는 비록 패했을지 모르지만, 조그만 공간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자신만의 색을 표현하고 있을 그런 영화를 찾아보고 싶다.

이런 영화라고 해서 결코 천만 영화보다 낫지 말란 법은 없다. 아니, 다수에게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결코 더 나은 영화는 아닐 것이다.

천만 영화라고 해서 나쁠 리 물론 없다. 천만이나 봤다는 건 그 영화에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다만 나는 다양한 영화가 고르게 분배되고 또 사랑받길 바란다. 우리 모든 개인의 개별성과 다양성이 존중받고 사랑받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획일성은 이미 충분한 우리 사회이다.

<피터 드러커 자서전>에서 피터 드러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다양성에 매료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름대로 흥미로운 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가 얼마나 인습에 순종적인지, 또는 얼마나 보수적인지, 아니면 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지 등과는 상관없이, 일단 그가 자신의 일이나 지식, 흥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매력적인 존재로 돌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결국 개별적인 존재이다.

드러커는 책에서 상투적인 말밖에 할 줄 몰랐던 어느 진부한 은행가가 단추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경험을 떠올렸다. 은행가일 때 그는 특별할 것 없었다. 단추에 관해 이야기 할 때의 그는 특별했다. 드러커는 이렇듯 누구나 개별적이어서 매력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모든 인간은 다양성과 다원성을 갖고 있으며, 또 나름의 독창성 역시 지니고 있다고 그는 믿었다.

진부한 은행가는 단추에 관심이 많았고 피터 드러커는 인간에 관심이 많았다. 물론, 독창적이어서 개별적인 인간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피터 드러커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자서전을 자신이 만났던 그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 넣을 정도였다. 책에는 그의 할머니에서부터, 지그문트 프로이트까지 그에게 영감을 준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중 몇 명이 유독 기억난다.

기억나는 한 사람은 괴팍한 헤르만 슈바르츠발트(이하 헤메)였다. 그는 드러커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으로, 드러커가 어린 시절에 만나 죽음까지 지켜본 사람이다.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헤메는 똑똑하고 비상한 아이였다. 누가 봐도 장래가 촉망되는 그런 아이. 그래서 가족은 헤메에게 기대를 건다. 그에게 장밋빛 길을 놓아주기로 그들은 합심한다. 하지만 헤메는 가족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삶을 개척해 나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헤메는 체르노비치라는 대학에 진학한다. 가족의 바람대로 빈 대학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드러커의 말처럼 젊은이가 자신의 경력을 시작하기에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대학을 선택한다. 그는 이 대학에서 법과 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또 졸업생 가운데 가장 짧은 기간에 학위를 받는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공직 사회에 진출한다. 가족은 다시 그에게 기대를 걸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실력이라면 가장 '끗발'이 있다는 재무부로 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황당하게도 해외무역부에 자리를 얻는다. 그가 해외무역부를 선택했다는 건 그가 괴짜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드러커는 말한다. 한 마디로 그는 "다른 모른 사람들의 뺨을 후려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해외무역부는 공직 사회에서 아무런 특권을 갖지 못했고, 승진 기회도 없는 부서였다고 한다.

이로써 그는 가족과 완전히 결별한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뿌리인 유대인의 삶과도 결별한다. 유대인이 가진 부르주아적이고 탐욕적인 태도가 사회를 오염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반유대주의자가 되어 유대인의 태도와 정신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그에겐 돈도, 연줄도 없었고, 다만 한 가지가 있었다면 자기 자신의 사고력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고력을 이용해 자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룰을 따르지 않고자 승진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린 것이다.

피터 드러커는 이런 그를 이렇게 회상한다.

꽉 막힌 데다 파벌주의가 판을 치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결코 곱게 보지 않은 오스트리아 공직사회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헤메 슈바르츠발트보다 더 적은 사람이 있을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주변 사람들과 쉽게 마찰을 일으키고, 거친 데다 무뚝뚝하며 아니꼽기까지 한 성격은 물론, 빈도 아닌 체르노비치 대학 출신이고, 게다가 재무부의 자문실 같은 힘있는 부서도 아닌 무역박물관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예상에도 불구하고 헤메는 오스트리아 공직 사회에서 유례없는 경력을 쌓았다. 평민으로는 가장 빠른 시간에 황제고문관의 자리에 올랐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과 동시엔 차관으로 승진했으며, 거의 독재적인 권한을 가지고 국가 재무와 통화문제를 책임지는 막강한 인물이 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승승장구를 보며 피터 드러커는 아버지에게 묻는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지. 다루기 힘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러니까 누군가 겁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 필요하다거나 문제가 너무 복잡해서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에 그건 전부 헤메의 일이 됐지. 그리고 그는 언제나 기대에 부응했어. 그는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기꺼이 불쾌한 상황과 대면할 수 있는 배짱도 있었으니까."

헤메는 주위 사람들의 뜻을 거슬렀기에 모진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만큼 똑 부러지고 확실했기에 유능한 사람이라는 평도 들었다. 나는 내가 만약 그를 만났더라면 그를 매우 좋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 욕을 먹으면서도 '아, 이런 사람도 있구나!' 라며 탄성을 질렀을 것 같다.

책에는 매력적인 인물이 또 한 명 있었다. 바로 카를 폴라니였다. 드러커는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의 초청으로 편집회의에 참여했다가 부편집장인 카를을 처음 만난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는 독특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말을 하던 그는, 보통 사람과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사회 현상을 논하고, 또 보통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저 앞날의 이슈를 미리부터 예견하는 사람이었다.

드러커는 카를을 처음 본 날 그의 집까지 함께 가게 됐는데, 그곳에서 인생 최악의 식사를 접한다. 신선해 보이지도 않는 감자가 식사의 전부였다. 무려 크리스마스였는데! 그런데 카를의 아내인 일로나와 그의 딸, 그리고 카를의 장모인 남작부인은 아무런 불평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이상한 이야기도 했다. 다음 달은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에 대해서.

드러커는 이미 카를의 봉급이 엄청난 액수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대화가 이해되지 않아 이렇게 물었다. "그 정도면 누구라도 아주 잘 살 수 있는 액수 아닌가요?"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아주 훌륭한 생각이군요. 월급을 자신을 위해 쓰다니! 우리는 그런 소린 생전 처음 들어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요."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카를의 아내인 일로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논리적인 사람들이죠. 빈은 헝가리 피난민들로 넘쳐나고 있어요. 공산주의를 피해서 온 사람들과 공산주의에 이어진 백색 테러를 피해서 온 사람들이에요.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없지만 카를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카를의 월급은 다른 헝가리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우리가 나가서 필요한 돈을 벌어오는 것이 논리적인 일이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가족의 유일한 관심사항은 어떻게 사회가 개인을 구원할 수 있느냐였다. 카를은 완전한 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비자본적이며, 비마르크스적인 사회. 카를은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 평생에 걸쳐 연구하고 고심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그는 오히려 혼란스러워졌다. 그가 꿈꾸는 완전한 사회란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피터 드러커도 완전한 사회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대신 피터 드러커는 좋은 사회로도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좋은 사회란 이런 사회이다.

'적당하고 견딜만한, 그러나 자유로운 사회.'

적당하고, 견딜만하고, 자유로운 사회. 나는 지금 우리가 바라는 사회가 딱 이 정도의 사회인 것 같다. 누가 완벽한 것을 바라나. 그저 적당히 견디며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고 사랑할 수 있으면 우리는 그걸로 충분하다.

피터 드러커가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강조한 이유는, 그래야만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획일화되고, 다수화된 사회는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역사도 이것을 증명한다. 큰 것만 살아남고, 작은 것은 죽고 있는 우리 사회이다. 나는 작은 것들을 살리고 싶다. 천만 영화를 보지 않으려는 이유로 이 정도면 충분할까.

덧붙이는 글 | <피터드러커 자서전>(피터드러커/한국경제신문/2005년 10월 05일/17,000)



피터 드러커 자서전

피터 드러커 지음, 이동현 옮김, 한국경제신문(2005)


태그:#피터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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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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