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 축구 대표팀은 그야말로 참담한 실패를 맛봤다. 당시 팬들이 받은 충격과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은 한국 축구에 다시 암흑기가 찾아오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불과 반년 만에 대표팀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축구 대표팀은 27년 만에 아시안컵 결승 무대에 진출하는 성과를 이뤘다. 결승전에서 호주를 꺾으면 무려 55년 만의 우승까지 달성하게 된다. 대회 전후로 계속된 주축들의 줄부상과 짧은 준비 기간에 대한 우려를 극복한 성과이기에 더욱 값졌다. 대회 개막 전만해도 우승은 언감생심이고 역대 최약체가 될 수도 있다는 일부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슈틸리케호 탑승한 선수들의 반전

 22일 호주 멜버른 렉탱귤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5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8강전 한국 대 우즈베키스탄 경기. 연장 전반 손흥민이 골을 성공시키자 차두리가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하고 있다.

지난 22일 호주 멜버른 렉탱귤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5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8강전 한국 대 우즈베키스탄 경기. 연장 전반 손흥민이 골을 성공시키자 차두리가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흥미로운 점은 현재 슈틸리케호를 이끌고 있는 주축 선수들의 면면이다. 반년 전 월드컵 때와 비교해 주전 상당수가 물갈이됐다. 현재 슈틸리케호의 주전 중 월드컵에서 활약했던 멤버는 기성용, 손흥민, 이근호, 김영권 등 4명에 불과하다.

특히 이번 아시안컵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 중에는 지난 월드컵 당시 아쉽게 최종 엔트리에서 낙마했거나, 본선에서 크게 중용되지 못했던 선수들이 유독 많다. 부동의 왼쪽 풀백 김진수는 홍명보호에서도 주전으로 중용받았으나, 대회 직전 부상으로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우즈베크전의 50m 폭풍 드리블로 '아시안컵 최고스타'에 등극한 베테랑 차두리는 아예 홍명보호에 한 번도 소집되지 못했다. 골키퍼 김진현과 공격형 미드필더 남태희 역시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한 선수들이다. 박주호와 곽태휘는 월드컵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정작 본선에서는 단 1분도 기용되지 못한 비운의 선수들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번 아시안컵은 그야말로 월드컵 낙오병들의 패자부활전이 되고 있다. 지난 월드컵에서 중용되었던 선수들 중 박주영, 지동원, 홍정호, 김보경 등 해외파들 다수가 소속팀에서의 부진으로 아시안컵 명단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김신욱도 부상으로 낙마했다. 그나마 이청용이 1경기, 구자철이 단 2경기만 뛰고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월드컵 멤버들의 비중은 더욱 줄어들었다.

이들의 빈자리를 비 월드컵 멤버들이 메우면서 '슈틸리케호의 황태자'로 거듭났다. 대표적인 경우가 김진현이다. 반년 전만 해도 정성룡-김승규의 아성에 가려 이범영과 '넘버3' 골키퍼 자리를 놓고 다투는 신세였던 김진현은 이번 아시안컵을 통해 드디어 대표팀 수문장의 1인자로 성장했다. 김진현은 쿠웨이트와의 2차전을 제외한 4경기에서 주전으로 나서서 벌써 13개의 슈퍼 세이브를 기록하며 한국의 무실점 행진에 가장 큰 수훈을 세웠다.

'뉴페이스' 이정협의 발견

  4일 오후 호주 시드니 파라마타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5 호주 아시안컵 대비 최종평가전 한국 대 사우디아라비아 경기. 후반 이정협이 팀의 두번째 골을 성공시킨 뒤 기뻐하고 있다.

지난 4일 오후 호주 시드니 파라마타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5 호주 아시안컵 대비 최종평가전 한국 대 사우디아라비아 경기. 후반 이정협이 팀의 두번째 골을 성공시킨 뒤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뉴페이스 이정협의 발견도 이번 대회의 소득이다. 이동국-김신욱 등 당초 유력한 공격수들이 부상으로 낙마하면서 슈틸리케 감독은 이전까지 A매치 경험이 전혀 없던 무명의 이정협을 깜짝 발탁했다. 이정협은 이번 대회 2골 1도움을 올리는 대활약으로, 이전 대표팀에서 부동의 주전으로 꼽히던 박주영의 그림자를 지웠다.

박주호는 이번 대회를 통해 기성용의 파트너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왼쪽 풀백으로 활약할 당시 김진수-윤석영 등 다른 해외파 선수들과의 경쟁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던 것과 달리, 최근 대표팀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기성용에게 다소 부족하던 활동량과 수비 커버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120% 소화해내고 있다. 월드컵 주전이던 한국영을 밀어내고 기성용과 부동의 더블 볼란치로 자리매김했다. 박주호의 포지션 변화와 함께 이번 대회 5경기 연속 풀타임 출장한 김진수의 안정화도 빼놓을 수 없다.

차두리와 곽태휘의 활약은 '경험의 중요성'을 증명해주는 사례다. 이들은 이번 대표팀에서 몇안되는 30대 베테랑이다. 주전들의 경험 부족으로 위기 관리에 취약했던 월드컵 때와 달리, 아시안컵에서는 노련한 선수들이 포진해 공수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관절 부상으로 초반 벤치에서 시작했던 곽태휘는 호주전부터 선발로 출장하며 안정된 제공권 장악과 수비 지휘를 앞세워 3경기 연속 맹활약하고 있다. 조별리그 내내 변화가 심했던 중앙 수비라인은 곽태휘의 가세로 김영권까지 안정감을 찾으며 포백 라인의 조직력이 궤도에 올랐다.

차두리는 이번 대회에서 선발과 교체로 각각 두 경기씩 출장하며 특유의 폭발적인 돌파와 몸싸움으로 한국의 오른쪽 측면을 든든하게 장악하고 있다. 우즈베크전과의 8강 연장전에서 그림같은 단독 돌파에 이어 손흥민의 쐐기골을 어시스트하자 당시 중계하던 캐스터가 "저런 선수가 왜 월드컵 때는 해설을 했을까요?"라는 어록도 남겼다. 차두리는 이번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예정이라 호주와의 결승전이 그의 마지막 은퇴 경기가 될 전망이다.

불과 반년 전만 하더라도 이들의 활약을 다시 대표팀에서 볼수 있을지, 실망을 거듭하던 축구대표팀이 이처럼 화려하게 다시 비상할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지난 여름 음지에서 월드컵에 대한 실망감 속에 남모를 아픔과 눈물을 겪었던 이들의 절치부심이 있었기에 7개월 만에 호주에서 한국 축구의 부활도 가능했다.

월드컵 낙오병이라는 오명을 딛고 슈틸리케호의 황태자들의 거듭난 이들야말로 한국 축구의 이번 아시안컵 슬로건이기도 한 "타임 포 체인지(TIME for CHANGE)"의 의미를 그라운드에 실제로 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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