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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7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 편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 기자말

단성사 일을 소개해 준 하우스보이가 내게 또 일자리를 소개했다.

"종로 2가에 있는 집에서 사람을 쓴대요."

알려준 곳으로 가 보았다. 큰 기와집이 입구(口)자로 생겼는데, 그 안에 인부 4명이 중석을 다루고 있었다. 감독이 "중석에 대해 아시오?" 하고 물어 나도 "경험이 있어요"라고 했다. 어디서 했냐고 물어 황해도 곡산 중석 광산에서 했다고 대답하니 "아, 그래요?" 하면서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강원도 영월서 밀반출해 여기서 가공한 뒤 일본으로 밀수출한다고 했다. 그래서 낮에는 문을 잠그고 일하고, 물건은 밤에만 차에 실어 오고 나간다고 했다. 나는 거기서 먹고, 자고 하루 800원씩 받고 일했다.

어느 날 저녁, 중학생들이 "메밀묵 사려~"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봤다.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아 나도 밤에 팔아 보려고 동아극장 옆 메밀묵 공장으로 갔다. 보증금 없이 가져다 팔고, 남은 것은 반납하면 된다고 했다.

메밀묵 장사를 시작하다

메밀묵 장사를 시작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잘 되지 않았다.
 메밀묵 장사를 시작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잘 되지 않았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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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른 모를 받아 묵통을 어깨에 둘러메고 "메밀묵 사려, 메밀묵 사려!" 외치며 아무 골목이나 다녔다. 처음에는 어느 거리인지 이름을 몰랐지만 골목 골목을 누비는 동안 서울 지리를 많이 익히게 됐다.

낮에는 중석을 선광하고, 밤에는 메밀묵 장사를 해 빨리 돈을 벌고자 했다. 이렇게 20일간 일하니 연말이 다가왔다. 12월 23일경 중석 일이 끝났는데, 새달 10일을 더 지난 후 다시 일을 시작한다고 했다. 앞으로 20일 정도는 놀아야 할 판이었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기쁘다고 했지만 나는 일감이 없어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남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그동안 벌어 놓은 돈이 있어 12월 23일부터 그 달 26일까지는 놀았다. 서울 거리를 이리저리 다니며 구경했다. 12월 27일, 국제통신사 옆을 지나는데 잘 생긴 아가씨가 나를 불렀다. 내게 "아저씨 일 좀 하실래요?"하고 물어 하겠다고 하니 따라오라고 했다. 국제통신사 옆 대한조선협회로 갔다.

가는 도중 그 처녀를 보니 얼마나 예쁜지 한 눈에 반했다. 단발머리를 한 처녀였는데 열일곱 살 정도로 보였다. 협회에 가니 짐을 서울역까지 운반해서 부산으로 부쳐 달라고 했다. 나는 지게에다 짐을 지고 그 처녀를 따라 서울역으로 갔는데 힘들면 잠시 쉬어 가곤 했다. 그때마다 그 처녀를 바라보았다. 나보고 "힘들지요? 무겁지요?"라고 말을 걸어오면 기분이 좋아졌다. 서울역에서 짐을 부치고 그 처녀와 함께 조선협회로 와서 임금을 받았다. 그 후 그 처녀가 보고 싶어 가봤지만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 후 국제통신사 옆에 사는 할머니와 친해졌는데, 할머니는 내게 이북에서 내려와 객지 생활에 고생이 많다며 위로도 해주고, 일거리를 주선해 주기도 했다. 나는 그 집에서 연탄도 찍어주고, 여러 가지 일을 도와줬다.

하루는 할머니가 "우리 집에 처녀 애가 있는데 고향은 강원도 홍천일세. 6·25 때 부모를 잃고 우리 집에 사는 애인데 데리고 살지 않겠나? 원한다면 오늘 저녁부터라도 데리고 살게"하며 사람을 소개하는데, 키는 컸으나 인물이 별로였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후 낮에는 놀고, 밤에는 메밀묵 장사를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잘 팔리지 않았다.

나는 묵 통을 어깨에 메고 남산공원에 올라갔다. 날은 흐리고 푸근해 춥지는 않은 날이었다. 서울 거리를 내려다보며 지나온 날을 떠올리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가족들의 얼굴이 자꾸 생각났다. '잘 지내고 있을까? 얼마나 고생하며 살까? 무엇을 먹고 살까? 춥고 배고프지나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빨리 통일이 되어 그리운 가족을 상봉해야 할 텐데'하는 생각에 잠겼다.

남한에 와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나를 잘 봐주고, 가는 곳마다 먹을 것을 주고, 재워준 이웃의 따스한 고마운 마음도 떠올랐다. 나를 좋게 봐주는 마음, 내 동포니까 사랑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좌익, 우익하며 죽어간 억울한 동포들도 생각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배가 고팠다. 메밀묵이 팔리지 않으니 맥이 빠졌다. 맨 입에 두 개를 먹고 나니 기운이 났다.

12월 30일이 됐다. 남대문시장에 갔더니 기적같이 수용소에서 함께 지냈던 동료들을 만났다. 한 명은 신발 장사를 하고 있었고, 다른 이는 지게를 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그동안 고생한 얘기를 하며 동병상련의 마음을 달랬다. 밤에 교회에 가서 송년 예배를 보고 집에 도착했다.

12월 31일 동대문에 있는 연탄 공장에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보았다. 연탄을 지고 산 위에 있는 집에 배달하라는 것이었다. 지게에 연탄을 20장씩 지고 가파른 산을 오르는데 어찌나 힘든지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나는 오후 2시까지 그 일을 하고 그만두었다. 그날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저녁까지 서울 구경을 실컷 했다. 

도둑 신고하러 갔다가 입대

1954년 1월 1일 새해 아침 7시께였다. 자고 일어나니 한 사람이 "어, 도둑맞았네!"하고 소리쳤다. 이윽고 너도 나도 몽땅 털렸다고 소리쳤다. 결국 방안에 있던 사람 모두 도둑을 맞은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똥통까지 들어가 벌어 모은 몇 만 원을 몽땅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 돈이면 겨울을 날 수 있는 돈이었는데' 하는 생각에 망연자실했다.

나는 8시경 신당동파출소로 가서 어젯밤에 도둑맞은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경찰은 나를 보고 갑자기 "당신 군대에 갔다 왔소?" 하고 물었다. 나는 "아니요. 왜요? 신체검사에 불합격 맞았습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그럼 증명은 있소?"라고 되물었다.

나는 "증명서는 돈과 함께 도둑맞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잠깐 기다리시오" 하더니 조금 있다가 나를 택시에 태워 성동경찰서로 연행했다. 나는 도둑을 신고하러 갔다가 도리어 잡혀가게 되어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경찰서에는 언제 붙잡혀 왔는지 젊은 사람이 몇 백 명이나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낀 연말에 일부러 통행금지를 풀어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거리를 다니게 했다가 불시에 검문검색해 군대 가지 않고 숨었던 사람을 죄다 잡아 온 것이었다. 그 날은 종일 밥을 굶고 구속돼 있었다.

밤 11시께 저녁 식사로 우동이 들어왔다. 그런데 인원을 세지 않고 주니 앞 사람들이 먼저 받아먹고는 나중에 오는 것도 또 다시 먹어 치워 뒤에 있던 사람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굶고 말았다. 배가 매우 고팠다. 전날 저녁을 먹고 아침부터 자정이 되도록 쫄쫄 굶었기 때문이다.

우동이 들어오긴 했지만, 먹을 순 없었다.
 우동이 들어오긴 했지만, 먹을 순 없었다.
ⓒ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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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1월 2일 아침 10시경, 우리는 서울 일신국민학교로 실려 갔는데, 학교에 도착하니 각 구역마다 말뚝이 꽂혀 있고, 각 구역에서 잡아 온 사람들을 누가 제일 많이 잡았는지 수를 세고 있었다.

나는 우시장의 소처럼 주린 배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운동장 밖에서는 갑자기 끌려온 가족들을 찾는 소리로 야단법석이었다. 울타리 여기저기서 부모들이 아들 이름을 외치기도 하고, 새색시가 남편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교문에 매달려 경찰들에게 왜 접근을 못하게 하냐고 거칠게 항의도 하고 울부짖기도 했다.

나는 종일 서 있다가 밤 10시경 학교 교실의 찬 바닥에 앉아 싸늘한 도시락 한 개를 겨우 얻어먹었다. 밤을 새고 1월 3일 우리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플랫폼에서 "아무개야!" 하고 애절하게 소리 지르는 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차는 서울역을 출발했다. 모두 화물칸(방통)에 탔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가족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기차가 용산역을 지나 한강 철교에 도달했을 때였다. 옆에 있는 사람이 "군대 나가서 죽나, 여기서 도망가다 죽나 죽기는 마찬가지다"라며 한강철교에서 뛰어내렸다. 잠시 후 이 방통, 저 방통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한강으로 마구 뛰어내렸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면 떨어지다 받침목에 부딪칠지, 철교 난간에 부딪칠지 몰랐다. 그런데 그걸 겁내지 않고 냅다 뛰어 내렸다. 물에 떨어지는 요행을 바라고 뛰어 내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 '지금껏 전후방 일선에서 많은 사람이 싸우다 죽고, 젊은 나이에 많은 고행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들 덕에 여태 잘 살아왔는데 휴전된 마당에 군대 가는 것이 저렇게 목숨을 걸 만큼 싫은가? 다른 사람의 덕택으로 살아온 것을 고맙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들이 곱게 만은 보이지 않았다.

기차는 한강을 건너 노량진까지 가더니 다시 기수를 돌려 용산까지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방통 안에 무장한 군인을 한 사람씩 태웠다. 그리고는 다시 출발했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기차는 영등포역을 지나 남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어젯밤에 도시락 하나 먹고 지금까지 굶었다. 사흘 동안 겨우 한 끼만 먹고 그때까지 굶은 것이었다.  수원을 지나니 날이 어두워졌다. 기차는 밤 11시경 대전에 도착해서 잠시 정차했다. 기관차가 우리 방통을 떼 놓고 다른 기관차가 와서 우리를 달고 갈 때까지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논산까지...

나는 돈을 한 푼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돈을 가진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다. 그들은 역에서 술과 음식을 있는 대로 사서 먹었다. "어차피 군대 가면 죽을 텐데 돈을 아껴서 뭐하냐"면서 있는 대로 다 사왔다. 역에선 돈만 있으면 물건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호위하는 군인에게도 술과 음식을 마구 먹였다. 군인들은 시장한 김에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시더니 나중에는 곤드레만드레 취해 아무것도 모르고 골아 떨어졌다. 사람들은 그 틈을 타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웬만한 사람들은 마구 도망쳤는데 나처럼 오갈 때 없는 사람들은 어찌할 줄 모르다가 방통에 우두커니 남아 있었다. 이리역에 도착하고 보니 절반은 달아난 것 같았다.

새벽에 먼동이 터 환히 밝아오는 호남평야는 몹시 포근해 보였다. 8시경 기차는 군산에 도착했다. 역 앞에서는 어린애들이 이른 아침인데도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로 서성이는 모습이 보였다. 역에서 헌병들이 우리의 하차를 유도하다가 술 냄새가 폴폴 나는 인솔병을 마구 후려갈겼다. 그리고는 술을 먹고 정신이 없어 사람들이 다 도망을 가도 몰랐다고 호통을 쳤다. 맞은 군인들은 도리어 항의하며 말하길 "때리기는 왜 때려. 도망을 가긴 누가 가. 내가 몇 명을 인계 받았는지 알기나 해? 내가 인계받은 사람은 그대로 다 있어"하며 대거리를 했다.

사실 인원을 세고 인계 받은 것도 아니고, 서류도 없었으니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헌병은 술 취한 군인과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알았다며 우리를 군산 보충대로 인솔했다. 군산 보충대에서 조반을 먹고 나니 시장기가 가셨다.

1월 3일 오후엔 전 대원을 마당에 세우더니 "여러분 중 알아서 군대 못 갈 사람은 이리 나오라" 했다. 5, 6명이 앞으로 나가니 군홧발로 배를 차고 곤봉으로는 머리통을 후려 갈렸다. 앞에 나갔던 사람들은 모두 얻어 터져 순식간에 땅 바닥에 쭉 뻗어버렸다. 그리고는 또 다시 "다음! 군대 못 갈 사람! 이리 나와!" 하였다. 그 광경을 보고는 한 사람도 나가지 않았다. 

"다들 손을 들어! 허리를 펴! 손을 내려! 팔을 앞으로 올려!" 이렇게 몇 번 반복하더니 "다 됐어. 전부 합격!" 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신체검사를 참 간단히 하는구나' 생각했다. 다음 날 다시 신체 검사를 했는데 심하게 아픈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합격시켰다. 신체 검사 도중 군대 가기 싫어 고의적으로 상처를 낸 사람은 죽도록 얻어 맞았다.

1월 4일에 최종 신체 검사를 마치고 우리 모두는 군 입대가 확정됐다. 1월 5일에 기차를 타고 군산에서 군복을 갈아입고 논산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호남평야를 지나 우리는 강경역에 도착했다. 강경에서 논산훈련소까지 걸었는데,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1월 5일 저녁에 훈련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군기를 바로 잡는다며 말을 제대로 못하면 엄한 기합을 주었다.

처음에 훈련소에 도착하니 "지원해 온 사람 손 들어!" 했다. 붙잡혀 온 사람들도 몇몇은 따라서 손 드니 "여기 이 사람들은 이리 앉아!" 했다. 이어 "영장 받고 온 사람 영장 들고 손 들어!" 하고는 그 사람들은 그냥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붙잡혀 온 사람은 따로 고르더니 "이 놈의 새끼들, 어디 숨어있다 이제 끌려 왔어?" 하고는 귀 잡고 쪼그리고 앉아 뜀뛰기를 시켰다. 나는 장딴지에 쥐가 나도록 토끼뜀을 뛰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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