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미친 짓이다>, <쌍화점>이라는 걸출한 작품들이 있지만 감독 유하라는 이름에 가장 잘 맞는 옷은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일 것이다. 일명 '거리 시리즈'라는 두 작품들은 강남을 배경으로 폭력의 시대 속에 방황하는 주인공의 욕망과 배신을 그리고 있다.

<강남 1970>은 '거리 시리즈'의 최종 장으로 드디어 감독이 늘 이야기하던 '강남' 본연의 얼굴을 드러냈다. 상징적으로 앞선 두 작품의 프리퀄이라 볼 수 있는 영화는 1970년대로 돌아가 대한민국 부의 상징이 된 '강남' 구약성서를 탈고한다.

<강남 1970>은 바둑판과 같다. 전작들이 이름이 새겨진 장기 알들과 장군을 외치는 주인공의 활약에 주목했다면 <강남 1970>은 오로지 흑과 백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다. 어느 누구 하나 무게가 실린 캐릭터 없이 모두가 흑돌이고 모두가 백돌이다. 영화는 그 바둑판 위에 집을 먹고 집을 빼앗는 기보를 재연해낸다. 종대(이민호)와 중앙정보부 김부장(엄효섭)이라는 양 갈래에서 뻗어 나오는 뿌리는 일사분란하게 종횡으로 엮여 강남이라는 바둑판을 그려낸다.

그 길은 나쁘지 않다. 충분히 120여분 동안 관객들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을 정도로 흡입력이 있고 편린들이 쌓여 그림을 완성하는 것도 추리하는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은 361개 바둑알 중에 용기(김래원)가 반드시 들어갈 자리가 없단 점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김래원에게 별로 득이 될게 없다고 본다.

이민호같이 당당히 포스터 한 편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의 존재는 한없이 작아진다. 굳이 득을 찾자면 SBS 드라마 <펀치>의 박정환과 캐릭터가 겹쳐 드라마 시청률에 도움이 된다고 할까. <대부>를 만들고 싶었던 유하 감독의 욕심이 빚어낸 결과일까.

혹자는 감독이 일부러 신파를 배제했다고 했지만 오히려 신파조차 넣을 여유가 없어 보인다. <강남 1970>은 꽤 하고자 하는 말이 많다. 70년대 '부동산 개발'은 꽤 굵직한 이야기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한남대교를 짓고 또 그 과정에서 농지였던 강남땅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그 위에 논현동 공무원 아파트를 지었다. 그리고 강북에 개발제한을 걸고 강남에 취득세 면제 정책으로 강남 상권을 활성화 시켰고 건축비 지원과 세금 감면으로 명문 고등학교를 강남으로 이전시켰다.

그리하여 농지였던 강남은 천정부지 땅값이 치솟아 부촌의 상징 강남이 되어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의 배경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비리와 부덕이 존재했었는가. 유하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건 이거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자신의 장기를 수장시켜버렸다. 유하의 '거리 시리즈'는 폭력의 시대 속에 살아남기 위해 한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포착한다.

바람에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처음엔 살짝 몸을 맡겼지만 그 미묘한 흔들림은 멈추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진폭을 만들어낸다. 시대가 강제로 소년을 미완성된 어른으로 만들어버린다. 미숙하고 여린 소년의 옅은 숨소리에서 촉발되는 정서. 그래서 그는 당대 청춘 스타였던 권상우와 조인성을 캐스팅 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이 단순한 학원물이, 단순한 조폭 영화가 아닌 이유는 그 변질의 순간을 흡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강남 1970>은 그 순간을 놓쳤다. 편집의 문제인가, 시나리오의 문제인가. 용기와 길수(정진영) 사이에서 방황하는, 선혜(설현)를 먼만치 바라봐야만 하는 소년 종대를 외면해버린 영화는 그저 한편의 시대극이 된 느낌이다. 종대는 이야기와 발을 맞추지 않고 홀로 먼저 가장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길수와 용기는 관객은커녕 종대도 흔들지 못한 채 휘발된다. 영화 중반부터 모든 캐릭터는 정형화되어 각자의 이름을 상실한다.

길수 부녀는 신파극에 등장하는 '가난하지만 선량한 소시민'이 되어 종대의 벼랑 끝으로 밀어 넣고 용기는 어느 조폭 영화에 등장하는 비겁한 악역이 되어 반전이 보이는 반전을 향해 차를 몬다. 민성희(김지수)와 종대의 입맞춤과 "땅종대, 돈용기"라는 대사에서 헛웃음이 나오는 건 부족한 정서를 채우려는 이 영화 나름의 허풍이기 때문이다.

진부하단 말로 마음 둘 곳 없는 영화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하고자하는 말을 한 뚝심 있는 영화다. 폭력과 섹스가 결국은 관계성 암시에 그쳐 사족이 되었지만 그렇게 벌어들인 시간으로 '정치인-땅-조폭'이라는 큰 덩어리를 무리없이 다 소화시켰다. 특히 영화 마지막 신은 정을 내리찍듯 현재의 강남을 보여주며 드디어 천민자본주의가 둥지를 틀었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땅에서 군부독재의 망령이 추악한 날개를 펼치는 장면은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에서 받았던 충격이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대를 다룬 <국제시장>과 <강남 1970>과 나란히 걸려있다. 선택과 배제 앞에서 전자는 근현대사를 추억하고 현재를 위로한다면 후자는 문제를 드러내고 현재를 반성하도록 한다. 두 영화를 묶어보자면 <국제시장>에서 열심히 땀흘려가며 돈을 모았지만 <강남 1970>이 모두 착취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과연 강남 그리고 서울, 대한민국은 어떤 곳일까. 필자의 눈에 이곳은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뒤엉켜있는 바로, 세상이다.

강남 1970 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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