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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안성의 한 카페에서 이재형(27)씨를 처음 본 느낌은 '키 크고 잘 생겼다' 였다. 또, 농촌 총각 티(?)가 하나도 안 난다. 그러면 그렇지. 서울에서 대학 다니던 시절에 실제로 패션모델로 계약을 맺기도 했었단다. 그런데 이런 총각이 왜 지금 안성 시골에 내려와 농원을 하고 있는 걸까.

재형씨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다. 20세때 패션모델로 전속계약을 맺을 정도였단다. 이젠 농촌에서 농사와 농원 일을 하는 농촌총각이 다 됐다.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 이재형씨 재형씨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다. 20세때 패션모델로 전속계약을 맺을 정도였단다. 이젠 농촌에서 농사와 농원 일을 하는 농촌총각이 다 됐다.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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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어머니 때문에 농원 일 앞당겼다

재형씨가 대학생활을 하고 있던 스무 살 시절, 청천벽력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재형씨는 모든 걸 내 팽개치고 당장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3일 정도를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재형씨는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어머니를 힘들게 한 집안이 미워서 미칠 정도였다. 재형씨는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며 자신의 삶조차 재고해볼 지경이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어머니는 쓰러진 지 3일 째 되던 날, 눈을 떴다. 재형씨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그 며칠 사이에 지옥과 천국을 왔다 갔다"며 눈물을 흘렸다. 신기하게도 어머니가 눈을 떠는 순간, 원망은 다 사라지고 '이제부터 내가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물밀듯 밀려왔다고 했다.

여기서 잠깐. 어머니를 생각하는 맘이 갸륵한 건 알겠지만, 어머니가 쓰러지셨다고 청년자신의 삶을 재고하는 건 좀 오버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재형씨가 어린 시절 부모님을 바라보며 생각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 도와 농사 짓는 것'이 꿈이었는데...

아버지는 안성사람이고 어머니는 서울사람이었다. 재형씨는 어렸을 적부터 시부모 모시고 농원 일을 하며 고생하는 어머니와 그 옆에서 묵묵히 일만 하는 아버지를 보아왔다. 재형씨는 커면서 '내가 빨리 커서 부모님을 고생시키지 않으리라'고 수없이 다짐했다.

대학도 토목과로 진학한 건 부모님이 경영하시는 관광농원을 자신의 손으로 건축물을 지어 세워보겠다는 야무진 꿈의 발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부모님의 농원에서 함께 일하는 게 자신의 꿈이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가끔씩 집에 내려와 집안 일을 도왔고, 대학 내내 농원에 맘이 가 있었다.

4H 농촌총각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이재형씨 동료들 중에는 소농장, 특수작물 농장 등을 하는 총각들이 대부분이다.
▲ 4H 농촌총각들과 함께 4H 농촌총각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이재형씨 동료들 중에는 소농장, 특수작물 농장 등을 하는 총각들이 대부분이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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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재형씨에게 '어머니의 쓰러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세상의 어떤 아들도 그랬겠지만, 특히 재형씨에게 더 충격이었던 건 그가 앞으로 살아갈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재형씨는 대학을 당장 그만두고 어머니의 병수발을 들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점차 회복이 되어 요즘은 고된 일은 하지 못해도 자신 스스로 기동은 하신다고 했다.

"군대를 '집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복무했어요"

어머니가 회복되자 재형씨는 마음을 더 다 잡았다.

'이제부터 농원을 내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한참 친구들 만나고, 자신의 관심사에 푹 빠져 있을 수 있는 20대 총각은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때,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재형씨는 길을 알아봤다. 산업기능요원의 길이 있었다. 산업기능요원? 그건 한마디로 '군대가 곧 집'이 되는 경우다. 군대에 가는 대신 부모님의 농사를 도와 자신이 농사를 경영하면 군대복무와 똑같이 인정받는 제도다. 이때 재형씨는 안성 4H(지(智), 덕(德), 노(勞), 체(體)를 추구하는 한국청년운동단체)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재형씨는 아버지와 함께 농원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천 평 정도의 밭에 작물을 심었다. 그 작물은 고스란히 농원 손님들의 밥상에 올랐다. 표고버섯도 재배하고 논농사도 했다. 농원의 필요에 따라 각종 건물도 지었다.

그가 이렇게 열심히 일한 이유를 "내가 게을리하면 그 전의 상태로 돌아갈까 봐 잠시라도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는 그의 말에서 읽을 수 있었다. 바쁘게 살아온 결과, 지금은 농원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많이 회복이 되었다.

이젠 장가가겠다는 목표도 알고 보니...

재형씨는 올해부터 안성 4H 회장을 맡았다. 이런 데는 그만의 이유가 있다. 자신이 힘들 때, 함께 해준 4H 동료들이 고마워서이다. 자신도 어머니도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할 때가 되었다는 게다.

지금은 4H 회원들과 함께 나무심기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4H의 기본 방향이 지도자 양성이기에 이들은 사회에 봉사하는 일들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 4H 회원들과 지금은 4H 회원들과 함께 나무심기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4H의 기본 방향이 지도자 양성이기에 이들은 사회에 봉사하는 일들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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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는 알겠는데, 어머니의 홀로서기라니? 수년 동안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 달려오다 보니 어머니는 지나치게 아들을 의존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외롭고 힘들다고 느낄만큼 말이다.

"이런 어머니를 홀로 서게 해드려야 부부 문제는 당사자들이 해결할 것"이라며 재형씨가 웃는다. 그래야 노년이 될수록 부모님이 행복할 거고, 부모님이 행복해야 자신도 행복할거라나 뭐라나. 

자신의 홀로서기를 위해 4H 회장직을 수락한 것 외에 이제 장가도 가야겠다는 재형씨. 자신이 장가를 가지 않으면 "아들 고생시키며 장가도 못 보낸 부모"라 욕먹을 걸 우려하기 때문이다.


태그:#4H, #농촌총각, #관광농원, #이재형,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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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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