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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7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 편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 기자말

이튿날 그 집 식구들과 김포 들판에 나가 벼를 베기 시작했다. 들판의 벼가 아주 잘 익었다. 하루 종일 벼를 베고 나니 몸이 매우 피곤했다. 김포 비행장에서는 쉴 새 없이 비행기가 오르내리고 북쪽의 작은 산에서는 레이더가 계속 돌고 있었다. 그날 저녁 동네 바람을 쐬며 북쪽을 바라보니 판문점 쪽에서 반짝이는 신호탄이 계속 터지고 있었다.

며칠 간 벼를 베고 난 후였다. 그 집에는 열네 살짜리 어린 계집아이가 식사며 여러 가지 집안일을 하고 있었는데 노인이 하는 말이 "자네 딴 생각 말고 일만 잘해주게. 그리고 저 아이 어떠한가? 마음에 드는가? 얘는 우리 친척이 아니고 6·25 때 부모를 잃고 우리 집에 와서 있는데... 자네가 착하고 참해 보이니 내가 하는 말일세. 마음에 들면 신부로 삼고 살아도 좋다"며 "좋다면 당장 허락하겠네" 했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곱고, 키도 나만 했다. 그러나 아이가 아직 어리고 나도 결혼 문제를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냥 흘려듣고 말았다.

한 열흘간 일을 했는데 수원에 피난민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노인한테 그동안 신세를 져서 고맙다고 인사드리고, 고향에서 혹시나 우리 가족이나 친척이 내려와 있을지 몰라 가족을 찾으러 가겠다고 하니 "식구를 찾기 위해 간다는데 할 말이 없네"라고 말했다. 나는 단 한 가지, 식구들과 고향 친척을 만날 수만 있다면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노인은 열흘간의 품삯을 주었다.

나는 이튿날 떠난다는 인사를 드렸더니 집안 식구를 찾아보고 언제라도 오면 받아 줄 테니 찾아오라고 했다. "예" 하고 인사를 드리고 수원으로 떠났다. 버스를 타고 수원으로 가니 수원도 영등포처럼 많이 파괴돼 있었다. 나는 피난민 수용소를 돌며 명부를 찾아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고향 친구나 일가친척은 없어 하는 수 없이 수원서 십 리쯤 떨어진 원천으로 갔다.

원천에서 또 피난민 수용소에 들러 명부를 보았으나 역시 없었다. 나는 그날 수용소 기숙사에서 경비원과 함께 잠을 잤다. 저녁밥을 먹고 깊은 잠에 들었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서 잠이 깼다. 방에 불이 환히 켜 있는데 경비원이 눈을 하얗게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토하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발을 막 휘둘렀다. 나는 그를 보고 겁이 버럭 났다.

이 밤중에 이를 어쩌나하여 가만히 보니 입에서 벌건 피거품을 막 토하고 온몸을 떨며 야단이었다. 나는 옆집에 가서 자는 사람을 깨웠다. 내가 "큰일 났습니다. 경비원이 죽어갑니다"라고 말했지만 아주머니는 태연한 태도로 "걱정 말아요. 그 사람은 가끔 간질로 발작을 하는데 한참 있으면 도로 돌아와요. 가서 가만히 계세요. 금방 괜찮을 거예요" 했다.

나는 다시 돌아와 그 사람이 정신 차릴 때를 기다렸다. 한참 있으니 조용해지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게 일어났다. 이튿날 원천 저수지 옆으로 가서 일할 곳을 구했다. 원천 일대는 집들은 초가집이었으나, 큰 양조장이 있을 정도로 동네는 살기 좋았다. 나는 백씨 할머니 댁에 들어가 당분간 일하기로 했다. 

마침 추수철이라 바로 그 날부터 벼를 베기 시작했다. 거기서 10일 동안 일을 하게 됐는데 저녁에 일을 하고 나면 할머니는 내게 기도를 해주고, 북에 두고 온 가족과 나를 위해 염려해주기도 했다. 할머니는 자기 아들도 의용군으로 끌려가 아직도 행방불명이라면서 무척 걱정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 강원도 이천이라 대답하니 "부모, 형제가 어떻게 되는지? 고향서 무엇을 했는지? 왜 혼자 월남했는지?" 등을 궁금해 했다.

며칠 간 일하니 하루는 나보고 자네 색시를 얻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17살 처녀가 있는데 인물이 천하일색이네. 얼굴이 얼마나 고운지 말도 못하네" 하는 것이다. 낮에는 일을 하면서도 고향 사람을 찾겠다는 생각 외엔 별로 생각이 없었으나, 얼굴이 하도 곱다는 말에 사정을 물어보았다.

40세 정도 되는 과수댁의 딸인데, 농사일이 많아 장가 들어 몇 해만 지내면 땅도 주고, 살림도 내준다면서 데릴사위로 가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다 그렇게 고운 처녀는 보기 어렵다는 말에 해볼까 하는 마음을 먹었다가, 그 집에 내가 인민군대 출신이고 지금은 아무 증명도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다고 하여 단념하고 말았다.

낮에는 반짝하고 더우나 이미 늦가을로 접어들었다. 하루는 벼를 나르며 일을 하는데 수원여고생들이 소풍을 나왔다가 가는 것을 보고 '이북에 있는 여동생도 저만큼 컸겠구나' 생각하니 집이 더욱 그리워졌다. 나는 거기서 며칠 더 일하고 9월 26일에 원주로 가기로 했다.

수원서 원천, 신갈로 가는 길에는 가로수가 매우 잘 자라고 있었다. 신작로 양쪽에 우거진 가로수는 어려서 국민학교 교과서에서 보는 그림과 똑같아 보였다. 들판에 무르익은 벼와 볏단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얼마를 가니 산이 나오고, 고개 넘어 용인을 지나서 신갈로 갔다. 신갈을 지나 얼마쯤 가니 광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나는 거기서 계속 동쪽으로 걸었다. 산은 높고 물은 맑아 매우 아름다웠다. 휴전된 지 얼마 안 돼 여기저기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동네마다 타버린 집터와 부서진 다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길가에 탱크가 파괴된 채 방치된 것도 보였다.

나는 그날 저녁 이천군을 채 못 가 산 넘어 한 동네에 머물렀다. 지나는 행인에게 하룻밤을 쉬어가도 되겠느냐고 청을 드렸다. 객지에서 고생한다며 쉬어가라 하여 그 집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다.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나니 주인은 "어디로 가는 객이요?" 하고 물었다.

낯선 이 재워주고, 먹여주고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세종대왕릉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세종대왕릉
ⓒ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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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25 때 나온 얘기며 그동안 겪은 얘기를 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 빨리 가족을 찾아 행복한 생활을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낯 모르는 사람을 집에 재워주며 식사도 주는 주인께 감사 드렸다. 그는 원주로 가면 강원도 피난민이 많다고 알려 주었다. 

이튿날 산을 넘어 이천읍에 갔다. 깊은 분지에 자리 잡은 이천읍은 매우 고요한 시골 마을이었다. 인구는 얼마 안 되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잘 정리된 논 벌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천읍을 바라보며 동쪽의 높은 산을 쳐다봤다. '저 산을 넘어가면 강원도겠지' 나는 하루빨리 강원도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을 재촉했다. 

호주머니에는 얼마 안 되는 돈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이것으로 무엇을 사 먹으면 노잣돈이 금방 떨어질 판이었다. 얼마를 걸어가니 세종대왕릉이 보였다. 간판에 '여기는 능서면입니다'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세종대왕이 바로 여기에 잠드셨구나' 생각했다.

오후 늦게 여주에 도착했다. 여주는 평야 가운데 있는 읍이었다. 건물은 볼 것 없는 촌이나 다름없는 도시였다. 나는 거기서 '차를 타야 원주까지 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버스에 탔다. 주차장에 버스가 섰을 때 "껌이요, 담배요, 고구마 사세요, 떡이나 빵 사세요" 하는 처녀들의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지역에선 기차가 역마다 서면, 역이 떠나가라 큰소리로 외치던데 여기 아가씨들은 얼마나 고운 목소리로 말하는지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간을 녹이듯 말하는 것을 보고 탄복을 했다. '과연 고운 얼굴에 고운 목소리구나' 하고 정신이 쏙 빠져 바라보았다.

여주에서 얼마 안 가 남한강을 건넜다. 강변에는 떡도 팔고, 술도 파는 곳이 있었다. 나는 돈이 없어 사 먹지 못하고 군침만 삼킨 채 눈요기만 했다. 들판의 벼는 거의 벴고 볏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공교롭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얼마를 가니 산들이 나오는데 비탈길을 따라 산길은 구불구불 오르막이었다. 산비탈에 구불구불 쟁반을 펼쳐놓은 계단식으로 만든 논을 보고 나는 저런 산에 어떻게 층층계단으로 만들어 논을 만들었나 생각했다. 높은 산은 아니었으나 조금은 험했다. 

문막을 지나면서 논에 매어놓은 벼가 그대로 비를 맞는 것을 보면서 저 벼가 젖으니 농민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생각했다. 그날 저녁에 원주에 도착했다. 원주시는 별 볼 것이 없었고 나는 이틀 동안 피난민 수용소를 찾아 살펴보았으나 친척이나 아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매우 실망해 이제는 가족을 찾는 걸 그만두고 월동 준비나 하면서 우선 내 살 길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중앙동에 방을 정하고 낮에는 시장에 나가 일을 했다. 짐을 싣기도 하고 부리기도 하며 며칠간 일했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강원도 영월 중석 광산에 가면 돈벌이가 잘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바로 영월로 출발했다. 원주서 동으로 신림 쪽을 향하는 길은 비록 좁기는 하였지만 평지가 이어졌다. 

원주시를 빠져 나가는데 미군 부대가 많이 보였고, 여러 중장비도 눈에 띄었다. 길가에는 흙을 말려 구운 벽돌로 집을 짓고 있는 것도 보였다. 나는 길이 넓게 닦여 있는 것을 보고 '이 산골에도 군대 때문에 길 만큼은 널찍하게 잘 닦았구나'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얼마쯤 가니 기찻길이 산자락을 돌며 똬리 모양을 한 철로가 보였다. 나는 그 고개를 넘어 저녁 때 신림에 도착했다. 신림은 계곡이 유명한 곳으로, 충북 제천군(현재 제천시)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신림에 도착하니 철도 경찰이 나를 보고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나는 "영월로 갑니다" 하고 대답하니 "뭐 하러 가냐?" 라고 재차 물었다. "광산에 가면 돈벌이가 좋다 해서 가요" 라고 말하니 "당신은 거기 가도 안 될 것이오. 군대에 나갈 연령이 된 사람은 받지 않으니 괜히 고생 말고 다른 데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소"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그날 저녁 잠을 자려 한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정미소를 하는 집이었다. 주인은 저녁 식사 후 "우리 일이 바쁜데 도와주시오. 겨울을 나도 좋고 얼마든지 있어도 좋소"라며 정미소로 안내했다. 도정기에 낡은 일제 닛산 엔진을 걸어 놓았는데 자기가 엔진 기술이 없어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다음 날부터 난 방아 찧는 일을 시작했다. 일은 매우 바빴다. 무거운 쌀가마니를 다루는 일이 내게는 힘에 부쳤다. 

며칠 일하고 나니 하루는 동네 노인이 나에게 고향이 어디며 몇 살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다. 노인은 나보고 객지에서 고생이 많다며 떠돌이 생활을 그만두고 정착된 생활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나도 그렇게 되길 원한다고 대답했다.

노인이 얘길 하길 "우리 집에 처녀가 있는데 내일 저녁에 와서 구경하고 마음이 있으면 같이 살아보라" 고 했다. 나이가 14살로 아직은 어리지만 아주 잘생기고 착하니 몇 해만 지나면 좋은 색시가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도 결혼할 생각이 없어 가타부타 대답도 않고 그냥 흘려 듣고 말았다. 그 이튿날 정미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주인집 처녀가 내게 하는 말이 "어제 저녁에 말하던 처녀가 바로 쟤예요" 하고 가리키는데 단발머리에 책보를 허리에 차고 동무들과 신림국민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산에 올라가 나무도 해오고, 여러 일을 거들었으나 품삯은 얼마라고 작정도 안 하고 일을 했다. 주인 양반은 본처를 잃고 후처를 데리고 사는데 열아홉 먹은 큰아들과 고만 고만한 딸 둘이 있었다. 엄마와 아이들 사이에 가끔 서로 시샘하는 일도 벌어졌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새엄마한테만 관심이 커. 우리는 남인걸" 하며 새엄마를 미워했다.

밥벌이를 찾아 떠난 여정

옛 단성사 모습.
 옛 단성사 모습.
ⓒ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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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정도 일한 후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겨울을 나 봐야 별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11월 중순경 원주로 가서 중앙동에 자리를 잡고 일을 했다. 11월 하순까지 일했는데 시골에서는 고생만 했지 앞날이 보이지 않겠다는 생각하고 서울행 버스를 탔다.

밤늦게 서울운동장 맞은편에 있는 경기여객 터미널에 도착했다. 서울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남대문 근처에 있는 하숙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 날 남대문 시장에서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데 지나가던 노인이 "뭘 찾느냐?"고 물었다.

일자리가 없냐고 하니 "그렇게 맨몸으로는 종일 돌아다녀도 소용없어. 작업복에 지게를 지고 있어야 일이 생기지" 했다. 그 말을 듣고 청량리로 가서 지게 하나를 700원에 산 후 허름한 군복을 검게 물들여 입고 시내로 나갔더니 여기저기서 불렀다. 지게로 한 번 짐을 나르면 2원에서 5원까지 받았다. 국밥 한 그릇이 10원이었다. 하루 열 번 이상 일을 받아 돈벌이가 그런대로 잘 됐다.

나는 다시 중앙시장에 하숙을 정하고 지게 일을 하면서 고정적 벌이를 찾으려고 했다. 하루는 동양영화주식회사 하우스보이가 나를 보더니 일 좀 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아무 일이나 다 하겠다고 하니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뚱뚱한 사람이 나보고 "땅 속에서 일하면 8시간에 2천 원이고 땅 밖에서 하면 천 원인데 하겠소?"하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물었으나 그건 묻지 말고 따라만 오라고 했다. 도착한 곳은 옛날 대륙극장이었던 단성사였다. 

단성사의 내부 변소가 내려 앉아 망가졌는데 그것을 수리하는 작업이었다. 인부들이 나를 보더니 하는 말이 "십장님,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잘 구했어요?" 하며 야단들이었다. "당신 참 잘 왔소"하며 당신 같은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참 잘됐다며 반가워했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작업복과 모자를 챙겨 입고 가보니 화장실 하수구가 얼마나 좁은 지 들어가 매달려서 간신히 작은 구멍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똥물이 가득한 곳에서 돌과 벽돌을 담아 주면 위에서 끌어올려 내버리는 작업을 했는데 여덟 시간을 하고 나니 나보고 여덟 시간을 더하라고 해서 나는 꼬박 열여섯 시간 일을 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밤 11시가 되었다. 나는 그날 하루 사천 원을 벌었고, 다른 사람은 이천 원을 받았다. 이튿날, 그 다음 날도 계속 야간 작업을 해서 그 일을 마쳤다. 나는 사흘 만에 거금 만 이천 원을 손에 쥐었다. 그 돈이면 보름을 일했어야 했는데 시골 같으면 한 달 품삯이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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