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약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정협(24, 상주 상무)이라는 이름은 축구 팬들에게도 생소했다. 그 나이 또래 흔한 유망주처럼 크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도 없었고, 연령대별 대표팀에 발탁된 경험은 전무했다. 한마디로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의 평범한 선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정협, 빛나기 시작하다

이정협은 2013년 부산 아이파크를 통해 프로에 데뷔했지만, 첫해 2골에 그치며 그다지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2014시즌을 앞두고서는 기존 주전 공격수 양동현(현 울산)이 전역하며 입지가 더욱 좁아진 이정협은 결국 구단의 권유로 반쯤 등 떠밀린 상태에서 군 입대를 결정하게 됐다. 그나마 상무에서도 계속된 경쟁으로 첫해부터 주전은 아니었다.

이정협의 운명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지난 겨울 슈틸리케 감독이 아시안컵 최종 엔트리에 전격적으로 그를 발탁하면서부터다. 이정협은 지난 겨울 아시안컵을 대비해 국내파 위주로 제주도에서 열린 전지훈련에 소집됐지만, 이때만해도 그를 주목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부상으로 아시안컵 출전이 불발된 이동국과 김신욱의 자리를 메울 대안으로, 초기엔 이정협보다 연령대별 대표팀에서 활약한 김승대나 강수일 등이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의 최종 선택은 놀랍게도 이정협이었다. 그와 함께 아시안컵 대표팀 공격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근호나 조영철이 2선 공격수나 제로톱 유형에 더 가까운 선수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정통 스트라이커로서는 이정협이 유일하게 선택받은 셈이다. 이근호-조영철과는 다른 유형의 '타깃맨' 자원이 필요했던 슈틸리케 감독은 186cm의 좋은 신체 조건에 성실함과 활동량을 겸비한 이정협의 잠재력에 주목했다.

더구나 이정협의 발탁이 더욱 놀라움을 자아낸 것은 그와 아시안컵 엔트리 승선을 놓고 다투던 경쟁상대가 다름 아닌 '뜨거운 감자' 박주영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브라질월드컵에서의 부진으로 국민적 비난을 받았던 박주영이었지만, 이동국-김신욱이 부상으로 모두 빠진 상황에서 박주영은 사실상 몇 안 남은 보험용 카드였다.

박주영이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장기간 골을 못 넣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중동 진출 이후 무적 신분에서 벗어나며 최소한 경기 감각에는 문제가 없었다. 만일 국내파 감독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박주영 카드를 배제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박주영을 두고 A매치 경험이 전무한 풋내기 이정협을 발탁한 슈틸리케 감독의 선택을 '도박'이라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한 달 후, 슈틸리케 감독의 선택은 '신의 한 수'로 되돌아왔다. 이정협은 A매치 데뷔 전이었던 사우디와의 평가전에서 교체 출전해 자신의 대표팀 첫 골을 신고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아시안컵에서도 5경기에 출전해 두 골을 터뜨리며 손흥민과 팀 내 득점 공동 선두에 올랐다. 한 달 전만 해도 축구 팬조차 잘 모르던 무명 선수가 2015년 들어 치른 6번의 A매치에서 3골을 터뜨리는 깜짝 활약으로 일약 '신데렐라'가 되는 순간이었다.

 26일 호주 시드니의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2015 AFC 아시안컵 준결승 한국 대 이라크 경기. 김영권이 추가골을 넣은 뒤 선제골을 넣은 이정협과 환호하고 있다.

지난 26일 호주 시드니의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2015 AFC 아시안컵 준결승 한국 대 이라크 경기. 김영권이 추가골을 넣은 뒤 선제골을 넣은 이정협과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애당초 조커 자원 정도로 예상됐던 이정협은 조별 리그 최종전이던 호주전부터 일약 선발로 올라섰다. 대표팀 분위기의 전환점이 된 호주전에서 이정협은 결승골을 넣으며 한국의 조 1위를 견인했다. 이어 이라크와의 준결승전에서도 헤딩골 포함 1골 1도움의 맹활약을 이어갔다.

이근호-조영철 등을 앞세운 제로톱 전술이 기대에 못 미쳤던 슈틸리케 감독은 이정협을 내세운 정통 원톱 전술로 회귀했다. 이정협이 포스트플레이와 수비 가담에서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표팀의 공수 밸런스가 한층 제자리를 찾는데 기여했다. 이정협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전과 더불어, 저평가받던 슈틸리케호는 일약 27년 만의 결승 진출에 성공하며 이제는 우승을 넘보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정협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한국축구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첫 번째는 음지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무명 선수들. 특히 K리거에 전해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이정협이 대표팀에 처음 이름을 올리는 과정은 마치 박지성의 과거를 연상케 한다. 지금은 한국 축구의 전설로 꼽히는 박지성이지만, 스무 살 때만 하더라도 프로 지명도 받지 못한 철저한 무명에 불과했다.

박지성은 올림픽 팀 연습 경기에서 당시 허정무 감독의 눈에 띄어 시드니올림픽과 아시안컵에 잇달아 승선했고, 이후 히딩크 감독에 이어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 거듭나는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이정협과 박지성의 공통점은 시작이 화려하지 않아도 '준비된 자에게는 언젠가 기회가 돌아온다'는 교훈이다.

이름값, 몸값보다 중요한 선수 개인의 '경기력'

최근 대표팀에서는 해외파의 비중이 높은 게 보편적이다. 이번 아시안컵 대표팀만 하더라도 K리거는 총 5명, 그나마 필드 플레이어는 이정협을 포함해 3명(차두리, 한교원)에 불과하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철저한 무명에 가깝던 이정협이 아시안컵에서 쟁쟁한 해외파 선수들을 제치고 당당히 한국의 최전방을 책임지며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축구에 많은 상처를 안겼던 지난해 브라질월드컵에서도 손흥민과 함께 그나마 좋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들은 이근호, 김신욱, 김승규 등 과소 평가받던 K리거들이었다. 특히 이근호는 지금의 이정협처럼 월드컵 당시 군인 신분으로 골을 넣었다.

선수의 진정한 가치란 몸값이나 이름값이 아닌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는 경기력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속팀에서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준 선수들. 대표팀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이 있는 선수들은 K리거라도 충분히 해외파 못지않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좋은 증명이다. 이정협 효과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는 한국 축구 내부에 아직 남아 있는 낡은 고정 관념과 게으른 선입견을 왜 혁파해야만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슈틸리케 감독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번 아시안컵에서 이정협의 활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정협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선수가 아니다. 그러나 슈틸리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이정협 같은 선수를 주목하지 않았다. 한국 축구에 대해 전혀 모르던, 정식으로 취임한 지 불과 3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는 외국인 감독이 이정협 같은 '흙 속의 진주'를 발굴해낼 동안, 축구계나 역대 대표팀 감독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자기 반성도 필요하다.

어쩌면 이정협을 발굴해낸 슈틸리케 감독의 선택은 그가 '외국인 감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측면도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들이 한국 축구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국내파 지도자들 특유의 편견과 고정 관념에 해당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제로 베이스'에서의 경쟁과 '플랜 B의 발굴'이라는 초심을 확실하게 지켰기에, 슈틸리케 감독은 주전 공격수들의 부상이라는 최대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꿔낼 수 있었다. 이정협의 신데렐라 스토리 뒤에 가려진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은, '우리가 바로 이래서 외국인 감독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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