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심 또 한 번의 이변을 기대(?)했지만 UAE에게 두 번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5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결승은 모두의 예상대로 무실점 한국과 개최국 호주의 재대결로 결정됐다.

호주의 전력은 역시 강했다. 조별 리그에서 한국에게 패하며 조 2위로 8강에 오른 호주는 8강과 준결승에서 중국과 UAE를 나란히 2-0으로 제압했다. 하지만 한국도 호주가 결승 상대가 될 것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호주에는 장신 수비수들이 많다. 아무래도 제공권 싸움에서 불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렇다고 공중볼 다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결국 이번 아시안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떠오른 '군데렐라' 이정협(상주 상무)에게 또 한 번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슈틸리케 감독의 눈에 보였던 이정협의 가능성

국가대표팀에서 뛰는 대부분의 선수는 어린 시절부터 연령별 대표팀을 거치며 A대표팀에 선발되는 과정을 겪는다. 그만큼 수 많은 축구 선수 중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재능을 가진 선수만이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정협은 그 흔한 연령별 대표팀에 한 번도 선발된 적이 없다. 부산 아이파크의 유스 팀인 동래고 출신으로 숭실대를 거쳐 2013년 부산 아이파크에 입단한 이정협은 K리그에서도 크게 눈에 돋보이는 선수가 아니었다.

입단 첫해에 올린 기록은 27경기 출전 2골 2도움에 불과하다. 2013 시즌 종료 후 양동현이 군에서 전역하면서 상주 상무에 입단한 이정협은 상주에서도 25경기 4골에 불과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던 이정협을 눈여겨 본 이가 있었으니 바로 대표팀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상주의 경기를 여러 차례 관전한 후 이정협을 직접 선발했고, 제주도 전지훈련을 거친 후 아시안컵 최종 명단을 발표할 때까지 이정협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당시 축구 팬들 사이에서 이정협의 선발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던 것은 당연지사.

이정협은 지난 4일 A매치 데뷔전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평가전에서 교체 선수로 나와 후반 추가 시간에 데뷔골을 기록했다. 아시안컵 개막 후 오만전과 쿠웨이트전에서 조커로 투입됐던 이정협은 17일 호주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드디어 '사고'를 쳤다.

이정협은 전반 31분 기성용의 패스를 받은 이근호의 왼발크로스를 살짝 방향만 바꿔 호주의 골망을 흔드는 결승골을 터트렸다. 슈틸리케호의 신데렐라로 떠오른 이정협은 골을 성공시킨 후 거수경례 세리머니를 선보이며 자신이 현역 군인임을 잊지 않았다.

대표팀 최다 공격포인트, 결승전에 한 번 더?

원톱 부재에 시달리던 슈틸리케호는 이정협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발굴했다. 이정협은 지난 22일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에서 82분 동안 그라운드를 누비며 우즈베키스탄의 수비진을 괴롭혔다. 덕분에 한국은 연장전에서 지친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 2골을 넣을 수 있었다.

지난 26일 이라크와의 준결승은 이정협이 가진 뛰어난 신체 조건을 십분 발휘한 경기였다. 전반 19분 김진수의 프리킥 상황에서 이라크 수비진을 헤치고 그림 같은 헤딩골을 성공한 이정협은 후반 4분에도 가슴 트래핑으로 김영권의 추가골을 도왔다.

이정협은 이번 아시안컵에서 5경기에 출전(3선발, 2교체)해 3개의 공격 포인트(2골1도움)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한국 대표팀에서 가장 많은 공격 포인트로 이정협은 이번 대회에서 주전 원톱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정협은 큰 이변이 없는 한 오는 31일 호주와의 결승에서도 선발로 출전할 가능성이 높다. 호주 대표팀에는 193cm의 매튜 스피라노비치와 184cm의 트렌트 세인즈베리 같은 장신 수비수들이 버티고 있다. 게다가 호주는 조별리그에서 이정협에게 결승골을 허용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강하고 거칠게 이정협을 압박할 것이다.

하지만 이정협이 주눅들 필요는 전혀 없다. 이정협의 왼쪽에는 손흥민(레버쿠젠), 오른쪽에는 이근호(엘 자이시 SC,)와 한교원(전북현대), 뒤로는 남태희(레크위야SC), 기성용(스완지시티) 같은 든든한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다 보면 '대형사고'를 칠 기회는 얼마든지 찾아올 것이다.

20만 원도 채 안 되는 월급을 받는 대한민국 육군 상병 이정협은 벌써 아시안컵에서만 3개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대회 초반에 받았던 기대치까지 고려해 보면 이정협은 이번 대회에서 이미 충분히 제 몫 이상을 해냈다.

하지만 27년 만에 결승에 올라온 만큼 아시안컵 우승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염치없지만 이정협이 결승전에서 또 한 번 큰 사고를 쳐주길 기대해 본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냥 조별 리그에 했던 것처럼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 모일 8만 관중을 침묵에 빠트리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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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컵 결승 이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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