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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이장님을 뒤로하고 아련한 추억을 찾아 역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죽령역은 나에게 특별한 두 가지 기억을 되살려주는 곳이다. 첫 번째 기억은 나의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죽령역은 깊은 산속의 신비한 역이었다.

'죽령답사기'는 2014,10,30일의 기록이고, 사진은 최근에 촬영한 영상이다.
▲ 죽령역 설경 '죽령답사기'는 2014,10,30일의 기록이고, 사진은 최근에 촬영한 영상이다.
ⓒ 김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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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에 있는 외삼촌 집에 가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가끔 이 중앙선 열차를 타고 가까운 풍기역에서 출발하여 죽령역을 지나곤 했는데, 그때 긴 암흑의 죽령 터널을 빠져나와 처음 맞이하는 죽령역은 풍경부터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청록빛 숲 속의 아늑한 동네, 아담한 역사, 짙은 솔향기가 차창 사이로 스며 들어오는 신비한 산촌 역이었다. 이곳 역 마을 사람들은 그 모습마저도 남달라 보였다. 어린 시절 나는 이러한 별 천지의 신비한 역 마을을 늘 동경해왔다. 나의 그 두 번째 추억은 입영 이틀 전 날의 일이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그날 나는 바로 이 죽령역에서 그녀와 해어졌다.

죽령역 인근 마을이 고향이었던 그녀는, 풍기에서 조그마한 직조 공장을 운영하던 내 친한 선배의 처제였고, 그녀가 한 동안 풍기 형부 집(언니 집)에 머물던 시기에 우리는 만났고, 서로 애틋한 감정을 키워나갔다. 나와 동갑내기였던 그녀는 감성이 풍부하고 마음이 여렸으며, 따뜻하고 사려 깊은 여자였다.

그 날 우리는 눈을 맞으며 하염없이 이곳 철길을 걸었다. 하늘은 하얀 솜사탕을 끊임없이 흩날려주었고, 세상은 온통 하얀 눈꽃으로 덮였다. 나는 순백의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마음으로, 또 가장 설레는 가슴으로 그녀에게 고백했다.

그때 그녀는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다룬 어떤 영화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가슴시리도록 아픈 사랑의 이야기였고, 우린 이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날 그녀가 시사하고 있는 또 다른 의미의 말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희망의 내일을 기약하며 그녀와 작별할 수 있었다.

그때 역 플랫폼에 서 있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밝고 아름다웠다. 이틀 후 나는 군에 입대했고, 그 이후 그녀를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제대 후 그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녀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으며 내가 입대한 1년 여쯤 뒤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새로 단장한 죽령역사의 설경 사진이다. 죽령답사기는 2014,10,30일의 기록이고, 사진은 몇일 전의 영상이다. 그 옛날 추억의 죽령역사는 아니어도 여전히 정겨운 풍경이다. 지금은 무임역이다.
▲ 죽령역 새로 단장한 죽령역사의 설경 사진이다. 죽령답사기는 2014,10,30일의 기록이고, 사진은 몇일 전의 영상이다. 그 옛날 추억의 죽령역사는 아니어도 여전히 정겨운 풍경이다. 지금은 무임역이다.
ⓒ 김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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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군 시절 그녀에게 쓴 나의 편지도 함께 묻어줬다고 했다. 아련한 추억을 좇아 가슴 두근거리며 역 플랫폼으로 달려 들어갔다. 환하게 웃으며 배웅하던 그녀의 모습과 눈을 맞으며 하염없이 철길을 걷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나는 한 동안 우두커니 서서, 아름다운 추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 유난히 눈 많고 아름다웠던 그해 겨울날을 생각한다. 그렇다. 내가 그토록 이곳을 동경한 이유는, 그리운 사람과 그리운 사랑이 이곳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잃어버린 시간과 잃어버린 추억이 이곳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추억을 좇아 기찻길을 걸었다. 솔향기 그윽한 감미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기찻길 옆에는 들국화와 쑥부쟁이 꽃들이 이곳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담아 다소곳이 피어내고 있었고, 단풍잎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홍빛으로 우리의 사랑이야기를 조명해내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쓸쓸한 가을, 들꽃과 단풍잎들의 향연이 이토록 아름답고 애틋할 수 있을까. 나는 한참 동안 추억의 산촌 역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태그:#죽령, #죽령역, #김경진의 죽령답사기, #죽령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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