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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즐거운 출석체크, 한때는 공포의 출석체크

며칠 후 2월 2일이면 교육문화센터가 개강이다. 새해에는 내가 담당하는 문화예술교육반이 전년도보다 두 배로 늘어났다. 그것은 듣지 못하는 내가 소통해야 하는 사람들의 수가 곱절로 늘어난 것을 뜻한다.

나는 아코디언, 합창, 우쿨렐레, 크로마하프, 오카리나, 하모니카 등 음악반의 어르신들에게 출석을 부르기 전에 전년도에 그랬던 것처럼 미리 말을 할 것이다.

"이제 출석을 부를 터인데요. 제가 듣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면서 팔을 올려주세요. 저는 안경을 끼어 눈이 네 개라 팔을 조금만 올려도 눈치코치로 잘 보이니 번거로우셔도 손들어 주세요! 그리고 잘 듣지 못하는 어르신들도 있을 터인데 그럴 때는 옆의 분이 알려서 대신 손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중학교 시절, 갓 들어간 사춘기를 맞은 내가 참 괴로워했던 시간은 음악과 영어 그리고 화학과 수학 시간이었다. 못 들으니 따라 할 수도 없고, 방정식이라든가 화학기호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더 괴로운 공포의 시간은 과목마다 선생이 바뀌어서 시작되는 출석시간이었다.

청각 장애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장애다. 내가 귀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은 모른다. 급우들과도 거의 언어소통이 잘되지 않아 왕따 수준이니 대신 말해줄 사람도 없다.

출석을 부를 때, 대답하지 않은 나는 초록색의 튼튼하고 긴 출석부로 툭하면 머리를 맞았다. 때리는 이유는 건방지다는 거다. 또 숙제가 칠판에 공지되면 해 왔지만, 구두로 전달되면 숙제도 안 해 와서 또 맞는다. 어쩌다가 지각하거나 복도나 운동장에서도 질문에 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무시한다고 맞았다.

"저는 잘 안 들려요. 이름 부를 때 대답할 수 없어요"라고 쪽지에 적어서 선생에게 보여주면 되는데 그걸 할 수가 없었다. 헌 신발, 떨어진 교복, 여드름 하나. 뭐든지 부끄러워 숨고 싶었고 "왜 나만 이럴까?" 가끔은 미치도록 속에서 불이 나던 외로운 사춘기였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날마다 뼈저리게 인식했다.

집에서는 천방지축 명랑한 막내이지만, 학교에서는 말이 없고 조용한 그림자 같은 아이였다. 버스에서 누군가 나를 쳐다보면 보청기를 보는 것만 같아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른 다른 자리로 옮기거나 하차할 장소도 아닌데 내려버릴 정도로 민감했었다. 그 시기에는 치명적인 나의 장애를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게 나의 자존심이었다. 약한 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 드러내 보이면 더 얕잡아 보일까 하는 두려움에 숨고 싶었던 것!

그때 내 자존심은 장애를 인정하지 않는 철없는 자존심. 싹 트지 않고 영글지 않은 키 낮은 어리숙한 자존심이었다.

2년간 줄곧 맞다가 고등학교 진학시험을 앞두고, 더 못 견뎌서 길고 긴 편지를 교장 선생님에게 썼다. 그 편지 내용은 내 장애에 대한 것과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우니 더이상 출석부로 머리를 맞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또, 고등학교 진학에 도움 되게 공부 1등 하는 급우의 노트를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뒤돌아보면 "에이, 그때 왜 좀 더 일찍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몇 년이나 맞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자존심이 키 큰 나무가 되어 날 지켰다

판사는 왜 취하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물질보다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고 소중하고 어린 딸들이 아빠와 사는 데 애들을 두고 싸움하기 싫다고 대답했었다.
 판사는 왜 취하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물질보다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고 소중하고 어린 딸들이 아빠와 사는 데 애들을 두고 싸움하기 싫다고 대답했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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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5년 후 39세 때, 자존심이 성장해서 "참, 그때 잘했었어!"라고 나에게 칭찬해 줄 만한 큰 사건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특이 체질이라 신체적으로 허약했다. 배려를 잘 모르고 시작했던 결혼 생활은 서로 한 방향을 보고 계속 갈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그래서 각자 다른 삶을 선택하고 헤어졌다.

내가 여성인권단체의 대표로 있을 때, 우리나라 장애인의 결혼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여성가족부 지원으로 실태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남자가 장애인이고 여자가 비장애일 때의 결혼생활보다 여자가 장애인이고 남자가 비장애인일 때에 이혼율이 몇 배로 높았다.

남편과 헤어질 때, 나는 아이에 대한 친권도, 위자료도, 살던 집도 그런 것들에 기본지식이 없어 그냥 잠잘 때 필요한 것들과 밥해 먹기 위한 최소의 도구 그리고 좋아하는 책들만 잔뜩 챙겨 나왔다. 사실, 잠잘 집이 없어서 서예실에서 생활했다.

지금은 이혼을 앞둔 여성 장애인들을 위해 여성 장애인 가족상담소가 있지만, 그 시절에는 이 땅에 여성 장애인단체도 상담소도 없었다. 듣지 못하는 나는 어떤 도움을 어디서 받아야 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우연히 내가 살던 곳으로 내려온 친정식구들은 내 처지를 보고 놀라다 못해 경악했다. 어떤 경위로든 그런 큰일을 소리소문없이 합의하고 홀로서기하고 있는 내가 너무 답답하고 딱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 후 친정 식구들은 결혼생활 13년간 살았던 집에 대해 가처분 신청을 하고 위자료 청구소송을 했다. 그리고 나한테 말했다.

"막내야! 넌 가만있어! 엄마와 오빠들이 알아서 네가 살 집이 나오게 해 줄게! 저쪽에서 어떤 연락이 와도 그냥 넌 가만히 있고 재판에 나오라고 해도 나가지 말고 있어! 그러면 저쪽에서 위자료를 줄거야!"

재판 날이 다가오자, 이혼 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시댁 어르신이 내 연구실에 찾아와서 호통을 쳤다. 조용히 갈라서기로 해놓고, 왜 재판을 걸었느냐고 화를 내셨다.

그리고 재판 날, 나는 수화통역사와 함께 출두했다. 수화통역사가 전달해 준 그때 상황에서 판사는 의례적으로 "합의한 것이 맞습니까? 그런데 왜 이제 다시 집을 가처분 잡고 재산분할소송을 했습니까?" 하고 질문했다. 나는 대답했다.

"판사님! 이 소송은 없던 것으로 해주세요!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친정엄마와 오빠들이 절 걱정해서 해주었어요."

판사는 왜 취하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물질보다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고, 소중하고 어린 딸들이 아빠와 사는 데 애들을 두고 싸움하기 싫다고 대답했다.

나는 좋은 집과 큰 돈을 위자료로 받아 당장 따스하게 살아가는 대신, 좀 춥고 많이 외로운 삶이라도 10년 앞을 내다보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재산 싸움으로 관계를 영영 끊어지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수년 후 두 딸은 재혼한 전 남편의 가정에서 힘든 사춘기를 겪으면서 스스로 나에게 왔다. 하나씩 하나씩 날개 죽지 상한 제비 새끼처럼 나의 품안으로 돌아왔다. 나는 맨손으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빛이 잘 들어오는 창이 있고 꽃이 피는 따스하고 조그만 집을 마련해서 두 딸들을 뒷바라지하는 데 온 정성을 다 쏟았다.

나는 닥치는 대로 온갖 일들을 하고, 하루 3시간만 자면서 억척스럽게 가장 노릇을 해내었다. 이제는 대학원도 졸업하고 훨훨 세상 속으로 날아다니는 제비가 된 두 딸은 한때 소원했던 자기 아빠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쓸 수 있는 것을 보니 집안 이야기를 쓰면 민감해하는 두 딸의 자존심도 성장한 것을 내가 내심 믿는 모양이다.

사춘기 때, 장애조차 드러내지 못한 어설프고 연약한 자존심의 소유자였던 내가 인생 최대의 고비에서 꼭 지켜야 할 자존심은 소중하게 지켰다.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날 갑자기 자존심이 키가 큰 나무가 되어 나를 지켜준 것이다.

그 자존심을 지키고 나니 갑자기 생계가 곤란해 기초생활수급자가 잠시나마 되었어도 항상 웃고 지냈다. 방이 없다가도 7평 방이 생기고 나중에는 13평이 생겼다. 수급자에서 벗어나고 그러다가 20평이 약간 넘는 집까지 생겼다.

자주 자존심을 다치기에 더 소중한 동행들

그때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을 손 놓는 대신 정말로 꼭 잡아야 할 두 딸의 손과 마음과 영혼의 끈은 놓지 않았다.

나는 그게 고마워서 여성장애인상담소를 설립하여 한동안 누군가 이혼한다고 하면 달려가서 말리든가 하면 이혼할 때 서로 귀한 자존심을 상처받지 않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지금도 가끔 오지랖 넓은 일을 하다가 외려 당하는 일도 종종 있다.

오늘도 나는 자존심을 지키고 사는 것은 소중하지만, 그것 때문에 인생의 삶의 소풍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등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라고 해도 그로 해서 알게 모르게 자존심이 성장하고, 삶이 덜 외로워지고 소중한 동행들이 주변에 숲처럼 모여 있게 되는 것을 경험했기에.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뒤통수를 맞거나 눈을 뜨고 있는데도 투명인간 같은 취급을 당해 물 한 모금 삼키기 어려울 만큼 자존심이 다치는 때가 있다. 50대 중반의 이 나이에도 항상 일어난다.

몇 달 전에 조직 안에서도... 며칠 전 주말의 서울 나들이에서도.. 나는 자존심이 손상당해 밤잠을 못 잤던 일이 있었다.

그래도 매일 아침이면 자존심은 불사조처럼 내 몸보다 먼저 깨어나서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이니 이왕 살아 있는 한 자신감 있게 세상 속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라고 한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살아내기가 참 힘겨운 특이 체질인 몸과 갈수록 나빠지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소중하고 그 사람들의 마음과 내 마음이 소통하는 것이 무척 고맙고 기쁘다. 항상 내일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하고, 작품을 만들고 오늘 만난 사람들과 정답게 지낸다.

덧붙이는 글 | 자존심공모이야기 -



태그:#청각장애인식개선, #서예가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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