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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에 새로 이사한 애들 집 근처에는 도서관이 두 개씩이나 있다. 집 근처에 도서관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있다니, 새로 얻은 집이 언덕길을 걸어 한참 올라가야 하는데도 좋기만 했다. 

이사를 하자 딸애는 "어머니, 서울 올라오시면 도서관에 가보세요. 커서 책들이 많을 거예요." 하였다. 딸애 말이 아니라도 가볼 생각이었다. 애들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다는 게 너무도 좋아서 자주 서울 나들이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도서관에서 만난 '심행일기'

지난해 12월 중순에 서울에 올라갔다가 도서관에 가보았다. 밖에서 보기에는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았는데 안에 들어가니 규모가 대단했다. 서가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었고 꽂혀있는 책들 또한 한정 없이 많았다. 나는 마치 신천지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무당'이 있었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
 '연무당'이 있었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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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를 주제어로 넣어서 검색을 해보았다. 연관된 책들이 화면에 떴다. 그중 내 관심을 끈 것은 '심행일기'였다.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접견대관이었던 신헌이 쓴 일기였다. 나는 책을 찾아서 죽 훑었다. 그리고 당장 인터넷으로 주문하였다.

심행일기에는 1876년 정월 한 달 동안의 나날이 기록되어 있다. 보통의 일기처럼 날씨로 시작해서 글쓴이의 건강 상태와 일상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역사의 한 장면들이 빠짐없이 일기에 들어있다. 강화도조약을 맺기까지의 과정들이 일기에 낱낱이 다 들어있으니, 개인의 일기라기보다는 마치 정부의 공식 기록물과도 같아 보였다.  

1875년 9월 20일에 초지진에서 있었던 일본 군함 운요호와의 포격사건은 이듬해인 1876년의 강화도조약으로 이어진다. 우리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강화도에서 일어났다.

초지진에서 시작된 강화도조약의 역사는 연무당에서 완성된다. 강화도조약을 맺은 장소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연무당(鍊武堂)은 병사들이 훈련하던 진무영이 좁아서 고종 7년(1870)에 새로 세운 건물로 지금은 빈 터만 남아 있다.

십여 년 전 강화로 이사를 왔을 때 우리는 강화읍의 서문 근처에 집을 얻었다. 서문 맞은편에 연무당이 있었다. 날마다 읍내를 오가며 연무당 옛 터를 봤다. 참 이상했다. 강화도조약을 맺은 곳이 뭐 그렇게 자랑할 곳이라고 저렇게 돌로 기념비를 세우고 단장을 해놓았을까. 아픈 역사의 현장을 가꾸어 놓은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픈 역사의 현장, 연무당 옛 터

 연무당 건너편에 강화산성의 서문인 첨화루가 있다.
 연무당 건너편에 강화산성의 서문인 첨화루가 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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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연무당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그 앞을 지나갈 일이 있어도 대충 그러려니 하며 지나쳤을 뿐 남다르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강화도조약에 대한 책을 읽다보니 궁금해졌다. 그래서 일부러 찾아가서 살펴보았다. '관심을 두면 보인다'고 하더니 과연 마음을 기울여서 살펴보니 연무당 옛 터가 새롭게 다가왔다. 

연무당 옛 터에 몇 번이나 가보았다. 볼 것도 별로 없는데 뭘 그리 가느냐고 누가 말했다.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면서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볼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빈 터만 남아있는 연무당 옛 터에서 140년 전의 강화도를 그려보았다.

1876년 2월 5일이었다. 갑곶진을 통해 일본군이 강화부로 들어왔다. 스무 예닐곱 명 남짓했으니 그리 많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차림새가 요상했다. 그들은 서양 옷을 입고 총을 메고 또 칼을 차고 있었다. 그 전해(1875년)에 있었던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러 온 일본 대표단이었다.

그들을 응대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냈다. 그가 바로 판중추부사였던 신헌이었다. 그는 일본 대표단과의 회담을 위한 접견대관으로 추대되어 강화로 왔다. 용산도서관에서 만났던 '심행일기'는 바로 신헌이 썼던 일기였다. 

'심행일기(沁行日記)'의 심(沁)은 예로부터 강화도를 이르는 별칭이었으니 심행일기는 '강화 행차의 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일기는 그가 강화로 떠나기 하루 전인 병자년 정월 오일부터 시작된다. 그는 이 일기에서 접견단의 행적, 일본 측과의 협상 기록 및 접수한 공문과 보고문, 상소문, 조약 초안 등의 관련자료 일체를 다 수록했다. 따라서 '심행일기'야말로 조선의 관점에서 강화도 조약의 체결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사료라고 말할 수 있다. 

 '심행일기'
 '심행일기'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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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 '심행일기'는 부피가 제법 두툼했다. 상권과 하권, 그리고 한자로 쓰여 있는 원문까지 다 합해서 부록으로 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또 수행원이었던 강위가 쓴 '심행잡기'까지 수록했다. 그러니 강화도조약에 관해서 이만큼 자세히 알려주는 책도 없을 것이다.

심행일기에는 참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일본과 밀고 당기며 첨예하게 대립했던 비준 양식에 대한 부분이었다. 조선은 일본이 제시한 12개의 조문에 숨어있는 뜻을 파악하기보다는 수호조규를 비준할 때 어명이 있는 어보(御名之御寶)를 찍는 문제에 대해서만 골몰했다. 즉 조약문에 임금의 이름을 넣느냐가 큰 논란거리였다. 일본측은 조약문에 고종의 어보(御寶 임금의 도장)를 찍고 이름도 써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선측은 어보만 찍을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 문제로 끝없이 언쟁을 하였다.

심행일기 속의 강화도조약

일본 측은 조약 비준에 있어서 반드시 어명이 들어간 어보가 있어야 진정한 수호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국제법상 조약 당사자 간의 친필 사인이 필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조선의 입장은 달랐다. '어명어보(御名御寶)는 막중막엄(莫重莫嚴)해서 신자(臣子)가 감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것인데 하물며 어찌 감히 문서에 쓸 수 있겠는가.' 하면서 다른 것은 양보해도 그 문제에서만은 결단코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문제를 두고 끝없이 언쟁하다가 첫 닭이 울 때 일본 측이 돌아갔던 적도 있다고 한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국가 간의 조약에 대통령이나 총리의 서명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지만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이란 곧 하늘과도 같은 존재인데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왕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또 왕의 이름이 새겨진 옥새를 찍으라고 왕에게 청할 수는 더더군다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 측에서는 극력 반대하며 고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임금의 이름을 쓰는 게 뭐가 문제가 된다고 그렇게 신경전을 펼쳤을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안건들도 많았을 텐데 왕의 체통을 지키는 일에만 온통 매달려서 옥신각신했다. 그러나 왕이 곧 나라였던 당시에는 왕의 수모는 곧 나라의 수모이기도 했으니 어떡하든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래서 조선측은 다른 쪽을 양보하면서까지 그 문제만은 지키려고 애를 썼다.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조선의 접견대관이었던 신헌(申櫶)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조선의 접견대관이었던 신헌(申櫶)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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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제로 회담이 성사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본 대표단은 철수하겠다며 엄포를 놓기도 한다. 그들을 구슬려서 다시 회담장으로 데려왔지만 조선측은 시간에 쫓겨 다른 부분들은 잘 살피지를 못했다. 어명(御名)은 지켰지만 다른 부분은 일본이 의도한대로 되고 말았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계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은 새로운 외교관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더구나 임금의 이름을 뺀 어보만 찍을 것을 주장하다가 보니 여러 가지를 일본측에 양보하고 말았다. 그래서 일본이 제시한 12개의 조약안들은 대부분 그대로 통과되고 만다.

조일수호조규의 제7조는 '일본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일본의 군사 침략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었는데도 미처 살피지 못했다. 또 제9조의 '양국 인민이 무역을 하는 데 있어 양국의 관리는 조금도 관여하지 못하며 제한·금지하지 못한다'와 제10조의 '일본인이 조선의 개항장에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일본 관헌이, 조선인이 죄를 범한 것은 조선 관원이 심판한다' 부분의 해악 역시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임금님의 이름을 어찌 감히...

무역을 함에 있어서는 관세를 물리거나 제재를 가하는 부분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상인이 교역을 하는 데 있어 조선은 아무런 관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을 제한하거나 무역을 금지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로써 조선은 경제적으로 일본에게 먹히는 운명이 되고 만다. 또 개항장에서의 치외법권을 인정해주게 되었으니, 일본인은 마치 자기 땅인 양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140년 전의 조선은 일본과 교역할 수 있는 게 농산물 밖에 없었다. 공산품은 전무한 형편에 일종의 자유무역인 무관세를 했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조선의 시장은 곧 일본 제품들이 판을 치는 독무대가 되고 말았고 끝내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모습.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모습.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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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조약에 대해 알아보다보니 자유무역협정 즉 FTA가 떠올랐다. 자유무역 협정(FTA)이란 상대국과 교역을 할 때 관세를 붙이지 않는 등의 혜택을 주어 비교적 자유롭게 무역을 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일본과 맺은 조일수호조규는 우리나라가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기도 하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자유무역협정이기도 했던 셈이다.

연무당을 꾸민 까닭은...

볼 것도 별로 없는데 뭐하러 연무당 옛 터를 가느냐고 지인은 말했다. 그러나 그곳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들려준다. 준비되지 않은 결과가 어떠한지를 말없이 웅변한다.

"우리는 지나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역사는 간단없이 흘러가되 교훈은 남는 것이니 이곳 연무당은 그 역사의 교훈을 듣는 데다. 이 연무당 터야말로 민족의 역사적 시련장이며 자주적 역량만이 사는 길임을 보여주는 곳이므로 이곳을 길이 보존하도록 하라."

1976년도 봄에 강화도를 방문하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장소인 연무당에 들렀다. 망국의 전초가 되었던 곳에서 대통령은 만감이 교차한 듯하다. 다시는 그런 수모를 겪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은 비장한 마음으로 지시를 한다. 쓰라린 역사를 기억해서 두 번 다시 그런 아픔은 겪지 말자고 한다.

 연무당 옛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의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연무당 옛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의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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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제 힘을 키우고 기른 다음에라야 어떤 고난이든지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뜻을 돌에 새겨 자손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 연무당 옛 터에 기념비를 세운다."

기념비는 이런 글귀로 끝을 맺으며 140년 전의 그날을 되새기도록 해준다.

체면이 밥 먹여주느냐는 말도 있다. 실속 없는 체면보다는 실리를 따지라는 말일 것이다. 과거 조선은 실리보다는 체면을 더 중시했던 점도 있었다. 그래서 큰 것을 놓치는 우를 범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떠할까. 여전히 우리는 체면 차리다가 실속을 놓치는 경우는 없을까.

140년 전의 그때를 생각해본다. 밀고 당기며 회담을 했던 진위영의 열무당도 그리고 조약을 체결했던 장소인 연무당도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1876년 정월 한 달 내내 열렸던 회담을 끝으로 마침내 2월 26일(양력)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참으로 숨차게 달려왔던 1860년대와 1870년대였다. 그 한가운데에 강화도가 있었다. 강화도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의 역사였다. 강화도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보는 관점에 따라 참담한 실패의 역사일 수도 있고 또 승리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승리의 기쁨을 자양분으로 삼으면서 또 한 편으로는 실패를 딛고 일어섰던 우리 역사였다.

사방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벌써 봄기운이 난다. 씨앗을 품은 땅은 몸을 부풀리고 있다. 뼈아픈 역사가 스며있는 연무당 옛 터에도 얼마 안 있어 봄바람이 불 것이다. 진눈깨비가 흩뿌리는 그곳에서 나는 봄기운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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