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오프닝 장면 주인공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 분)이 적군을 저격하고 있다

▲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오프닝 장면 주인공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 분)이 적군을 저격하고 있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라고. 요컨대, 인간의 삶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끊임없는 선택(Choice)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생을 알파벳(Alphabet) 세 글자로 간단히 정리해버리니 억울하다 싶은 사람도 더러 있을 테다. 그래도 이내 수긍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은 선택에 의해 흘러간다. 우리는 순간의 선택으로 영원을 사는 존재다.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의 주인공 크리스 카일(Chris Kyle). 그 역시도 그러한 존재였다.

영화는 선택에 기로에 선 그의 모습과 함께 시작된다. 전장에 나타난 여자와 어린아이. 주인공 카일의 손가락은 방아쇠에 걸려있다. 여자는 품에서 무기를 꺼내 들고 아이에게 넘겨준다. 무기를 받아 든 아이는 미군에게로 돌진한다. 모든 판단이 카일에게 맡겨진 순간, 영화는 이 딜레마를 뒤로하고 카일의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범한 소년이었던 그는 엄격한 부친의 교육과 함께 패기 넘치는 젊은이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일은 텔레비전을 통해 적과 싸우는 미군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가족과 국가의 적은 반드시 응징한다'는 부친의 가르침이 그의 가슴을 울린다. 결국, 그는 서른이라는 늦은 나이에 미군 엘리트 특수부대인 네이비실(Navy SEAL)에 입대한다. 혹독한 훈련 끝에 저격수가 된 그는 이라크전에 파병된다. 그리고 그는 여자와 어린아이를 저격한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같은 오프닝을 통해, '평범한 소년은 어떻게 미국의 전설적인 스나이퍼가 되었는가'를 노련하게 그려낸다. 모두가 숨죽이며 카일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을 그 순간,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엉뚱하게도 그의 유년시절을 엿보게 한다. 그리하여 카일의 선택이 그에게 있어서는 최선이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평범한 소년은 어떻게 전설의 스나이퍼가 되었는가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한 장면 저격수로서의 딜레마에 빠진 크리스 카일 (브래들리 쿠퍼 분)

▲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한 장면 저격수로서의 딜레마에 빠진 크리스 카일 (브래들리 쿠퍼 분)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이를 시작으로 카일은 적을 소탕해 나간다. 그는 레전드(Legend)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전장에서 승승장구한다. 그야말로 미국의 영웅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영웅적인 면모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누군가의 남편으로, 또 누군가의 아버지로 평범하게 살고 있었을 한 인간의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 카일은 지켜야할 가족도, 친구도 있기에 고뇌한다. 하지만 결국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두고 전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 그의 모습에는 여러 시선이 따라 붙는다. 가족과 국가를 위해 싸우는 카일이지만, 적군에게는 악마요, 동료에게는 명성과 영광을 좇는 속물이나 전쟁광으로 비치기도 한다. 이처럼 감독은 카일을 향한 다양한 시선을 영화 곳곳에 배치해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대표적인 공화당 인사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력 때문에 미군을 미화하는 영화라는 비판도 있지만, <아메리칸 스나이퍼> 곳곳에는 균형을 위한 장치가 남겨져 있다.

영화는 미군을 절대 선으로 그리지도 않으며, 적군을 절대 악으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 적군의 스나이퍼 무스타파는 관객들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카일에게 대적할 만한 적군의 저격수로, 표면적으로는 카일과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스타파와 카일은 아주 닮아있다. 감독은 카일처럼 무스타파에게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에게도 전쟁에 참여한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음을 알린다. 동료를 저격한 무스타파를 증오하는 카일의 모습은, 뒤집어보면 적군의 누군가에게는 카일이 그러한 존재일 것임을 암시한다. 마치 거울에 서로를 반사한 것처럼 닮은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감독은 아군에게는 영웅이자 적군에게는 악마였을 두 인물을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영화 후반부에서 카일은 마침내 무스타파를 저격하는 데 성공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전장에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에 시달리던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증후군을 극복하려 한다. 그리고 같은 증후군에 시달리는 군인들을 돕기로 한다. 하지만 전장에서 돌아온 후에도 함께했던 동료를 돕던 그는, 그들 중 한 명에게 무참히 살해당한다. 이 아이러니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공허함은 관객들에게 여실히 전달된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실존 인물 크리스 카일(Chris Kyle)과 동명의 원작 소설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으레 가질 수 있는 단점들이 여럿 있지만, 할리우드 대표 노장의 노련함과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는 이를 능숙히 극복해 내며, 제 87회 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한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돋보였던 것은 음향효과였다. 브래들리 쿠퍼(크리스 카일 역)의 거친 숨소리와 조준경의 조작음은 절제된 음향효과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특별한 BGM과 OST 없이, 등장인물과 사물이 내는 소리를 충실히 살리는 것만으로도 전장의 긴박감과 긴장감은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와 더불어 실제 전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화면 구성과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들며, 전쟁 영화가 줄 수 있는 묘미를 제대로 살려낸다. 하지만 액션의 화려함이나 웅장함만을 쫓아 영웅 만들기에 급급한 여타의 할리우드 산 전쟁 영화와는 다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전쟁 그 이면의 참혹함과 전쟁 영웅의 양면성에 더욱 주목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한 작품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생은 BCD"라고. 결국 모든 것은 크리스 카일, 그의 선택이었다. 애국주의자가 되기로 한 것도, 가족을 두고 전장으로 향한 것도, 끝까지 군인을 돕다 결국에는 살해당한 것도 모두 그의 선택으로부터 기인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이름 앞에 붙을 수식어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전설적인 우상(Beloved icon)이 될 것인지, 혹은 수백 명을 사살한 악마(Devil)로 남을 것인지. 선택의 연속으로 완성된 크리스 카일, 그의 인생. 그 종착점에 다시 한 번 선택지가 놓였다. B와(Beloved icon)와 D(Devil) 사이의 C(Chris Kyle). 영화를 통해 당신이 만난 그는 그 사이 어디쯤 놓여있었을까.

아메리칸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 클린트 이스트우드 제 87회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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