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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은 우물고을, 그래서 우물이 더 반갑다. 120년 전 동학농민군은 이 물로 타는 목을 축이고 밥을 지어 주림 배를 채웠다
▲ 하학리 가정마을우물 정읍은 우물고을, 그래서 우물이 더 반갑다. 120년 전 동학농민군은 이 물로 타는 목을 축이고 밥을 지어 주림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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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이 정읍은 세 가지가 뜨겁다 했다. "갑오년 백성들의 가슴에 지피던 혁명의 불길이 뜨겁고, 가을날 내장산의 활활 타는 단풍이 뜨겁고, 천년을 기다려온 정읍사 여인의 사랑이 뜨겁다"고 했다. 뜨거운 고을, 정읍으로 가고 있다.

백제 때 정촌(井村), 통일신라 때는 정읍(井邑)으로 불리었다. 백제나 신라 때 모두 '정(井)'자를 버리지 않았다. 왜일까?  땅을 한 자만 파도 우물물이 날 만큼 물이 넉넉했기 때문이란다. 이를 뒷받침하듯, 백제 정촌현에 정해(井海)마을이 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은 '샘바다' 또는 '새암바다'라 하여 샘이 바다를 이루는 마을이라 했다. 큰 우물로 이름난 정해마을은 정읍의 유래가 되었다.

백제 때는 고갯마루에 앉아 장삿길에 나선 남편을 기다리며 <정읍사>를 노래한 '백제여인'의 고장이요, 통일신라 때는 최치원이 피향정에서 노닐다 풍월을 읊던 고을이고 조선 중기 때는 이순신이 정읍현감으로 부임해 오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조선 후기 서예가 이삼만은 초서로 정읍을 빛냈고 조선말,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꿈꿨던 전봉준은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 평등한 새 세상을 외쳤고 오늘날, 정읍여중 출신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로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아무도 '호남벌 말달리던 녹두장군', 전봉준을 정읍 제일의 인물로 내세우는 데 토 달지 않는다. 

뜨거운 고을 정읍, 상학마을 가는 길

상학마을은 두승산이 힘 빠져 자리내준 비탈에 들어섰다. 상학은 돌담마을, 두승산이 흘리고 굴린 돌로 쌓았다
▲ 상학마을 정경 상학마을은 두승산이 힘 빠져 자리내준 비탈에 들어섰다. 상학은 돌담마을, 두승산이 흘리고 굴린 돌로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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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고 있는 상학마을도 '전봉준의 그림자'를 밟지 않으면 가지 못한다. 상학은 동학농민군이 대승한 황토재 너머에 있다. 누군가 말했다. 황토재를 가면 마음이 무겁고 슬프고 비장해진다고. 마음이 무겁고 슬픈 것은 혁명이 미완으로 끝났기 때문이요, 비장해지는 것은 혁명의 기치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마음 때문일 게다.

동학혁명기념관의 네온사인 환영 문구가 생뚱맞게 보여 한순간 마음이 썰렁해진다. 드넓은 곳, 황토는 보이지 않았다. 황토밭을 만들고 거기에 동학농민군이 한 것처럼 흰 옷 입고 죽창 든 허수아비라도 세워놓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썰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트막한 황토고개를 넘어오면 하학리 가정(佳井)마을. 철기시대 우물유적이 남아 있고 대대로 물이 좋아 가정마을이다. 1864년에 만들어진 우물이 마을 한가운데 차지하고 있는데 정읍의 뿌리를 찾은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의미 또한 심장하여 동학농민군이 이 우물로 목을 축이고 밥 지어 주린 배를 채웠다 하여 '동학혁명군우물'이라 불린다.

하학리에서 상학리로 가는 길에 중하마을이 있다. 마을 앞 논에 철탑확성기가 있는데 그 모습이 정겹다. 새참 먹으라고 알리는 것은 아닐 테고 산으로 갈린 두 동네끼리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 같다
▲ 상학마을 가는 길 하학리에서 상학리로 가는 길에 중하마을이 있다. 마을 앞 논에 철탑확성기가 있는데 그 모습이 정겹다. 새참 먹으라고 알리는 것은 아닐 테고 산으로 갈린 두 동네끼리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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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고부의 진산, 두승산은 윤곽만 드러내고 하학리 논은 벌판을 내달리다 두승산 새끼봉우리에 막혀 주저앉았다. 중하마을 철탑확성기에서는 걸걸한 이장목소리가 들릴 듯한데, 목소리가 들리나 안 들리나 귀 기울이다 도착한 곳이 상학마을이다.

상학마을 뒷산은 두승산(斗升山). 부안의 봉래산, 고창의 방장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으로 불린다. 말두(斗)와 되승(升), 이름이 유별난데 그 유래가 재미나다. 고부관아에서 양(量)을 재는 기준이 모호하여 표준이 될 말과 되를 두승산 말봉 바위에 새겨 놓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말과 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나타낸다 들었다. 지금껏 보아온 말과 되지만, 말은 둥글고 되는 네모난 이치가 이와 관련돼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상학마을은 강담마을

두승산 동북 경사면 타고 들어선 상학마을, 마을 앞 전망이 좋다. 논도 있고 거쳐 온 하학리, 황토재도 부옇게 보인다. 강담마을이라 강담도 빠지지 않고 한몫 거들고 있다
▲ 상학마을에서 내려다본 정경 두승산 동북 경사면 타고 들어선 상학마을, 마을 앞 전망이 좋다. 논도 있고 거쳐 온 하학리, 황토재도 부옇게 보인다. 강담마을이라 강담도 빠지지 않고 한몫 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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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승산 동북 경사면 타고 들어선 상학마을, 마을 앞 전망이 좋다. 마을 앞에 비교적 너른 논이 펼쳐있고 마을동쪽, 학이 노니는 학밭, 학전마을이 있다. 완만한 비탈 따라 마을 끝까지 가면 두승산 자락에서 미끄러지듯 불어오는 산바람에 허리춤 감춘 돌담 안 대숲이 스산하다.

지난해 떨어진 죽엽 위를 뱀이 스삭스삭 지나가는 소리 때문인가 봤더니 댓잎 몸 부딪히는 소리가 범인. 그러거나 말거나 홀로된 동네 할머니는 대밭 옆에서 고춧대로 오늘 땔감 한다며 손이 분주하다. 메주콩 삶는 아랫집 굴뚝에서는 하연 연기 솟아오르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조근조근 오가는 소리와 구수한 콩내가 연기에 맺혔다.

허리춤까지 오는 돌담 안 대숲이 댓잎 몸 부딪히는 소리로 스산하다
▲ 돌담 안 대숲 허리춤까지 오는 돌담 안 대숲이 댓잎 몸 부딪히는 소리로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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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이나 찬 없이 맨밥으로 먹는 밥을 강밥이라 하고 안주 없이 먹는 술을 강술(깡술)이라 한다. 이처럼 아무것도 섞지 않고 돌만 갖고 쌓은 담을 강담이라 한다. 이 마을 담은 온통 돌담, 강담이다. 안도현 시인의 말대로 '갑오년 백성들의 가슴에 지피던 혁명의 불길'은 뜨거워도 그들의 주린 배는 차가운 강밥 같아서, 정읍에서는 돌담 대신 강담으로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린다.

건성건성 얼기설기 막 쌓은 강담과 나이 들어 잇새 벌어진 이처럼 성글고 비뚤비뚤한 축담은 어딘지 모르게 잘 어울린다
▲ 상학마을 강담과 축담 건성건성 얼기설기 막 쌓은 강담과 나이 들어 잇새 벌어진 이처럼 성글고 비뚤비뚤한 축담은 어딘지 모르게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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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외곽담은 새로 쌓았는지, 햇볕을 잘 받아서 그런지 '새악시' 볼마냥 뽀얗다. 색시 맨얼굴 같아서 강담 중에 '쌀강담', '색시강담'이다. 색시강담 손짓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습기 먹은 돌담은 이끼가 파릇하고 잎 떨군 담쟁이는 사내 홀리는 계집처럼 마른 줄기로 강담을 희롱한다. 이 돌담에 굳이 이름 붙이자면 맨얼굴에 엷은 검버섯이 핀 '보리강담', '서방강담'이다.

키 크고 옹색한 강담 길, 지게라도 지면 게걸음으로 비켜서야할 정도로 좁다랗다
▲ 상학마을 강담길 키 크고 옹색한 강담 길, 지게라도 지면 게걸음으로 비켜서야할 정도로 좁다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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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담 쌓은 방법도 가지가지, 어머니가 국 간볼 때 주둥아리 깨진 간장그릇 통째 휘휘 돌리며 대충 간하듯 건성건성, 얼기설기 쌓은 강담이 있다. 입에는 담배 물고 한 손에 돌 잡아 이리저리 돌려보며 나무망치로 톡톡 치어 자리 찾아 끼워 맞춰 촘촘히 쌓은 강담도 있고, 떡시루에 쌀가루와 고물을 층층이 쌓듯 네모난 돌을 차곡차곡 쌓은 강담도 있다.
  
 일부러 자른 것도 아닌데 두부처럼 네모난 돌로 반듯하게 쌓았다.
▲ 상학마을 강담 일부러 자른 것도 아닌데 두부처럼 네모난 돌로 반듯하게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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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과 헛간채까지 돌담으로 쌓여있는 돌마을, 지게라도 지고 있으면 옆으로 게걸음해야 하는 좁다란 돌담길과 어우러져 돌담 동화나라 같다. 어린애들 바글대는 예전 같으면 숨바꼭질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상학리에서 제일 큰 아랫마을 학전에도 초등학교 학생이 몇 명밖에 없다고 들었다. 동화나라 같은 이 마을은 애들 소리 없는 마을, 성인을 위한 동화마을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 그런지 모르겠다.

잎 떨군 담쟁이 마른줄기가 목 조르고 있는 헛간과 얼굴까지 장옷 뒤집어 쓴 색시 같은 뽀얀 축담, 맞은 편 검버섯 핀 험상궂은 남정네 같은 강담은 여러 색  골목 안 정경을 만들어 낸다
▲ 상학마을 골목 정경 잎 떨군 담쟁이 마른줄기가 목 조르고 있는 헛간과 얼굴까지 장옷 뒤집어 쓴 색시 같은 뽀얀 축담, 맞은 편 검버섯 핀 험상궂은 남정네 같은 강담은 여러 색 골목 안 정경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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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돌아 나오는 길에 다시 황토밭이 눈에 밟힌다. '녹두장군 말달리던 호남벌에서 황톳길 달리며 (우리) 자랐다'며 <호남농민가> 첫 소절을 들먹이던 정읍친구는 "우리 동네는 말여, 우리 녹두장군 형님이 말달리던 곳이여"라며 친근감을 과시하곤 했다.

전봉준 장군을 형님으로 부르는 사이, 정읍 친구 정도 돼야 무겁고 슬프고 비장한 마음을 떨칠 수 있을지 모른다. 마음이 무거워지고 슬퍼지고 비장해지는 마음은 남에게 생기는 감정이다. 녹두장군을 형님으로 모시는 정읍 출신 친구의 말이 귓가에 맴도는데 나도 '슬프고 무겁고 비장한 마음'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속으로 불러보았다.

녹두장군 형님! 입이 굼뜨는 것이 아직 아니다. 이는 개인보다는 사회적 문제, '동학란'이 '동학혁명'보다 더 익숙하게 들리는 현상이 지배하는 한, 자연스럽게 녹두장군 형님이라 부르게 되는 날은 오지 않을지 모른다. 녹두장군 형님이 입에 익을 때, 동학혁명 글도 써보려 한다.

내려오는 길에 황토밭이 눈에 밟힌다. 황토를 편안하게 보는 것은 나에게 아직 이른가 보다
▲ 황토밭과 상학마을 내려오는 길에 황토밭이 눈에 밟힌다. 황토를 편안하게 보는 것은 나에게 아직 이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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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상학마을, #돌담, #강담, #가정마을우물, #정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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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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