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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영화 책 표지
ⓒ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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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영화>는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저자는 스스로 잡문의 엮음이라 칭했지만 어떤 작품을 접한 이후의 단상이나 단순한 리뷰 역시도 비평의 영역에 속하기에 평론집이라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책은 1,2부로 나뉘어 있으며 1부는 '영화의 윤리, 죽음의 시학'이라는 이름으로 '문예중앙'에 연재한 여섯 편의 글을, 2부는 <씨네21>에 발표한 열 편의 영화비평을 묶었다.

1부에서는 아덴만 여명작전과 오사마 빈 라덴 사살로 시작해 무한도전을 거쳐 트뤼포와 라스 폰 트리에, 오즈 야스지로와 홍상수 영화에 이르는 폭넓은 논의가 진행된다. 저자는 우선 아덴만 여명작전과 오사마 빈 라덴 사살로부터 폭력적 이미지가 국가에 의해 과시되고 죽음이 영화와 같이 소비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틀에 갇혀 전해지는 죽음과 폭력은 실제 죽음이나 폭력과는 다른 것인데 전해지는 과정에서 실재는 감춰지고 상징화된 것들만 전해질 뿐이라는 것이다.

이후 그는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숭고한 저속함의 비예술'이라 평가하고 그로부터 한국 영화가 창의성과 활력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프랑소와 트뤼포와 라스 폰 트리에 등의 영화를 끌어들여 죽음과 기억에 대해 사유하고자 한다. 1부에 실린 글들엔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책머리에 저자가 밝힌 바대로 '영화와 현실세계 사이의 모호한 경계지대에서 양 쪽을 두리번 거리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홍상수론의 서론?

이에 대해 이 책의 펴낸이이며 저자의 지인이기도 한 문학평론가 정홍수 씨는 이 책이 아직 쓰이지 않은 홍상수론의 서론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나로선 전혀 공감할 수 없는 평가이지만 이 지점에서 1부의 희미한 주제가 드러난다.

저자는 홍상수 영화에는 양식이 없고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기도 어렵다는 점으로부터 홍상수 영화란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무모한 모험이라 단언한다. 때문에 홍상수 영화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윤곽과 어렴풋한 방향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나온 홍상수 비평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뜻과 다르지 않은데 이를 가리켜 '아직 쓰여지지 않은 홍상수론의 서론'으로 평가하는 건 지나치다고 할 밖에 도리가 없다. 본론을 전제하지 않은 서론이 과연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저자는 정해진 양식이 뚜렷하지 않은 홍상수 영화로부터 무한도전의 창의성과 모험심을 읽고 나아가 그의 영화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이면에서 환기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죽음과 폭력을 전면에서 다루는 아덴만 여명작전과 오사마 빈 라덴 사살작전의 사례로 시작해 정해진 포맷이 없는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비평을 거친 것일 테다. 하지만 그의 비평은 여러모로 과하게 느껴진다. 홍상수 영화의 테마가 부재를 환기시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모험이라 주장하기 위해서는 보다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홍상수 영화에서 패턴을 읽어내는 것이 그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길이라며 양식 없음을 홍상수 영화의 특징으로 들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홍상수론이라 할 만한 이론의 가장 미약한 근거조차 마련할 수 없는 것이다.

양식이 없다는 게 양식이 될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식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하려면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필수적이다. 홍상수의 형식의 모험으로부터 관객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홍상수론이 쓰여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노력하다

2부에는 <레미제라블>, <라이프 오브 파이>, <링컨>, <홀리 모터스>, <그래비티>, <사이비>, <변호인> 등 11편의 영화를 다룬 10편의 평론이 담겨 있다. 그는 실화영화들의 이야기방식, 캐릭터와 배경이 서사를 대체하는 경우, 영화에 감춰진 색다른 해석 등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의식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감춰지고 점점 희미해져가는 가치를 탐색하고 발견해 영화에 새로운 의미부여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1, 2부를 통틀어 책에 실린 어떤 글에도 온전히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자의 글이 활보하는 다양한 논의의 지점을 뒤따르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은 풍부한 사고의 꺼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책은 적어도 홍상수의 영화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환기시키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탐색을 진행하고 있는 열성적인 비평서다. 더불어 최근 몇년 간 개봉한 11편의 영화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쏟아붓고 있기도 하다. 나는 이와 같은 비평서를 그리 많이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세상을 보듯 영화를 보고, 영화를 보듯 세상을 본다. 달리 말하면, 영화는 보이는 세상이고,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영화다. 양자의 경계는 유동적이고 불투명하며, 이 글들은 그 모호한 경계지대에서 양쪽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어쩌면 세상을 보면서도) 왜 우리는 눈앞에 현전한 것을 종종 보지 못하며, 거기 없는 것을 종종 보았다고 느끼는가. 물론 이것을 간단히 실재계와 상징계라는 용어를 빌려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 안에서라면 사정은 좀더 복잡하다.

어떤 영화에서 우리가 보고도 보지 못한 것에는 영원의 침묵 혹은 실재의 반짝임뿐만 아니라, 위대한 결단, 가혹한 비난, 절박한 전언이 담기기도 한다. 우리가 보지 않고도 보았다고 느끼는 것들에는 종종 자기기만이 작동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반대로 창작자도 의도하지 않은 대화의 절정이 배태될 수도 있다.

영화는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본다는 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고 또 보아야 한다. 반복해서 본다 해도 전보다 조금 더 볼 뿐 '본다'는 것을 완수할 수는 없다.

완수의 만족감을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영화들이 대다수라 하더라도, 영화의 힘은 보는 것과 읽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완결되지 않는 긴장에 있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 생각으로 이 글들을 쓰려 했다. (책머리에)

덧붙이는 글 | <보이지 않는 영화>(허문영 지음 / 강 펴냄 / 2014.12. / 1만 6000원)



보이지 않는 영화

허문영 지음, 강(2014)


태그:#보이지 않는 영화, #허문영,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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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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