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치아 비치아의 동생이자 자유노동조합위원장을 맡고 있는 치아 모니(가운데)
 치아 비치아의 동생이자 자유노동조합위원장을 맡고 있는 치아 모니(가운데)
ⓒ 이주영

관련사진보기


지난 1월 22일, 치아 비치아를 추모하는 사람이 다시 모였다. 그의 사망 후 11번째 행사였다.

공장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들도 이날 추모제를 찾아 앞 다투어 헌화하고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전자기기생산업체에서 근무하는 쑤싸(30·Sour Sea)는 동료들과 함께 추모제를 찾았다.

쑤싸씨는 "치아 비치아는 우리들의 임금을 올릴 수 있도록 가장 선두에서 이끌었던 분이며 나는 그것을 기억합니다"라며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만약 치아 비치아가 살아 있었다면 캄보디아 노동자의 권익은 더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고 권위는 더 높아졌을 것"이라며 "치아가 살해됨으로써 그의 활동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느낀다"라고 전했다.

프놈펜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지 3년이 된 쑤싸씨는 프놈펜으로 올라오기 전인 2005년부터 매년 치아 비치아 추모제에 참석하고 있다고 했다. 근무 시간과 월급 수준을 묻자 그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7시에서 오후 4시까지 점심시간 1시간을 빼고 일하면서 매월 128달러(한화 약 13만 원)를 급여로 받는다. 그에 따르면, 월급이 치솟는 물가를 충당하기에 어렵기 때문에 임금인상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월세와 오토바이 주유비, 심지어 농산물 값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란 얘기다.

야당 지도자부터 언론인까지... 그의 동상에 헌화

치아 비치아를 죽인 진범을 찾아야 한다고 서명하는 캄보디아 사람들
 치아 비치아를 죽인 진범을 찾아야 한다고 서명하는 캄보디아 사람들
ⓒ 이주영

관련사진보기


이날 추모제는 치아 비치아가 살해된 신문가판대에서 멀지 않은 왓 랑카(랑카 사원) 길 건너편 공원, 동상 앞에서 치러졌다. 이 자리에는 야당 지도자인 삼 랭시(Sam Rainsy)를 비롯하여, 야당 부총재 켐 소카(Kem Sokha), 비하이브 라디오의 운영자이자 언론인인 몸 소난도(Mam Sonando), 캄보디아 노동조합 연맹체 단체장인 롱 춘(Rong Chhun) 등 유명 인사도 참석하여 그의 동상 앞에 헌화하고 향을 피웠다.

치아 비치아의 남동생이자 자유노동조합(Free Trade Union of Workers of the Kingdom of Cambodia, 약칭 FTUWKC)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는 치아 모니(Chea Mony)는 "그(캄보디아 총리)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있지만, 나는 그가 죽기 전에 반드시 진범을 찾아내야 한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도 치아 비치아를 살해한 진짜 범인을 잡지 못한 것에 유감을 표한 것이다.

치아 비치아의 총격 살인사건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1월 22일, 캄보디아 자유노동조합위원장이던 치아 비치아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프놈펜 시내 한복판 신문가판대 앞에서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쏙 삼은(Sok Sam Oeun)과 본 쌈낭(Born Samnang) 두 사람은 치아 비치아를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되어 체포된 후 2005년 1심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 받았다. 지난 2013년 이뤄진 재심에서 재판부는 두 사람에게 혐의가 없다며 석방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경찰에 체포되고, 감옥에 감금된 지 8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의혹 한두 가지 아닌데, 묵인한 캄보디아 사법부

22일 진행된 추모제 때의 모습
 22일 진행된 추모제 때의 모습
ⓒ 이주영

관련사진보기


치아 비치아의 죽음에 모종의 배후가 있다는 추측은 사건 발생 당시, 신문가판대의 주인이었던 바 소티(Va Sothy)의 증언으로 더 분명해진다. 그가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치아 비치아를 구하려고 응급실에 연락한 후 치아 비치아를 통해 가족에게 전화하려고 하자 경찰이 이를 제지했다는 점이나, 당시 옆에서 들은 경찰의 통화 내용에서 그의 시신을 어딘가로 후송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졌다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특히 유일한 목격자인 바 소티가 진술한 범인 두 사람의 인상착의와 상관없이, 알리바이가 있는 쏙 삼은과 본 쌈낭을 잡아들인 점은 이 사건을 단순 살인 사건으로 둔갑하려는 세력이 있음을 방증한다. 특히나 본 쌈낭은 사건이 발생한 시각에 프놈펜에서 60km나 떨어진 지역에 있었으며 이를 증언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사법부는 이를 묵인했다. 외부의 살해 협박으로 고통을 겪던 바 소티는 현재 태국으로 망명한 상태다.

치아 비치아의 가족은 물론, 대부분의 캄보디아 사람들은 당시 사법부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증거조차 없는 용의자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것에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시민들은 이것이 의도된 시나리오이며, 정부가 무고한 사람을 잡아두고 진범을 잡을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캄보디아 노동자들에 큰 영향 준 인물, 치아 비치아

치아 비치아를 주목한 건 캄보디아인들만이 아니다. 브래들리 콕스(Bradley Cox)는 지난 2009년 다큐멘터리 <누가 치아 비치아를 죽였나?("Who killed Chea Vichea?")>를 제작해 치아 비치아의 죽음을 조명했다. 사전 조사 기간만 5년이 걸린 본 작품은 사건을 둘러싼 증인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정부-사법부-경찰 간의 불의한 협착을 고발하고 있다.

상영시간 81분인 이 다큐 작품이 완성된 이후 캄보디아 정부는 이 다큐가 치아 비치아의 죽음에 정부가 긴밀하게 관련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 금지' 명령을 내렸고 공공장소에서 상영할 시에 엄중하게 다스리겠다고 공표했다.

캄보디아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인물로 평가받는 치아 비치아는 죽은 후에도 여전히 노동자의 우상이며 영웅이다. 그는 젊은이와 청년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해, 자유를 수호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알렸고 자신의 삶을 통해 그것을 직접 실천으로 옮겼다.

야당에서 활동하는 킴스룬(31·Kimsrun)씨는 추모제에서 치아 비치아가 한 명언을 상기시켰다.

"I think they want to kill me because of my experience in the past," Chea Vichea says, adding: "I'm not afraid. If I'm afraid, it's like I die."
"나는 두렵지 않다. 만약 내가 두려워한다면, 나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치아 비치아, 생전에 그가 한 말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태그:#치아 비치아, #캄보디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