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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잊은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를 가슴에 품고 음악을 들었다.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노래 가사를 받아쓰고, 가슴 졸이며 녹음을 하고,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 두었다. 요즘은 클릭과 스킵을 하면서 음악을 빠르게 구하고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은 다 쓰면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음악을 쉽게 소비한다. 한때는 소녀였고 지금도 소녀라고 믿고 싶은 우리는 [올드걸의 음악다방]에서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마음 깊숙한 곳에 소장했던 노래를 꺼내 듣고, 누군가는 새로 알게 된 노래를 즐겼으면 좋겠다. - 기자 말

내것이 아니었던 워크맨
▲ . 내것이 아니었던 워크맨
ⓒ 반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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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월급을 받자마자 워크맨을 샀다. 그때까지 내가 쓰고 있던 카세트 플레이어는 '소니'도 '마이마이'도 아니고 '아하'도 아니었지만 소중한 보물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오토리버스 기능이 없어 한쪽 면의 음악이 끝날 때마다 테이프를 바꿔 끼워야 하는 게 불편했다.

하도 오래 사용해서 낡은 모양새와 부러진 안테나가 보기 싫었다. 당시 워크맨은 전당포에서도 받아주는 고가의 전자제품이어 새 것을 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연장 탓을 하는 목수처럼 도구 탓을 하며 음악을 잘 듣지 않다가 내가 번 월급으로 원하는 것을 드디어 사게 되었다.

고르고 골라 '아이와' 워크맨을 샀다. 워크맨은 소니 모델이름이지만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통칭하는 용어가 되었으니 아이와 제품도 워크맨이다. 회색과 금속 촉감이 주는 느낌이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보이는 것이 소니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아이와도 소니 못지않은 오디오 회사이니 품질은 의심하지 않았다.

워크맨을 사고 바로 레코드 가게로 가서 테이프를 샀다. 쌀쌀한 겨울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노래였지만 듣고 싶었다. 강인원, 권인하와 김현식이 함께 부른 '비오는 날의 수채화' 제목처럼 한 폭의 그림 같은 노래다. 비를 소재로 하는 노래들은 슬픈 감정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노래는 맑고 청량해서 덩달아 나도 깨끗해지고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며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

- '비오는 날의 수채화' 노랫말 중 일부

집으로 돌아와서도 듣고 또 들었다. 다음 날 출근길 버스 안에서도 계속 들었다. 회사에서는 워크맨을 넣어둔 가방으로 계속 눈길이 갔다. '이제 저 것이 내 보물 1호야.'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내 월급으로 장만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하여 번 돈과는 느낌이 달랐다. 나도 어른이라는 것,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용기가 불끈 솟아올랐다.

그런 보물을 퇴근길 버스 안에서 잃어버렸다. 어이없었다. 그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같은 버스를 탄 선배를 두고 음악을 들을 수 없어 워크맨을 가방에 넣었다.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학생의 친절을 무시할 수 없어 맡겼다. 그리고 워크맨이 사라졌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은 없고… 당황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학생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가 월급 날에 맞춰 계약한 적금과 재형저축, 워크맨 가격을 제하고 나면 남은 돈이 거의 없었다. 다음 월급 날까지 필요한 교통비, 식비 정도만 겨우 남았다.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무조건 사드려야 한다는 빨간 내복은 구경도 못했다. 첫 월급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드려야 하는 감사 인사와 빨간 내복보다 내 욕망이 우선했다는 것이 민망했다. 워크맨이 아니라 월급을 통째 도둑맞은 것 같았고 어리숙한 내가 싫었고 어른이 되었다는 자부심도 꺾였다.

음악이 흐르는 그 카페에 초코렛색 물감으로
빗방울 그려진 그 가로등불 아래 보라색 물감으로
세상 사람 모두 다 도화지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행복하면 좋겠네
욕심 많은 사람들 얼굴 찌푸린 사람들
마치 그림처럼 행복하면 좋겠어
- '비오는 날의 수채화' 노랫말 중 일부

그때 내가 잃어버린 워크맨에 들어있던 노래를 듣고, 도둑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너무 쉽게 도둑질을 해서 세상 살기 쉽다고 생각했나. 노래에서는 욕심 많은 사람들, 얼굴 찌푸린 사람들 모두모두 행복하면 좋겠다고 했는데…. 나는 오래도록 불행했다.

우연히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듣게 되면 화가 났다. 비오는 날도 싫었다. 노래는 맑고 상쾌하고 통통 튀는데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언제부터 이 노래가 다시 편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돈을 벌지 못하고 어리숙하고 어른스럽지 않은데도 노래가 예전처럼 불편하지 않다. 이유는 모르겠다.


태그:#비오는날의 수채화, #올드걸의 음악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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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주부입니다. 교육, 문화, 책이야기에 관심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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