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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루 탑과 석문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 브사키 사원군 메루 탑과 석문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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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 함께 발리에서 가장 높은 아궁산(Gunung Agung, 3142m)의 1000m 중턱을 올랐다. 그곳에서는 발리 힌두교도들의 어머니 사원, 브사키 사원(Pura Besakih)이 있었다. 우리는 브사키 사원의 가장 정수리에 올라섰다.

아궁산이 워낙 고지대라 순식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우리가 사원을 답사하는 동안에는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다. 맑은 하늘 아래, 눈 아래로 크고 작은 23개의 사원군이 집중된 모습이 한 눈에 펼쳐진다. 아궁산의 경사면을 따라 우람하게 버티고 선 힌두교 사원의 석문과 성스러운 메루(Meru) 탑들이 끝 없이 산 아래로 넓게 이어지고 있었다.

복합 사원인 브사키 사원은 3개의 주된 사원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사원이 주변에 분포하고 있다. 3개의 주요 사원은 힌두교 주요신인 시바(Shiva), 브라흐마(Brahma), 비슈누(Vishnu)를 모시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좌측 푸라 피나타란 아궁(Pura Penataran Agung), 우측의 푸라 키둘링 컬타(Pura Kiduling Kerta)에서는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창조의 신인 브라흐마 신을 모시고 있다. 발리의 힌두교인들은 이 브라흐마 신이 특히 불을 관장한다고 믿고 있다. 발리의 힌두교는 이렇듯 인도의 힌두교와 발리의 토착 신앙이 결합된 모습을 띠고 있다.

푸라 피나타란 아궁의 좌측 사원인 푸라 바뚜 마덕(Pura Batu Madeg)에서는 우주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신인 비슈누 신을 모시고 있다. 발리의 힌두교에서는 이 비슈누 신이 물을 관장한다고 믿는다. 바뚜 마덕 사원을 오르려고 보니 사원의 석문을 향하는 계단 제일 위에는 힌두교도인 어린 소녀 2명이 사원을 지키고 서 있다. 이 사원은 외국 관광객의 출입을 엄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왜 하필 어린 소녀들이 저 큰 석문을 지키고 있을까 생각하면서 브사키 사원군의 하이라이트로 발걸음을 돌렸다.

비슈누 신을 모시는 신전을 두 소녀가 지키고 있다.
▲ 푸라 바뚜 마덕 비슈누 신을 모시는 신전을 두 소녀가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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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의 향연, 아궁산

푸라 피나타란 아궁(Pura Penataran Agung)을 향해 걸어가면서 이 사원군의 모든 건축물 배치가 푸라 피나타란 아궁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궁산 중턱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사원, 푸라 피나타란 아궁은 브사키 사원군 중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다. 발리의 여러 왕족과 귀족들은 이 사원을 중심으로 사원군 안에 자신들의 사원을 세우고, 현재까지도 정성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힌두교의 신 중에서도 시바 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듯이 시바 신을 모시는 푸라 프나타란 아궁이 브사키 사원의 한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아 힌두교의 여러 사원의 신들을 거느리고 있다. 푸라 프나타란 아궁은 사원군 내에서 규모도 압도적으로 가장 크다. 발리가 큰 섬이기는 하지만, 섬 규모와 인구에 비해 엄청나게 큰 사원의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발리 여행을 하면서 본 특색 있는 발리 사원들을 한 곳에 집대성해 놓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힌두교도인 발리 현지 가이드들은 성심껏 외국 관광객들을 안내한다.
▲ 사원 가이드 힌두교도인 발리 현지 가이드들은 성심껏 외국 관광객들을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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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들도 발리 전통 의상을 입고 외국 관광객을 정성으로 안내한다. 발리의 힌두교도들도 푸라 프나타란 아궁의 계단을 올라 시바 신을 만나러 간다. 이 힌두교의 성지 안에는 흰색 상하의에 흰 우등(udeng)을 머리에 두른 힌두교도들이 사원의 돌 바닥에 앉아 끊임없이 힌두교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힌두교도들이 성스럽게 의식을 진행하는 곳이라서 외국 관광객의 출입은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푸라 프나타란 아궁으로 이어지는 계단 꼭대기에 주요 출입구가 있는데 이 정문에서는 외국 관광객의 출입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이 사원 안에는 투어를 하는 단체관광객들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브사키 사원 오는 길이 발리 중심에서 동쪽 아궁산을 향해 한참을 가야하고, 왕복 시간도 꽤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힌두교의 성지임을 내세워 발리 현지 가이드들의 텃세도 심하다. 큰 제례 행사가 있는 날에는 사원 앞 길이 출근길 교통 정체처럼 밀리는 날들도 많다. 

푸라 피나타란 아궁 서문. 정문 계단보다는 서문을 이용하면 편하게 입장할 수 있다.
 푸라 피나타란 아궁 서문. 정문 계단보다는 서문을 이용하면 편하게 입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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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는 발리 친구 아롬을 따라 사원 북쪽의 담장 너머에서 사원을 한 번 내려 보고, 다른 사원들을 더 둘러본 후 사원 서쪽의 작은 문을 통해 들어왔다. 서문 쪽은 관광객을 제지하는 사람도 없고, 출입이 자연스럽다.

자세히 보니 사원의 정문 쪽으로는 다리가 드러나지 않고 복장 상태가 양호한 외국인 관광객 몇 명만 입장하고 있다. 원래는 힌두교 사원에 예배를 하는 관광객만 입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발리 친구 아롬은 이 사원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기 위해서 사원 정문의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사원들을 모두 답사한 후 마지막으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황금색 금장 두른 사원의 문

노란색, 흰색, 빨간색은 힌두교의 주신들을 상징한다.
▲ 푸라 피나타란 아궁 제단 노란색, 흰색, 빨간색은 힌두교의 주신들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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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의 돌바닥 위에 경건하게 앉아 힌두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 힌두교도들 사원의 돌바닥 위에 경건하게 앉아 힌두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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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가 힌두교 의식을 치르는 제단 앞까지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모습을 보자 아롬도 긴장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아롬은 내가 의식을 진행하는 장소까지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나는 사진 몇 장을 찍은 후 얼른 몸을 돌려 제단 밖으로 나왔다. 나는 아롬이 알려준 대로, 의식 장소와 일정 거리를 두고 둘러봤다.

사원의 문과 메루 탑의 처마, 그리고 사당 건물의 처마가 온통 황금색 금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는 것을 보면 발리인들이 얼마나 정성스레 모시는 사원인지 알 수 있다. 사원과 제단에는 바로 뒤 아궁산에서 채취한 검은 현무암만 사용되고 있다. 발리를 통틀어서 아궁산의 검은색 현무암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이 브사키 사원군뿐이다. 푸라 프나타란 아궁이 발리의 진정한 중심임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이 사원에서는 주기적으로 큰 제례행사를 연다.
▲ 푸라 피나타란 아궁의 제례 이 사원에서는 주기적으로 큰 제례행사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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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 메루가 높게 솟아있다.
▲ 푸라 피나타란 아궁 메루탑 세계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 메루가 높게 솟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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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사키 사원군의 여러 힌두교 사원에서는 일 년 내내 제례가 끊이지 않는다. 브사키 사원에서는 발리의 발리 달력이 정해놓은 1년(210일) 중 총 55회의 제례가 열린다. 오늘도 푸라 피나타란 아궁의 곳곳에서는 힌두교 신자들이 정성스럽게 제물을 올리고 있다.

주제단 깃대 위에 걸린 작은 파라솔 모양의 노란색, 흰색, 빨간색의 장식물들은 각 신들을 나타낸다. 왼쪽 방향부터 노란색이 비슈누, 흰색이 시바, 빨간색이 브라흐마를 상징한다. 그렇게 활달하던 발리인들도 주제단 앞의 자기가 모시는 신 앞에서 모두 경건하게 앉아 있다. 제단 주변에서는 말 소리도 크게 들리지 않는다. 발리 섬의 최고 중심 사원 안에서 발리인들 모두가 성심을 다해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이곳에 몰려든 힌두교도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듯 사원 뒤쪽에 걸터앉아 제례가 진행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이들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힌두교의 신들을 모시고 힌두교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주를 관장하는 신, 시바

이 사원 바로 뒤편에 자리 잡은 아궁산은 발리에 힌두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성스러운 곳이었고, 이곳에서 발리 현지들은 고대로부터 신에게 제사를 지내왔었다. 그리고 자바 섬에서 넘어온 힌두교도 왕족도 이 사원의 영험한 힘을 믿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현재 이 푸라 피나타란 아궁에서는 힌두교의 주신, 시바 신을 모시고 있다.

발리의 힌두교도들은 우주의 원리를 관장하는 시바 신이 최고의 신이라고 믿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시바 신이 땅 위에 나타난 것이 왕이라고 믿었기에 발리의 왕들은 이 사원의 시바 신을 극진히 모셨다. 지금도 발리 왕가의 자손들은 이 사원에서의 제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으며, 각자 사원 내의 여러 건물을 관리해야 하는 의무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왕의 후손들이 관리하는 이 사원은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듯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나는 아궁산 아래, 단구(段丘)의 제일 높은 성소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 사원 주변의 발리 현지인들은 외국 관광객에게 돈을 내면 향도 피우고 절을 할 수 있다고 권하기도 한다. 이들이 나에게 접근을 하지 않는 이유는 내 옆에 오늘 가이드를 해주고 있는 발리 현지인, 아롬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시바 신 앞에서 굳이 향을 피우거나 절을 하지는 않았다. 왠지 낯선 신 앞에서 소원을 말하는 게 선뜻 내키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앉아 소원을 빌기보다는 아궁산 아래를 바라보며 명상을 하면 마음이 저절로 정화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원을 내려가면서 보니 한 사당 건물의 벽면 전체가 푸라 피나타란 아궁의 제례 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 아롬이 이 사진들과 발리인들의 마을을 함께 내려다보며 푸라 피나타란 아궁의 시바 신과 제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푸라 피나타란 아궁에서는 자체적으로 큰 제례 행사를 여는데, 1년에 한 번, 10년에 한 번, 그리고 100년마다 한 번씩 연다고 한다. 100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행사는 말 그대로 세기적인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사원의 규모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다.
▲ 브사키 사원군 전경 사원의 규모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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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신을 모시는 이 사원은 발리 최고위의 사원이다.
▲ 푸라 피나타란 아궁 시바신을 모시는 이 사원은 발리 최고위의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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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행사는 정말 엄청나고 대단하지요. 브사키 사원의 아래로 이어진 길이 힌두교도들의 수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지요. 100년 행사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것이 1979년입니다."

"그럼, 2079년에 100년에 한 번 열리는 제례가 있겠군요. 내가 살아있던 1979년에 이 세기적 종교 행사를 못 봤군요. 2079년이면 내가 110세가 넘는데... 내가 지구촌 최고령 기록을 깨지 않는 한 그 행사를 보기는 힘들겠군요."

이 생각을 하면서 무언가 번개같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문득 잠시 깨달음에 달한 경지라는 돈오점수(頓悟漸修)랄까?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면서도 잊어버리고 사는 사실. 내가 지구에 태어나 몇 십 년 살다가는, 참으로 유한한 존재라는 것.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14년 6.19일~6.24일의 인도네시아 발리 여행 기록입니다.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400 여 편이 있습니다.



태그:#인도네시아 여행, #발리, #브사키 사원, #푸라 피나타란 아궁, #힌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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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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