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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자목련(2010. 4. 제주 서귀포시 김영갑갤러리에서 촬영).
 자목련(2010. 4. 제주 서귀포시 김영갑갤러리에서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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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투사로 변하다

허형식은 개원현 이가태자에서 춘옥을 겁탈한 지주 펑(馮)을 응징하고자 칼로 엉덩이를 마구 찔렀다. 그는 복수심에 펑의 목을 칼로 치려다가 부모님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라 살려주었다.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곧장 영안현 철령허 큰집으로 가거라."

아버지는 약제함에 있는 비상금을 몽땅 털어 아들에게 주었다. 형식은 지체하지 않고 그 길로 이가태자를 떠났다. 형식은 도보로, 마차로, 열차로 영안현 그 먼 길을 헤매며 큰집을 찾아갔다. 이듬해 봄, 형식 가족은 마 서방과 함께 영안현으로 찾아왔다. 형식이 이가태자를 떠난 뒤 형식 부모와 마 서방은 지주 펑(馮)가 가솔들에게 숱한 시달림을 당한 뒤 그 곳에 도저히 살 수 없어 야반도주로 아들을 찾아왔다.

그때부터 형식은 투사로 변했다. 동포들이 지주나 마적들에게 일방으로 당하면 형식은 그냥 지켜보지 않고 앞장서서 덤볐다. 어느 하루 마적 우두머리가 마을에 와서 행패를 부리자 형식은 그를 번쩍 들어 언덕 아래로 던졌다. 그 일 이후 철령허에는 마적 떼들이 당분간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족 핏빛 이주사

우리 동포들의 중국 동북(만주) 이주사는 핏빛 그 자체였다. 조선족 동북 이주 시기는 크게 제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9세기 중엽부터 19세기 말까지로 그 시기 이주는 주로 흉작에 따른 가난과 조선 탐관오리들의 폭정 때문이었다. 제2기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부터 1920년대까지로 주로 항일 운동을 위한 정치적 망명이었다. 그리고 제3기는 그 이후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로 일제의 환위이민(換位移民,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래 일본인을 조선으로, 조선인을 중국 동북으로 이주 보냄)정책에 따른 강제 이주 정책 때문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으로 많은 조선 농민은 제 나라에서 일본인들에게 토지를 빼앗겼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괴나리봇짐에 쪽박을 차고 북상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꾸역꾸역 건너 만주로 갔다. 그 무렵 신문 보도다.

강원도 이천군(伊川郡)에서는 근년에 와서 화전조차 마음대로 경작 못하고, 각종 세금은 나날이 늘어가며 가지가지 부담액은 많아서 돈 있는 사람은 돈 없어지기 전에, 돈 없는 사람은 춘궁기는 닥쳐오고 나날이 쪼들리는 생활은 점점 심하여져서 가다가 죽더라도 북간도에 간다고 떠난 동포 수가 올 봄에 벌써 150여 명에 달한다는데 지금도 가려고 준비하는 가구가 50여 호라는 바, 길거리에는 빈집이 많이 있다더라. (동아일보 1927. 4. 2)

 오늘의 빈현(2000. 8.)
 오늘의 빈현(200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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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빈안진
 오늘의 빈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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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른바, '만주 치안'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조선인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이들은 헌병 보조원, 밀정, 만주군 지원자들 등이었다. 일제는 이들을 조선독립군과 싸우게 하는 교활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썼다.

만주로 떠난 조선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다. 이주 초기에는 중국인 지주에게 땅을 빌린 소작료가 비교적 낮았으나, 점차 이주자가 늘어나면서 소작료가 오르고, 소작 조건도 악화돼 갔다. 이러한 불평등 모순 사회는 일찍이 칼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 사회는 지나친 빈부 격차와 내부적 모순으로 붕괴, 공동으로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세상이 오게 된다는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기 마련이었다.

만주에 이주한 상당수 농민들은 계급적 평등과 반제(반일)투쟁을 주요 구호로 내세우는 이런 사상에 점차 공감하게 되었다. 게다가 코민테른은 이들에게 민족 해방과 함께 토지를 준다는 복음과 같은 말에 대부분 소작 농민들은 빠져들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들불처럼 만주 벌판에 번져 나갔다.

사실 만주 조선인들의 공산주의 운동은 중국인보다 훨씬 빠르게 시작되었다. 1923년 연길 현 용정촌 동흥중학교에 고려공산청년동맹이 결성되는 등, 그 사상은 만주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허형식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다

 빈안진에 남아 있는 조선족 마을
 빈안진에 남아 있는 조선족 마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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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그 해 농사는 엉망이었다. 벼 이삭이 팼다가 가뭄으로 그대로 빳빳하게 말라 버렸다. 쭉정이마저도 꿩들이 날아와 죄다 훑어먹었다. 그 때문에 꿩을 잡아 볶아도 먹고, 메밀국수에 넣어도 먹었지만, 조선 이주 동포들은 양식 부족과 소득 부족으로 곤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 봄, 허형식 가족은 그곳보다 땅이 넓고 수리시설이 좋다는 하얼빈 부근 빈현 가판점(지금의 빈안진)으로 또 이사를 갔다.

 최용건(1940년대 모습)
 최용건(1940년대 모습)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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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북만주의 아성, 주하, 빈현 등 조선 농민 거주지역에서는 항일민족운동이 드세게 일어났다. 특히 빈현에서는 중국공산당 북만위원회 아래 특별 지부가 있었는데, 동포 최용건(崔庸健, 이명 崔石泉)이 서기를 담당하고 있었다.

최용건은 평안북도 태천 출신으로 정주의 오산학교를 다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쿤밍의 운남군관 학교를 졸업한 뒤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을 지내는 등 군사 부문에서 뛰어난 경력을 쌓은 항일전사로, 일찍이 1927년 발생한 광저우 코뮌에도 가담한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

당시 중국공산당 빈현 특별지부는 농민동맹, 청년동맹, 부녀회 등이 조직돼 있었다. 반일 사상에 투철하고, 투쟁력이 뛰어난 허형식은 최용건에게 포섭돼 1930년 초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그때 허형식은 마치 고기가 큰물을 만난 것처럼 이후 반일, 반제 투쟁에 앞장섰다. 이 때 그는 부녀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정숙(본명 김점증)과 결혼하였다. 그는 신혼이었지만, 당 사업과 한어(漢語, 중국어) 학습에 전심전력해 한어를 중국인 못지 않게 구사했다.  

허형식은 농촌 현장에서 실질적인 투쟁 경력과 공산당 당 조직의 체계 있는 교양 훈련으로 패기만만한 항일 전사로 거듭 태어났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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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