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1970 메인 포스터

▲ 강남 1970 메인 포스터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유하 감독이 돌아왔다. 이민호와 김래원을 내세운 누아르 <강남 1970>을 통해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통해 주목받던 시인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유하 감독은 이후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쌍화점>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한국 영화계의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지난 2012년 초 개봉한 <하울링>의 흥행실패 이후 3년 여의 공백기를 가졌고 올해 1월 21일에야 <강남 1970>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영화는 감독 스스로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와 함께 '거리 3부작'의 완결로 칭한 작품인 만큼 두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1978년의 말죽거리, 정문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다뤘고 <비열한 거리>는 조폭세계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제대로 된 기회를 잡지 못하는 젊은 조직폭력배의 비애를 그렸다.

<강남 1970>은 1970년대의 서울, 개발이 시작되던 강남지역을 둘러싼 두 젊은이의 욕망과 파멸을 그린 작품이다. 누아르로서 다소 이질적인 학교라는 배경을 선택한 <말죽거리 잔혹사>나 잘 안 나가는 조폭의 어려움을 중점적으로 그린 <비열한 거리>에 비해 전형적인 배경과 캐릭터, 구성을 택했다.

주인공은 종대와 용기라는 두 청년이다. 둘은 고아원에서 만나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로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에서 넝마주이를 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깡패용역들에 의해 종대와 용기의 집이 무너지고 저항하던 그들은 폭력배 사무소로 끌려오기에 이른다. 이후 우연찮은 일들이 거듭 벌어지며 종대와 용기는 각기 다른 조직에 소속되어 폭력배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욕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 희망이란 없다

강남 1970 영화의 명대사 '땅종대(이민호 분), 돈용기(김래원 분)'가 탄생하는 장면

▲ 강남 1970 영화의 명대사 '땅종대(이민호 분), 돈용기(김래원 분)'가 탄생하는 장면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영화는 서로 다른 조직에 입문한 형제가 어떻게 파멸에 이르는지를 담아내며 그 과정에서 강남의 개발을 둘러싼 정치인과 폭력배, 공무원, 투기꾼들의 협잡과 암투를 실감나게 그려냈다.

오프닝의 자막에서 명시한대로 영화는 실제의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 1970년의 중앙정보부장으로 등장하는 김정규 역시 가상의 인물이다. 그의 이름을 보면 자연히 연상되는 김재규는 1970년에 중앙정보부장이 아니었으며 이 시기는 그의 선임자 이후락이 임명되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영화에 등장하는 국회의원과 폭력배들의 이야기 역시 사실로 볼 수 없지만 완전히 거짓으로 넘기기에는 이와 비슷한 일들을 우린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영등포 동쪽에 위치했다 해서 영동이라 불렸던 지금의 강남지역으로 서울이 확장되기까지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을까 하는 상상으로부터 영화는 출발한다. 중앙정보부장과 그에게 선을 댄 국회의원들, 이 의원들을 '뒷배'로 삼은 폭력배들이 영화의 주요한 등장인물이다. 영화에선 이들에게 정보를 주거나 얻는 공무원들과 술집 마담, 이들에 의해 밀려나는 영동지역의 농부들 모습도 보인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각자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서로를 이용하고 견제하며 사적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이 속에서 의리나 우정, 사랑 따위의 가치들은 껍데기만 남아있으며 거듭된 배신과 반목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오직 주인공인 종대와 그 주변 인물들만이 의리와 애정을 위해 움직이지만 영화는 결말에서 이들 모두를 파멸시키며 욕망으로 가득찬 세상에 희망이란 없음을 선언한다. 내내 돈과 섹스, 폭력이 흘러넘치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느껴질 만큼 허망한 결말이 이어진다. 그 의미심장한 엔딩신을 통해 감독은 위선과 욕망만이 살아남아 강남의 오늘을 지탱하고 있는 게 아닌지 물으려 했던 것일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마틴 스콜세지 같은 누아르의 거장들이 반복해서 해왔던 그 물음을 2015년에 이르러 다시금 물으려 했던 것일까?

1970년에 개봉했다면 참신할 수도 있었겠지만

강남 1970 비열한 정치인 서태곤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 유승목

▲ 강남 1970 비열한 정치인 서태곤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 유승목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강남 1970>은 전반적으로 새롭지 않은 영화다. 오프닝부터 엔딩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구석이 너무도 많았고 할리우드 누아르 영화의 문법을 그대로 차용한 듯한 장면들도 너무나 많이 쓰여 지루하게까지 느껴졌다. 돈과 섹스, 폭력으로 가득 찬 이야기가 이렇게나 지루할 수 있는 것인가 싶을 만큼 진부하고 전형적인 구성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결말과 메시지까지도 그러했다. 이와 같은 메시지가 유효할 수 있음을 부인하긴 어렵지만 그렇다해도 작가로서 새로운 전달방식을 고민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아쉬움이 많았다.

김래원과 이민호가 용기와 종대 역을 맡아 전보다 한층 나아진 연기력을 선보였으며 정진영, 유승목, 최진호, 정호빈, 김지수 등 검증된 중견배우들이 든든하게 뒤를 받친 덕에 연기에서는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았다. 하지만 캐릭터와 드라마, 구성과 서사 등에 있어 참신함을 잃어버렸고 유하 감독의 장기라고 여겨왔던 분위기 있는 장면연출과 액션 역시도 빛이 바랜 듯한 인상이었다. 특히 비오는 장례식장의 격투신은 스스로 자신의 영화를 오마주(존경)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연출의 힘과 세기 역시 부족해서 조잡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이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가 1972년에, <대부 2>가 1974년에 만들어졌음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70년대에 만들어졌다 해도 참신하다고만 여겨지지는 않았으리라.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신의 전작 <비열한 거리>나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 윤종빈의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만 생각해보아도 <강남 1970>이 배경설정이나 구성, 전개, 연출, 캐릭터, 메시지 등에서 어떠한 의미있는 지점에 도달했는지 의문이다.

유하 감독이 오랜만에 자신의 장기인 누아르로 돌아왔지만 너무 안전하게 만들려다 특색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안타까웠다. 졸작이라 하기엔 괜찮았던 부분도 있었지만 유하 감독의 재능을 생각해보면 결코 이 정도 영화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 게재하였습니다
강남 1970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유하 김래원 이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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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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