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부천에는 서른 개가 넘는 지역언론이 있다. 그 가운데 협동조합이라는 틀에서 출발한 독특한 언론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콩나물신문>(www.kongnews.net)이다. 이 글은 <콩나물신문>의 새내기 기자가 동네 사람들과 부대끼고 뒹굴며 신문을 만들다 겪는 이런저런 일들을 온전히 기자 마음대로 적는 글이다.

<콩나물신문>이 어떤 신문이고 왜 이름이 '콩나물'인지 한 번에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아직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실험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사연들이 쌓여갈수록 <콩나물신문>은 잘 자란 콩나물처럼 점점 토실해질 것이고 또 그런 콩나물들이 수북이 담긴 시루처럼 풍성해질 것이다. - 기자 말

콩나물신문 인터넷판 첫화면
 콩나물신문 인터넷판 첫화면
ⓒ 박병학

관련사진보기


얼마 뒤면 <콩나물신문>에서 기자 노릇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된다. 짧은 시간이나마 적잖은 사람들을 만나 인연을 맺으며 갖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새 기자의 이모저모가 궁금했는지 내게 집은 어디냐 여기 오기 전엔 무얼 했냐 결혼은 했느냐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람들도 몇 있었는데 오늘은 색다른 질문을 받았다.

얼마 전에 신문사로 이런 제보가 들어왔다. 반 년이 지나면 정년이 꽉 차 학교에서 물러나는 어느 교장이 있는데, 자기가 떠나기 전에 사고라도 일어날까 봐 수학여행을 비롯한 상반기 행사와 외부 일정들을 모두 하반기로 미뤘다고 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서로를 알아 가고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한 시간들을 교장 마음대로 송두리째 드러낸 것이 된다. 하반기가 되어야 행사나 외부 일정이 시작된다는 것은 결국 여름방학이 될 때까지 아이들은 교실 안에서 공부만 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학교 교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교사는 곧장 교무부장에게 연결해 줬다. 이러저러한 제보를 받았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교무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2015년도 학사 일정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습니다. 제가 교무부장인데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에요."
"수학여행을 어느 계절에 가는지는 학교에서 여러 번 회의를 거친 뒤 학교장이 결정하는 사항입니다. 누가 제보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외람된 질문 같네요."
"경기도 교육청은 올해부터 방학분산제를 시행할 예정입니다(방학분산제는 여름과 겨울에 있던 방학을 봄과 가을에도 나눠 실시하는 제도). 학사 일정이 2014년과는 다소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콩나물신문은 사상적으로 어떤 신문인가요?"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는 이야기니 제보가 잘못된 정보일 가능성도 있었다. 확정된 학사 일정이 학생과 학부모에게까지 알려진 뒤에 취재해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쯤에서 통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내가 <콩나물신문> 기자라고 밝혀서 그랬는지 교무부장은 '부천 토박이로서 처음 들어보는' 신문에 갑자기 관심을 갖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부천 어디에 있는 신문사냐. 주로 어떤 기사를 싣느냐. 인터넷 홈페이지는 있느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물음을 던졌다.

"콩나물신문은 이념이나 사상적으로 어떤 신문인가요? 재미 위주의 신문인가요, 이념적인 성격이 강한 신문인가요, 아니면 우리 주위의 불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신문인가요?"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당신의 이념은 무엇인가. 당신은 사상적으로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에서 이런 물음들이 얼마나 많이 던져졌을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강요된 이 물음에 시달렸을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 사라져 갔을 것인가. 수화기 속에서는 교무부장이 잠자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콩나물신문>에 이력서를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면접에 나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면접 때 내게 던져진 물음들 가운데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왜 콩나물신문에 들어오려고 하죠?"

나는 대강 이렇게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라면 사람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언론에선 기사거리가 아니라고 판단해 다루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도요."

'알릴 권리' 또한 소중하게 생각하는 신문

교무부장이 말한 이념이란 무엇이었을까? 맑스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주체사상?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이야기다. 나도 한때 이것저것 책을 뒤적이며 공부하는 시늉을 하긴 했지만 하나같이 깊이 파고들지 못해 아주 얄팍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함부로 이념이나 사상을 묻지 않는다. 말 한 마디로 당신의 이념이나 사상을 설명해 달라고 하는 건 매우 어리석은 물음이자 때로는 실례가 되는 물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무부장은 내가 다니는 신문사의 이념이나 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나는 교무부장이 이 세상에 존재해 온 수많은 이념 혹은 사상을 두루 공부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는 순전히 학술적인 호기심에서 비롯된 물음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이 통화를 차분하게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의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싣는 신문입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참말이었다. 내가 꾸준히 읽어 온 <콩나물신문>은 장터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부터 시의회에서 정책을 짜는 의원들까지 사람이라면 실리지 못할 이유가 없는 신문이었다. 독자들의 '알 권리'와 더불어 평범한 사람들의 '알릴 권리' 또한 소중하게 생각하는 신문이었다. 아마 이념이라면 그런 이념이었을 것이다. 사상이라면 그런 사상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가치를 가장 윗자리에 두고자 하는 신문. 이것이 이념이나 사상이라면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나는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맑스주의든 사회주의든 아나키즘이든 주체사상이든 그것이 만일 사람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콩나물신문은 단호하게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이름이 뭐든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고 떠받드는 그 어떤 것도 콩나물신문은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콩나물신문이다.

교무부장은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만일 이게 통화가 아니라 누군가가 내게 총부리를 겨눈 상태에서 던져진 물음이었다면,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반 세기 전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시절엔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물음에 걸려들어 목숨을 잃었다. 총을 쥔 자들과 다른 사상을 지닌 사람들은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런 사상도 이념도 품지 않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대답을 못했다는 이유로 주검이 될 수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보니 2015년 1월 23일이었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일들이 이 나라에서 많이 벌어졌지만, 정말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에게나 겨누어지던 총부리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수화기 속에서 너는 어떤 이념이고 사상이냐는 물음으로 튀어나왔고, 결국 내가 귀에 대고 있는 수화기는 금방이라도 총알을 쏘아 댈 듯한 시꺼먼 총구멍과 다르지 않았다.

순간 나는 대답을 잘못하면 머리통이 부숴질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사로잡혔지만 금세 고개를 흔들어 떨쳐 내고는 <콩나물신문>은 사람의 이야기를 싣는 신문이라 거듭 이야기했다, 교무부장은 여전히 긴가민가 하는 듯했고 나는 취재에 응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통화를 끝냈다.

전화를 끊고 나자 그 교무부장에게 내 입으로 읽어 줬으면 싶은 시 한 편이 생각났다. 사람의 이야기를 싣는다느니 어쩌니 주워섬기는 것보다 차라리 그 시를 수화기에 대고 천천히 읽어 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송경동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태그:#콩나물신문, #부천, #지역언론, #이념, #사상
댓글4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