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가 55년 만에 아시아 맹주 자리를 되찾기까지는 이제 딱 두 번의 승리만이 남았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26일 오후 6시(한국시간) 호주 시드니의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리는 2015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이라크와 대망의 결승 진출을 놓고 격돌하게 됐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나리오

대회 개막 직전 때만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슈틸리케호 출범 이후 처음 도전하는 메이저대회인 아시안컵에 출사표를 던질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은 반신반의했다. 물론 좋은 성적을 거두면 좋지만, 내심 우승까지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슈틸리케호는 정식으로 출범한 지 약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아시안컵 개막 전까지 고작 5차례의 평가전을 치렀을 뿐이다. 주축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으로 최적의 선수 구성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심지어 대회 개막 이후에도 조별리그에서의 기복 심한 경기력과 주축 선수들의 감기 대란으로 인한 선수단 관리, 이청용-구자철 등 핵심 선수들의 부상 아웃같은 악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2주 사이에 상황은 급반전됐다. 조별리그 최종전이었던 호주전의 승리가 반전의 기폭제가 되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홈팀인 호주를 잡으면서 선수들은 자신감을 되찾았고 한국은 조 1위로 당당히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정협-김진현-차두리 등 이전 대표팀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슈틸리케 감독이 아시안컵에서 과감히 중용했던 선수들이 기대 이상의 대박을 터뜨리며, 대표팀에 '신구조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주축 선수들의 부상 공백으로 인한 위기 의식은 선수들의 승부 근성과 집중력을 자극하여 더욱 끈끈한 팀으로 거듭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우즈벡과의 8강전에서 예상보다 어려운 연장혈전을 치르면서도 4경기 연속 무실점 기록과 함께, 부진하던 손흥민이 A매치 10경기 연속 골침묵을 깨고 멀티골을 터뜨리며 부활하는 등 긍정적인 신호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뭔가 한국 축구에 '되는 운'이 찾아오고 있는 조짐은 8강전 이후 달라진 토너먼트 판도에서도 두드러진다. 이번 대회에서 외신들 사이에서는 한국보다 더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던 일본과 이란이 모두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탈락하는 이변이 벌어졌다. 내심 한국의 설욕전과 빅매치를 기대했던 팬들에게는 다소 아쉽게 되었지만 한국으로서는 부담스러운 두 팀이 탈락했다는 건 분명 유리한 결과다.

이로써 4강전까지 생존한 팀중 확실한 강호라고 할만한 상대는 한국이 조별리그에서 꺾은 호주만이 남았다. 한국의 준결승 상대인 이라크는 확실히 이란보다 한 수 아래인 데다, 역대 전적에서도 6승 10무 2패로 한국이 우세하다. 양팀 모두 8강전에서 연장전 승부를 치렀지만 한국이 이라크보다 하루 먼저 경기를 치렀기 때문에 회복일이 길었다.

또한 한국은 8강전에서 경고를 받았던 선수들이 모두 소멸되었지만 이라크는 주전 선수 중 야세르 카심이 경고 누적으로 결장하는 것도 우리에겐 호재다. 그야말로 되는 일이 없어보이던 조별리그 초반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나리오도 전화위복이 되고 있는 모양새다.

아직 샴페인을 따기는 이르다

또한 한국은 현재 기록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좋은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이란과 일본이 탈락하면서 한국은 이제 이번 대회에서 유일하게 남은 무패-무실점 팀이 됐다. 슈틸리케호는 조별리그부터 4경기 연속 승리를 이어가고 있으며, 아시안컵 개막 직전이던 지난 4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평가전(1-0)까지 포함하면 A매치 5연속 무실점 승리다.

준결승과 결승 등 남은 2경기에서도 무실점 승리를 이어간다면 1978년과 1989년에 이어 한국 축구 최다 무실점 연승 기록인 7경기와 타이 기록을 이루게 된다. 참고로 역대 아시안컵에서 무실점-무패 우승을 기록한 건 1976년 대회의 이란(4경기)이 유일하다. 하지만 당시는 참가국이 고작 6개국이었고 경기수도 적어서 지금보다 가치는 훨씬 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 아시안컵의 흐름이 한국 축구가 28년 만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지난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축구의 과정과 상당히 흡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광종 감독이 이끄는 U-23 대표팀도 조별리그부터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경기력 난조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최종적으로는 7전 전승, 무실점이라는 대기록으로 퍼펙트 우승을 달성했다.

골 결정력이나 경기 운영에 대한 아쉬움은 조금씩 남아있지만, 어쨌든 선제골을 내주지않고 위기를 잘 극복하며 어떻게든 이기는 경기를 하고 있다는 점은, 아시안게임과 아시안컵 대표팀이 닮은 꼴이라고 할수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집중력있는 수비, 주전과 비주전의 고른 활약, 벤치의 뚝심있는 용병술 등은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물론 아직 샴페인을 따기에는 이르다. 대회 개막 전과 비교하면 한국의 우승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지만, 유리하다는 것이 반드시 승리의 보증수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승 후보였던 일본과 이란이 8강에서 허무하게 탈락하리라는 것도 예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한국이 55년간이나 우승하지 못했던 아시안컵은 그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은 무대다. 4강까지 살아남은 팀들도 모두 그만한 자격을 증명하고 올라온 것인 만큼 누가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승의 기회란 그리 자주 오지않으며, 준비되어있는 자만이 기회가 왔을때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베스트 11이 아닌 베스트 23을 내세운 슈틸리케호의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은 4강까지 올라올 자격이 충분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는 당연히 우승에 욕심을 내야할 상황이다.

잠깐의 방심이 그동안의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제는 아시안컵과 55년에 걸친 기나긴 악연을 끊고, 진정한 한국 축구의 변화를 보여줄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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