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수 부산시장과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서병수 부산시장과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 부산국제영화제


지난 23일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에 대한 사퇴 압박이 알려지면서 영화인들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선전포고, 전쟁, 전면전' 등이다. 이용관 위원장에 대한 부산시의 사퇴 요구는 궁극적으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현 정권이 영화계에 전쟁을 선언한 것이며, 영화인들 역시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관련기사: 부산영화제 위원장, 사퇴 압박...'다이빙벨' 상영 보복인가)

이 같은 분위기는 24일 저녁 열린 영화인들의 대책 모임에서도 표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모임에 참석한 한 영화계 인사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왔다. 지금껏 여러 모임이 있었지만 그토록 많은 영화인들이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다. 참석한 분들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지 몰랐는지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인들이 얼마나 다양한 방법을 가지고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줄 것"이라며 "월요일부터 본격적인 대응이 시작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사안을 바라보는 영화인들의 시선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한 영화인은 "서병수 부산시장이 자충수를 둔 것"이라고 단언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한국영화감독조합 등 12개 영화단체들은 26일 성명을 발표해 "부산시가 영화제의 독립성을 해치고 19년을 이어온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체성과 존립마저 흔들고 있다"며 사퇴 종용 철회를 요구했다. 또 "만약 지금과 같은 사태가 계속된다면 부산시는 영화인의 심각한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고 경고하고 비상기구를 통한 조직적인 대응을 천명했다.

일부 영화평론가들은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될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며 영화인들을 독려하고 있고, 현장 스태프들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결의를 나타내고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텔레그램 등 영화인들의 SNS도 표현의 자유 침해에 대한 규탄 의견이 주를 이루면서 함께 들썩이는 모습이다.

<시> <도희야> 등을 제작한 나우필름 이준동 대표는 "우선 제작자 개인 자격으로 미리 밝혀놓아야겠다"며 "영화인들의 대응은 별도로 하고, 부산시가 이용관 위원장을 기어이 몰아낸다면 나우필름과 파인하우스필름이 제작하는 영화는 부산영화제서 볼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터치> <사랑이 이긴다>의 민병훈 감독은 "부산영화제를 건드리는 건 마지막 남은 영화인의 자존심과 영화를 짓밟는 행동"이라며 "만약 집행위원장을 사퇴시킨다면 앞으로 부산영화제 출품은 물론 모든 행사에 보이콧 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다른 영화제 관계자는 "프로그램 선정과 관련해서 함께 영화제를 준비하는 부산시가 나서서 영화제의 방어막이 돼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앞장서서 영화제를 압박하는 것은 유치하다 못해 치졸한 짓거리"라고 맹비난했다.

국제영화제는 검열이나 간섭에서 자유로운 영화의 해방구

 1997년 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검열철폐 시위를 벌이고 있는 영화인들

1997년 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검열철폐 시위를 벌이고 있는 영화인들 ⓒ 부산국제영화제


이번 파문은 지난 영화제 당시 <다이빙벨> 상영을 강행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로 보이는데, 부산시가 오판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을 지낸 영화계 관계자는 "국내외 영화계의 현상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이런 오판을 하도록 부추긴 참모는 누군지 모르겠다"면서 "이 선전포고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거라는 너무도 기본적인 상황파악도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실 지난해 부산영화제 당시에도 몇몇 영화인들은 만일 외부의 압력에 굴복해 <다이빙벨> 상영을 포기할 경우 영화제를 보이콧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 부산영화제 측은 '시련을 각오하고 기존에 지켜왔던 원칙을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위상의 하락을 감수하더라도 부산시의 압력에 따를 것이냐'의 기로에서 원칙을 택한 것이었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각종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를 통해 "영화제를 시작하던 때의 초심"을 강조했는데, 이 말 속에 지금껏 지켜 온 영화제의 원칙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포함돼 있었다. 이는 부산영화제의 바탕에 검열에 대한 저항과 표현의 자유 수호를 외치던 영화인들의 의지가 자리하고 있기 떼문이다. 주로 '프랑스문화원 세대'로 불리며 외국 문화원을 통해 검열 안 된 영화를 자유롭게 보던 영화인들이 부산영화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고 지난 20년간 이어온 영화제의 기조였다.

한국영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검열을 막아내려던 영화인들의 저항의식은 독재정권의 기운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1990년대, 영화의 불모지인 부산에서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국제영화제는 검열과 심의로부터 자유로운 영화의 해방구로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 특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부산영화제 초기에는 이런 영화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해 혼란이 빚어지기도 했었다. 1회 영화제 때는 심의로 삭제된 필름이 상영되면서 대내외적인 비판과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영화제의 잘못이기보다는 수입사가 심의로 삭제된 필름을 제공한 것이었지만 부산영화제는 시작과 동시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심의를 규정한 실정법과 충돌하면서 부산영화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1997년 2회 영화제 때는 영화인들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영화제의 중심이었던 남포동에서 열린 영화인들의 검열 철폐 시위는 지금 부산영화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정법에 규정돼 있던 심의가 영화제에서의 예외를 인정하는 등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자율성 역시 1회부터 외부의 압박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1997년 2회 부산영화제 당시 금기시 되던 제주 4.3항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헌트>가 상영됐는데,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당시 영화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감독에 대한 수배와 검찰의 조사가 이뤄지기도 했으나 영화제에 상영 취소하라는 외부 압박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를 만든 조성봉 감독은 당당하게 관객과의 대화까지 참석하며 영화제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널리 알렸다. 그는 2013년 18회 부산영화제에서 제주 해군기지 반대 싸움이 진행되고 있는 강정마을을 소재로 한 <구럼비-바람이 분다>를 상영했으나 마찬가지로 큰 문제없이 상영이 이뤄졌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영화는 영원하다.

 지난 10월 3일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영화인들이 <철저한 진상규명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영화인 1123인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지난 10월 3일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영화인들이 <철저한 진상규명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영화인 1123인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 이정민


지난 20년 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했기에, 부산시장이 사실상 정권의 입장을 대리해 간섭하려는 태도를 부산영화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에 대한 사퇴 압박에 영화인들의 분노하며 반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부산시의 예산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부산영화제 성장은 영화인들과 관객들의 노력이 컸다. 부산영화제를 성장시켜 온 영화인들의 노력을 무시한 전횡에 분노가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임기를 시작한 지 1년도 안 된 부산시장이 영화제가 개인의 것인 양 흔들려는 것은 독재적 발상이라는 게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영화인들의 인식이다. 국제적 위상 추락은 차치하고라도 독립성이나 정치적 검열이 존재하는 영화제는 존재 이유가 없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몇 년 동안 영화제를 못 치르는 것을 감수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정도다.

아울러 이번 파문을 이용관 집행위원장 개인에 대한 문제가 아닌 한국영화 전체에 자존심이 걸린 문제로 여기고 있는 것도 영화계가 강경 대응을 밝히고 있는 이유들 중 하나다. <천안함 프로젝트>가 대기업 영화관에서 상영 중단과 거부 조치를 당하고 <또 하나의 약속> <다이빙벨> 등도 같은 일을 당한 것에서 보듯, 상영의 자유가 침해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려가 이번 일을 계기로 표출된 것이다.

"현 정권이나 시장 임기는 3년 정도 남았지만 부산영화제는 지난 20년 간 지속됐고 영화는 영원하다"는 것이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영화인들 인식의 단면이다. 부산시가 영화계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는 방식으로 적당한 출구전략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파문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해외 영화계가 이번 일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면서 현 정권과 부산시의 대외적 추락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인들은 정부가 문화정책으로 강조하고 있는 '문화융성'의 실체를 대외적으로 확인하고 문화적 후진국임을 인정하는 이 사태가 정권 차원에서도 부담이 될 것이라 보고 있다.

한 외신기자는 "해외 영화계에서 이번 일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부산영화제와 경쟁 관계에 있는 영화제의 경우, 집행위원장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방문 의사를 타진해 왔다"고 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서병수 B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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