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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식을 하기 위해 바다에 세운 지줏대 너머로 연륙교 공사가 한창이다.
 김양식을 하기 위해 바다에 세운 지줏대 너머로 연륙교 공사가 한창이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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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오도선착장에서 첫배를 기다린다. 그윽한 해무에 가려 잠긴 아침바다는 평온하다. 날 좋으면 시야에 가득 잡혔을 여며 뻘이며 물의 결들이 보이지 않아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보고 살기에 마음 어지러운 날이 많은지 모른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볼수록 눈에 가시가 돋는 것들은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해무 그윽한 오늘 아침바다처럼 말이다. 이게 비겁한 회피의 마음인지 냉정한 외면인지 모르겠다. 그저 한순간이라도 스스로 평화스럽고 싶은 부끄러운 소원이라고 해두자.

이제는 무인도가 되어버린 초란도를 지나 당사도에 도착했다. 작은 섬에 당(堂)이 두 개나 있고 마을 뒤에는 모래(沙)가 많아 당사도라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자로는 당나라 당(唐)자를 써서 唐沙島(당사도)로 쓴다. 그래서 당나라 때 양자강 모래가 이곳까지 흘러와 당사도(唐沙島)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주민들은 김 양식을 주업으로 하고 산다. 뻘과 모래가 뒤섞인 바닷물이 어른 키만큼 차는 자리에 김 양식을 위해 세운 지줏대가 서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연륙교를 놓기 위해 박아둔 콘크리트 철골구조물들이 연달아 해저에 박히고 있다.

연륙교는 생활의 편리와 섬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육지와 다리가 놓아지면 아픈 사람은 일초라도 빨리 병원에 갈 수 있다. 또 육지사람들은 바다에 대한 공포 없이 시골로 놀러가듯 섬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배를 타지 않고 가는 섬을 섬이라 할 수 있을까? 바다가 아닌 내륙 중심으로 연계하고 소통하는 섬을 해양플랫폼으로 볼 수 있을까? 섬이 자꾸만 바다가 아닌 육지에 포위되고 갇혀간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모래로 유명한 당사도에 고운 자갈로 이뤄진 작지가 있다.
 모래로 유명한 당사도에 고운 자갈로 이뤄진 작지가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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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사도 작지의 자갈은 작고 부드러웠다. 작지에 밀려온 부표 너머로 김 양식장과 섬이 보인다.
 당사도 작지의 자갈은 작고 부드러웠다. 작지에 밀려온 부표 너머로 김 양식장과 섬이 보인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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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궂어진다는 예보에 동네 사람들은 다 나가고 없고 노인들만 있다"고 귀띔하는 한 주민의 말을 뒤로 하고 서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리고 마을 안길을 따라 북동쪽으로 올라갔다. 분교를 지나 바닷가로 다시 내려가니 오른편으로 그 길이가 약 500m나 되는 작지가 나온다.

세월의 풍화를 곱게 탔는지 자갈들은 작고 둥그렇다. 키 낮은 파도를 따라 차르르 차르르 밀리는 자갈 소리가 경쾌하다. 걸을 때마다 처르륵 처르륵 무너져 내리는 자갈밭의 촉감도 유쾌하다.

작지가 끝나자 이번엔 모래바탕이다. 모래바탕 사이론 밀물이 작은 골짜기를 이뤄 바다로 내려오고 있다. 섬 아이들은 갯물에 실컷 멱을 감다 지치면 이 밀물로 짠내를 털어내고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 여름 지치지 않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여지껏 들려온다.

모래바탕 옆엔 조개무지 터가 있다. 주로 굴 껍질로 보이는 조개껍질 무덤은 껍질의 상태로 보아 100년을 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 고운 조개껍질 몇을 골랐다. 명주실로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그대에게 선물하고 싶다.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해무가 많이 걷혔다. 작지에 서 바다를 보니 주변의 섬들이 오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다정하다. 예나 지금이나 해전(海戰)에서 섬은 매우 효과적인 자연 엄폐물이다. 명량해전에서 기적처럼 승리한 이순신도 다시 휘몰아치는 왜군 함선을 피해 여기 당사도로 진을 옮겼었다. 그날은 1597년 9월 16일(양력10월 26일)이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그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작지를 지나자 모래바탕이다.
 작지를 지나자 모래바탕이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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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망군이 들어와 알리기를 적선이 무려 200여척이나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향해 오고있다고 했다...(중략) 배위의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는데 낯빛을 잃었다. 나는 '적이 비록 1000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를 바로 잡지는 못할 테니 절대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라고 말했다...(중략)

천행(天幸)이었다. 천행이었다. 우리를 포위했던 적선 30척도 물리치니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들어와 범하지 못했다. 이곳에 머무르려고 했으나 물이 빠져 배 대기가 적당하지 않았다. 건너편 포구로 진을 옮겼다가 달빛을 타고 당사도로 옮겨서 밤을 지냈다."

천하의 명장 이순신도 명량에서의 승리를 "천행이었다"고 두 번에 걸쳐 적었다. 그만큼 기적 같은 승리였다. 20척도 안 되는 배로 200여 척에 가까운 적의 함대와 맞서 싸워야 할 만큼 빈약한 전력을 확보하고 있던 이순신. 그는 복수를 다짐하며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몰려오는 왜군 함단을 피해 명량을 떠나 당사도를 거쳐 위도를 지나 군산 선유도까지 올라가 진을 쳐야 했다.

이순신이 세계 해전사에서 3대 명장으로 평가받는 것은 치밀하게 현실을 판단해서 냉정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한 번의 승리에 우쭐거리며 명량에 진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조선 수군은 다시 천행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달빛을 타고 당사도로 진을 옮겨온 그날 밤, 이순신은 무슨 생각을 하며 밤을 지새웠을까. 이순신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해인 1598년 음력 시월 어느 날의 <난중일기>는 단 한 줄이다.

"맑다."

 작지를 지나면 조개무지가 나온다.
 작지를 지나면 조개무지가 나온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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