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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상점을 홍보하는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서울풍물시장입구 장인상점을 홍보하는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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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거친 뉴스 방송 소리와 뒤섞인 트로트 노래소리, 그리고 은은한 한약 냄새까지. 22일 오후, 점심시간이 다 되어 도착한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서울풍물시장의 공기는 부산하고 텁텁했다. 오밀조밀 이어진 상점들, 그 상점 안에 쌓여있는 수많은 물건 때문인지 건물 내부는 외관보다 작아 보였다. 그 작은 공간들 속에 '노트북 장인' 이철우(78)씨의 일터가 있다.

'초록동 90호'. 노란색 '모범점포' 명패를 단 이철우씨의 상점은 입구부터 노트북으로 가득하다. 선반부터 상점 전 벽면을 이루는 책장까지, 각종 노트북이 세로로 반듯이 정리되어 있다. 작업하는 책상에는 수리를 기다리는 노트북도 여럿이다.

상점을 찾은 손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이철우씨
▲ 손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이철우씨 상점을 찾은 손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이철우씨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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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우씨는 올해 서울풍물시장 활성화 사업단이 '장인 상점'으로 선정할 만큼 오랫동안 이 일을 해왔다. '장인 상점'은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수십 년간 외길을 걸어온 풍물시장 내 장인들을 소비자와 손쉽게 연결하기 위한 사업이다. 시계 장인, 가죽 장인, 악기 장인 등 총 7명의 장인 중에서 '노트북 장인' 이철우씨는 유독 눈에 들어온다. 노트북 수리라고 하면 보통 기업 A/S 센터를 떠올리기 마련이라, '장인'이라는 표현이 생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고 노트북은 물론 새 노트북까지 척척 수리

"글쎄 다들 그렇게 말하지요.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고. 같은 영감들도 어떻게 나이를 드신 분이 이걸 하냐고,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다고 그럽니다. 그렇게 쉬운 게 아닌데 어떻게 다 뜯어 고치느냐고요."

'장인'에게 노트북을 수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냐는 질문을 하자 이런 물음이 익숙하다는 듯 답이 돌아온다. "하려고 노력하면 된다"는 모범생 같은 문장도 덧붙인다.

이철우씨는 노트북에 대해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다. 틈틈이 인터넷으로 노트북 부품들을 익히고, 다양한 수리 방법을 공부했다. 필요할 때는 이쪽 분야를 먼저 공부한 전문가에게 묻기도 했다. 인터넷과 전문가가 알려주는 방법으로도 잘 풀리지 않을 때는 혼자 노트북 수리 방법을 연구했다. '하려고 노력하면 다 된다'는 그 마음가짐으로 하니 전문가도 몰랐던 새로운 수리 방법을 찾아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새 노트북이나 중고 노트북이나 내용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요. 메인보드나 이런 것들, 작동하고 있는 구조가 거기서 거기예요. 그러니까 (계속 새로운 노트북이 나와도) 고칠 수 있는 겁니다."

매일 새로운 노트북을 마주하다 보니 이철우씨가 다룰 수 있는 노트북의 폭은 넓다. 이른바 '486 컴퓨터'라고 불리는 노트북부터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8 운영체제를 탑재한 최신형 노트북에 이르기까지. 책장 가득한 3600여 대의 노트북들은 그야말로 '부품 은행'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모두 비슷해 보이는 노트북일지라도, 제조사와 노트북의 성능을 기준으로 분류한 것이다.

이철우씨 상점에 진열된 노트북 용품들
 이철우씨 상점에 진열된 노트북 용품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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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우씨를 찾는 손님들은 주로 오래된 노트북을 가진 이들이다. 손님이 가져오는 노트북은 기업의 A/S센터나 전자상가에서도 부품이 없거나 많은 비용을 들여야 한다며 손사래 치는 제품이 대부분이다. 노트북과 같이 비교적 교체주기가 빠른 전자제품을 수리까지 해가며 사용하려고 하는 손님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거는 지금 나올 수가 없어요. 펜티엄4. 옛날 '486 컴퓨터'라고 하는 거예요. 이런 노트북을 지금도 찾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이 중요하거나,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디스켓을 넣어서 확인하는 경우도 있고요. 지금도 불이 들어오고 다 (작동) 해요."

또 국내 A/S센터가 없는 외국 기업의 제품도 이철우씨 손에 들어온다. 이날도 이철우씨의 책상에는 장인 상점 사업을 통해 신청 받은 외국 기업의 노트북이 수리를 마치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문을 들어 알음알음 찾아오는 이들은 한번 수리를 맡기고 나면 꾸준히 찾아온단다.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휴일에도 '결근'이 없다는 이철우씨의 원칙 또한 손님들이 꾸준히 그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오래된 노트북을 꺼내보는 이철우씨
▲ 오래된 노트북을 꺼내보는 이철우씨 오래된 노트북을 꺼내보는 이철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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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노트북과 함께해온 것 같은 이철우씨도 노트북만을 다루었던 것은 아니다. 이철우씨가 지나온 시간들은 최근 흥행하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의 삶과 닮아있다.

"1957년도에 충청도 시골에서 서울로 와서 처음에는 경향신문사에 식자공(활판 인쇄를 할 때 골라 뽑은 활자를 원고대로 판에 꽂는 직공, 고려대한국어사전)으로 다녔어요. 그러다가 문득 앞으로는 신문사에 근무하면 안 되겠고, 기술 분야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전기산업 쪽으로 갔지요. 그때는 대한민국에서 콘센트, 스위치 이런 것도 못 만들고 수입해서 쓸 때였어요. 우리나라의 최초 콘센트, 스위치를 우리가 만들었지요."

그 후엔 월남에 파병을 두 번이나 다녀오고 상사로 제대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중동으로 나가 아파트나 에너지 컨트롤 센터를 지을 때 전기 설비 관련 일을 하기도 했다. 1986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가로등 설치 등의 외선공사를 하는 전기공사업에 손댔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나는) 복잡한 사람이에요. 알고 보면 너무 복잡한 사람. 득이 없는 일을 해서 부끄럽지요. 가진 것도 없고. 원래 그래서 면담(인터뷰) 같은 거 하기 싫고, 답변하기 싫다고 그러는 건데 직접 찾아왔으니..."

노트북이 가지런히 놓여져있는 이철우씨의 상점
▲ 노트북과 이철우씨 노트북이 가지런히 놓여져있는 이철우씨의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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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에 덕수가 있다면, 서울풍물시장엔 이철우가 있다

이철우씨가 서울풍물시장에 자리를 잡게 된 것도 두 번의 이주를 거친 후에야 가능했다. 그가 처음 상점을 시작한 것은 서울 중구 황학동 시장에서였다. 다른 사람에게 점포를 맡기고 텔레비전 확대경을 판매했다.

"황학동 도로에서 장사를 했어요. 상인들이 1986년도부터 하나둘씩 모였지요. 물론 1985년도에서도 있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한 건 1986년도 봄부터라고 기억합니다. 도로, 인도에 물건을 놓고 장사를 하다 86년 아시안게임 때문에 공사를 중단시키고 깨끗이 치우는 바람에 못했고, 아시안게임이 끝나자마자 그 도로에서 장사를 했던 거지요."

하지만 2004년, 청계천 복원 사업 진행으로 인해 터를 잡아 놓았던 황학동 시장에서 동대문운동장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08년에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으로 인해 지금의 자리인 신설동 서울풍물시장에 정착했다.

"많이 불편했지요. 불편했고... 여기서는 장사가 안 돼요. 최소한 청계 8가 쪽은 가야 하는데, 너무 빠져나와 있기 때문에. 여긴 옛날에 주택지였거든요. 중학교 자리였고. 중학교가 이사하고 비어있는 자리에 이쪽으로 해놓은 건데, 장사가 안돼요. 나보고 '아이고 어르신은 걱정 안 해도 돼요' 하는데 천만의 말씀. 장사가 안되는데 걱정이 안될 리가 있나. 걱정되지..."

내내 질문을 받으며 지나온 삶의 기억을 풀어내던 이철우씨가 문득 기자에게 "몇 살까지 할까?"라며 질문을 던진다. 하실 수 있는데 까지 쭉 하셨으면 한다고 말하니, 요즘 듣는 노래라며 노트북으로 동영상 하나를 튼다. 제목이 <백 세 인생>이라는 트로트인데, 생각보다 노래가 너무 짧아 별로라는 말을 덧붙인다. 돌고 돌아 이곳에 정착한 이철우씨에게, 어쩌면 백 살이라는 상징적인 나이는 그리 길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냥 하다가 힘 모자랄 때까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지요."

노래를 듣던 이철우씨가 웃으며 말한다. 하나씩 꾸준히 모아둔 수천 대의 노트북, 이철우씨를 찾는 단골들 그리고 황학동 시장, 동대문운동장에서부터 동고동락해온 동료 상인들이 함께라면 이철우씨는 그 자리를 오래도록 지키고 있을 것이다.

이철우씨는 초상화 앞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자, 멋쩍은듯 초상화의 위치를 안쪽으로 옮겨야겠다고 말했다.
▲ 가게에 전시된 이철우씨의 초상화. 이철우씨는 초상화 앞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자, 멋쩍은듯 초상화의 위치를 안쪽으로 옮겨야겠다고 말했다.
ⓒ 청춘시장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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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서울풍물시장, #노트북장인, #장인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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