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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산골마을 겨울풍경
 지리산 산골마을 겨울풍경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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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산골마을 겨울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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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실에서 알려드립니다!... 버섯종균 신청하실 분은 오늘...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착오가 없으시도록... "

이장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기상나팔처럼 잠을 깨웠다. 나는 희미한 꿈자리 끝에 매달려 마을방송을 들으며 몸을 뒤척였다. 들춰진 이불자락 밑으로 찬 공기가 파고들었다.

지리산 겨울이 춥다. 툇마루에 나서면 아래윗니가 딱딱 맞부딪치게 몸이 떨린다. 나는 땅도 대기도 꽁꽁 얼어붙은 영하의 지리산자락에서 네 번째 겨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 번째 겨울을 나고 있다.

사실 이번 겨울 추위는 혹한이라고 할 만큼 매섭지가 않다. 그런데도 겨울나기가 만만찮다. 지난겨울에 열대나라를 다녀와서 그런가. 적응이 안 된다. 군불을 부지런히 지피지 않으면 얼어 죽겠다. 워낙 추위에 약한 체질이다 보니.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문화회관에서 마을총회가 있으니 한 분도 빠짐없이..."   

새벽 4시 40분에 찾아온 이장님... ""빗자루 들고 나오세요!"

문득, 4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이 마을로 이사를 온 지 사흘째였나, 나흘째였나. 짐 정리하랴 정신없을 때였으니. 여름날이었다. '계십니까?' 잠결에 들은 소리였다. 비몽사몽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툇마루 앞에 이장님이 서 계셨다. 

"빗자루 들고 나오세요! 다들 나와서 마을청소하고 있어요. 우리 마을과 자매결연 맺은 서울 사람들이 방문하는 날이에요. 나와서 청소하라고, 방송을 몇 번이나 했는데 왜 안 나와요? 마을 일에 협조적이어야 합니다."
"아, 예, 예... 죄송해요. 자느라 방송을 못 들어서... "

당장 비틀비틀 뛰쳐나갔다. 집 앞길을 쓸었다. 잠이 덜 깨어 꿈인지 현실인지 휘청휘청... 날은 훤한데, 도대체 몇 시나 됐나 싶어 시계를 봤다. 4시 40분!

나는 그만 확 열이 받쳤다. 혼자 비질을 하며 식식거렸다. 부당하게 혼쭐이 난 사람마냥 억울한 심정으로.

'너무 심한 거 아냐? 아니, 이 시간에... 새벽댓바람에 이게 무슨 중차대한 일이라고 자는 사람 깨워서. 새벽별보기 운동도 아니고... 아, 짜증나, 새벽 3시 넘어 간신히 잠들었는데... 시골텃세가 장난 아니라더니, 초장부터 기를 잡겠다는 거야, 뭐야?'

며칠 후, 나는 결국 동네 할머니들 앞에서 불끈거리는 그 속을 털어놓고 말았다. 물론 감정은 죽이고 살살 토로했다. 이장님이 심했네, 라는 반응을 기대하며. 옆집 할머니가 부르셔서 건너가 감자전을 먹는 자리였다. 몇 분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 그때가 4시 40분이었어요!"

내 말이 끝나자 할머니들이 뜨악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다. 곧 이구동성으로 입을 여셨다.

"이? 그때꺼지 자구 있었던 겨? 참말로, 해가 중천인 시간인디. 시방, 이사왔으닌께 이장이..."

나는 헤헤헤 계면쩍게 웃고 말았다. '늦게 잠들어서요...' 목소리를 낮추며 꼬리를 내렸다. 순간, 꿍했던 기분이 확 풀리는 거였다. 불끈거리던 속이 싹 식었다. 내 기우와 오해가 깊었다는 걸, 그 순간 거짓말 같이 깨달았던 것이다. 이곳의 시간과 정서가 도시생활에 길든 나의 그것과 다른 것뿐이라는 걸.     

어쨌든 나는 그 후로 줄곧 마을일에 비협조적이었다. 마을회의에는 아예 발길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장님이 또 찾아와 '당장 나오세요' 하지는 않았다. 누구도 '공동체의식'을 내세우며 어쩌니 저쩌니 잔소리하거나 타박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만 빼고 그렇다. 특히 겨울엔 더 심하다. 나를 만나면 할머니들의 성화가 높다. 마을회관에 오라며....  

3일 만에 마주한 아궁이... '마을회관에 내려가 밥 얻어먹을까'

 아궁이 불 지피기
 아궁이 불 지피기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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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땔감
 겨울 땔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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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방송도 끝났고 잠도 홀딱 깼다. 일어나야지 생각하면서 이불자락을 머리끝까지 올려 썼다. 방바닥이 다 식었다. 웃풍이 셌다. 춥다. 이럴 때 곰이나 오소리나 개구리 같은 변온동물처럼, 겨울잠을 잘 수 있다면 좋겠다. 땅 속에서든 나무 밑에서든 이불속에서든... 추위를 많이 타고, 추우면 게을러지는 나 같은 사람에겐 겨울나는 방법으로 딱 좋겠다. 활동시간을 보충하려면 대신 여름밤에 안 자는 거지. 

그런 망상에 젖어 마냥 누워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점점 몸이 얼어가는 것 같았다. 전기장판을 켜고 그대로 버틸까 하다가,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아궁이에 불부터 지폈다. 장작을 양껏 집어넣었다.

땔감이 많이 필요했다. 난방을 온돌로만 하는 오래된 한옥이라. 다행히 구들장이 두꺼워 한 번 때면 48시간 가까이 방이 지글지글 끓었다. 거기다가 고향 후배인 태준씨가 불쏘시개로 쓰라며 두 트럭이나 싣고 온 소나무 가지랑, 고모가 보내준 참나무 장작이, 이번 겨울에 때고도 남게 쌓여 있다.

문제는 땔감이 아니라, 추우면 게을러지는 내가 문제다. 산책을 때려치운 지도 한 달쯤 됐다. 어떤 때는 사흘이고 나흘이고 냉방에서 전기장판만 켜놓고 미련 맞게 버텼다. 잠바를 두 개나 껴입고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누워서 할 수 있는 짓만 했다. 소설을 읽었다.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소설이 질리면 별자리나 천문학 책들을 들춰봤다. 노트북으로 영화도 봤다. <언더 더 스킨> <우리 선희> <카트> <한공주> <보이후드> <부다페스트 호텔>... 

졸리면 아무 때고 잤다. 세수도 양치질도 안 했다. 배가 고프면, 한 냄비 가득 끓여놓은 김치국을 데워 밥 말아 먹고 다시 누웠다. 휴대폰도 꺼놓았다. 추위를 많이 타니 어쩌니 해도, 추위보다 게으름 때문에 더 맥을 못 차렸다. 그러다가 몸의 기능이 서서히 정지되어 정말 동면에 들 것도 같았다. 

오늘은 3일 만에 아궁이 앞에 앉았다. 뜨거운 불 앞에 앉아 몸을 녹이니, 배가 고파졌다. 마을회관에 내려가 밥을 얻어먹을까 말까...

"워떤 기술자가 끓였나? 호박죽이 맛나게 됐네!"

 동네 할머니들과 호박죽을 같이 먹다
 동네 할머니들과 호박죽을 같이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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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회관에서 호박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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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4시 넘어서였다. '안에 있어?' 누가 불렀다. 방문을 여니 옆집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툇마루 앞에 서 계셨다. 할머니는 90도로 굽히고 있던 허리를 숨차게 펴시며 다짜고짜 성화를 냈다.

"지금 싸게 나서! 같이 가자고! 호박죽 쒔어. 당번제로 하닌께 딴 생각 말구."

날 데려가려고 작정하고 오신 것 같았다. 마을회관으로 밥 먹으러 오라고 아무리 일러도 내가 말을 안 들으니. 미끄러운 길을 일부러 올라오신 거였다. 나는 어쩌지 못하고, 부리나케 따라나섰다.

마을회관에 들어서니 벌써 한 대접씩 호박죽이 돌고 있었다. 십여 명 넘게 앉아계신 할아버지들 방으로, 삼십여 명 앉아계신 할머니들 방으로 따로따로. 다들 한 마디씩 반갑게 내게 인사를 건네셨다. 할머니들 방에 한 자리 낑겨 앉았다. 

"선상님이 오시닝께 참말 좋구먼."
"내일도 꼭 와요, 이?"
"이, 내일은 거시기 걸게 차릴 판이여!"
"어서 먹어요. 모지러면 더 묵고... 여기, 짐치도... "
"워떤 기술자가 끓였나? 호박죽이 맛나게 됐네! 달달허니 지럴 겉네."
"겨울에는 매일 이렇게 모여서 점심, 저녁 해묵는디. 선상님은 와서 밥 먹으라 혀도 오지를 안 허니... 시방, 내일부턴 매일 오셔요, 이?... 말할 것도 읎어. 우리는 살맛나지!"
"글치? 매일 따땃한 방에서 이바구 떨고 놀다가, 졸리면 낮잠도 자고, 윷놀이도 하고, 건강체조도 배우고, 같이 즘심도 해 묵고, 저녁도 해 묵고, 찜질방에서 땀 빼고, 따땃한 물로 목깐도 허구... 이런 동네 여기 말구 읎어!"

겨우내 매일 두 끼씩 같이 먹는 사람들... "이따 저녁 꼭 먹으러 와요 이?"

 고드름
 고드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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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이랑 새알을 넣고 끓인 호박죽이 정말 맛있었다.

박해자 할머니랑 설거지를 같이 했다. 마을 일을 보는 사무장의 어머님이셨다. 

"나는 서울 토박인데... 아들 내외는 더 일찍 여기 와서 살았고, 영감이랑 나는 4년 쯤 됐나, 여기 온 지. 참 동네 좋아요. 공기 좋지, 물 좋지, 인심 좋지... 서울은 이웃이 없잖아. 여긴 이웃이 있어서 외롭지도 않고... 사람 사는 것 같아요."

마을회관 겨울 운영비가 궁금해 사무장에게 물어봤다. 남원시로부터 간식비와 난방비를 조금 지원 받는단다. 나머지 식비나 먹거리는 알아서 십시일반 모이는 대로. 식사준비는 70대 할머니들이 당번제로 돌아가며 준비하고. 80대 이상 할머니들이랑 할아버지들은 대접 받고.

마을회관에 딸린, 여덟 평 정도 되는 찜질방도 겨울에 운영한다. 홀수 날은 여자, 짝수 날은 남자가 이용한다. 한 달에 만 원만 내면, 15일은 쑥향기 맡으며 땀을 빼고,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할 수 있다. 다른 동네 사람들도 모여 밥을 해먹는다지만, 이 마을처럼 겨우내내 매일, 두 끼씩 그러는 곳은 없단다.

우리 마을 할머니들은 춥지 않겠다. 농한기를 그렇게 매일 매일 잔칫날처럼 보내고 있으니. 나는 겨울잠에 들, 엉뚱한 궁리나 하고 있는데.

어제 마을회관에서 호박죽을 먹고, 또 한 그릇 퍼주어 받아온 게 생각났다. 그 호박죽을 가져와 불 앞에서 먹었다. 그런데 게으름을 더 피우다간 정말이지 곰처럼 몸이 부풀거나, 털이 다 빠져버리는 건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체력이 떨어진 건 분명했다. 게으름도 추위도 떨쳐내고 몸을 좀 움직여야, 살아남겠다.  

호박죽을 먹고, 산책을 나섰다. 지리산신선둘레길 소나무 숲으로 걸어갈 작정이었다. 겨울햇살이 눈부셨다. 맑고 시린 공기가 상쾌했다. 깨끗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걸었다. 며칠전 소복이 내렸던 눈은 그새 다 녹았다. 음지만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어 길이 미끄러웠다.

산 초입에서 송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내게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며, 한 마디 더 덧붙이셨다.
    
"시방, 오늘 점심 먹으러 왜 안 왔대? 이따 저녁은 꼭 와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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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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