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사물과 사람이 모두 정지된 상태로 지면이나 화면 위에 남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사진을 보고서, 각각의 장면이 길고 긴 시간의 어느 지점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순간들이 차곡차곡 이어지면 곧 세상의 흐름과 누군가의 삶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사진집 <멈춰버린 세월>에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순간이 담겨있다. 2013년 11월부터 2014년 11월까지, 지난 1년 동안의 기록이다. 사진가 좌린의 카메라 렌즈가 향한 곳은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신드롬부터 철도노조 파업 현장과 세월호 참사로 이어진다. 여기에 편집자 꼼마의 글이 더해졌다.

사진과 글로 담은 1년간의 기록

사진집 <멈춰버린 세월>의 표지.
 사진집 <멈춰버린 세월>의 표지.
ⓒ 아마존의 나비

관련사진보기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학교에는 '하수상한 시절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대자보가 붙었다. 국정원 대선개입과 철도 민영화 논란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가 버무려진 글에 큰 호응이 이어졌다. 답답함과 안녕하지 못함을 각계각층에서 고백하는 대자보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책의 본문은 당시의 상황을 압축하는 사진과 함께, 이제는 서로에게 안녕조차 묻기 힘들어진 오늘의 현실을 돌이켜본다.

2014년의 사건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세월호 참사'다. 아이의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김밥 한 줄로 끼니를 채우는 아버지, 청와대 인근 효자동에서 도로에 나앉은 유족들, 그 앞을 둘러싸고 선 경찰 병력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하나씩 보이는 사진들이 읽는 사람에게 가슴 아픈 상황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때로는 가까이서 바로 곁에서 보듯이, 때로는 멀리서 풍경을 조망하듯이 촬영된 사진들로 가득하다.

이 책은 사진으로 담은, 한국 사회가 보여준 1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다양한 사진과 사안마다 꼼꼼한 시선으로 적은 꼼마의 글이 뒤따른다. 특정한 날의 기억들을 읽다 보면, 꼭 누군가가 쓴 사진일기를 보는 듯도 하다. 혹은 담백한 어조로 쓰인 글에서는 마치 사진의 해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식 잃고 찬 바닥에서 딸의 영정을 안은 채로
김밥을 우겨넣어야 하는 아비의 마음을
나는 기필코 헤아릴 수가 없다.
아비가 된다는 건 그런 것이구나 했다.
자식을 지킬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이제 살아남아서, 그 이유를 밝혀야 하는 일이다.(본문 123쪽 중에서)

<멈춰버린 세월> 125쪽 '장벽(2014년 5월 9일, 서울 청운효자동)'
 <멈춰버린 세월> 125쪽 '장벽(2014년 5월 9일, 서울 청운효자동)'
ⓒ 좌린 제공

관련사진보기


생생한 현장의 분위기를 사진으로 압축하고, 그 안에 녹아있는 감정을 돋보기처럼 문장으로 다시 풀어낸다. 그렇게 당시 그 곳에 있지 않았던 사람까지도, 그 날의 상황과 감정을 실감나게 전달받을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효자동 도로 위에서 차가운 김밥을 입 안에 밀어넣으며 그보다 더 차가운 현실을 마주한 아버지의 심정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을까 싶지만.

퍼즐처럼 재구성한 2014년 한국 사회의 모습

아프고 무거운 기억들이 그렇게 퍼즐 조각처럼 천천히 맞추어진다. 그러다가도 세월호 생존 학생과 부모들이 행진하는 사진에서는 다시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며, 지지부진하던 세월호 특별법에 안산부터 국회까지 걷는 사람들. 그리고 이를 바라보면서, 울며 박수를 치는 시민들의 모습까지 한 컷에 담겼다. 꼼마의 글처럼, 울면서 박수를 치는 광경이 어디 그리 흔한 일이던가.

<멈춰버린 세월> 175쪽 '응원(2014년 7월 16일, 서울 영등포)'
 <멈춰버린 세월> 175쪽 '응원(2014년 7월 16일, 서울 영등포)'
ⓒ 좌린 제공

관련사진보기


아이들은 일일이 시민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살아줘서 고맙다고 시민들이 울었고,
살아남은 게 죄가 된 아이들이 미안하다고 울었다.(본문 175쪽 중에서)

어쩌면 책의 제목처럼, 2014년 4월 16일 이후부터 한국의 세월은 멈춰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시스템의 부재로 304명의 생명이 차가운 바다속에서 식어버렸고, 추모의 행렬마저 '의도'를 의심받고, 진실규명을 위해 단식을 시도한 유가족조차 '불순한 사람' 취급받던 상황들을 떠올려보자면 말이다. '아이들을 살려달라'던 간절한 외침은 선거철을 맞아 '대통령을 구해달라'는 구호에 묻혀버리지 않았던가.

<멈춰버린 세월>은 2013년 11월 헬기 추락사고로 시작하여, 최근 사고가 연이어 발생하는 제2롯데월드 빌딩이 안개 속에 가려진 모습으로 끝맺는다. "이 작은 책자는 그런 안개 속의 신음에 대한 작은 기록이다"라는 머릿말처럼, 자욱한 안개 속 풍경같은 오늘날 현실을 사진과 글로 재구성한 셈이다.

"휘발하는 마음의 일들을 그나마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좌린은 긴 시간을 거리에서 보냈고, 때로는 언론사보다 발빠르게 사진을 촬영하여 SNS에 전송해왔다. 이를 집약한 <멈춰버린 세월>은 '사라진 사람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한 기록인 것이다.

"헛되고 부질없을 수 없기에 사진을 찍었고, 덜 아프고 싶었기에 절망에 빠진 유가족들을 지켜 보았고, 더 나아가고 싶었기에 기록을 책으로 엮기로 했다"는 저자의 말이 무겁게 와닿는다. 소리없이 먼지 쌓이며 잊혀질 기억을, 이렇게 사진으로 남겨 다시 볼 수 있게 해준 것은 분명 뜻깊은 일이다. "공감의 기억은 희망이 된다"던 인권운동가 박래군씨의 한마디를 떠올려 본다. 이 사진집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지난날의 아픔과 의미를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멈춰버린 세월> 124쪽 '종이배(2014년 5월 9일, 서울 청운효자동)'
 <멈춰버린 세월> 124쪽 '종이배(2014년 5월 9일, 서울 청운효자동)'
ⓒ 좌린 제공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멈춰버린 세월> (꼼마 글, 좌린 사진 / 아마존의나비 / 2014. 12. 1. / 13400원)



멈춰버린 세월 - 사라진 사람들과 살아남은 사람들

주하아린 지음, 아마존의나비(2014)


태그:#멈춰버린 세월, #세월호 참사, #좌린, #꼼마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