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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일을 맞아 최용신 선생 묘소에 헌화하는 어린이
 기일을 맞아 최용신 선생 묘소에 헌화하는 어린이
ⓒ 김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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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선생 순국(1935.1.23) 80주기를 맞아 경기도 안산 최용신 기념관과 최용신 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왔다.

최용신 선생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은 소설보다 더 감동적인 삶을 살다 가셨다. <상록수>가 발표되자(1935) 샘골 주민과 최용신 선생의 지인들은 크게 반발했다. "선생의 눈물 나는 애국애족의 헌신적인 생애를 한낱 남녀 간의 사랑으로 격하했다"는 불만이었다.

당시에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비밀집회를 이어가던 성서조선의 김교신, 함석헌, 류달영 선생과 다석 유영모 선생 등은 최용신 선생의 삶과 정신에 크게 감동했다. 그리하여 선생의 생애를 역사 기록물로 써서 후대에 민족의 자산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1939년 <최용신 전기(류달영, 성서조선사)>를 발간한다.

당시는 태평양전쟁의 광풍이 몰려오던 시기로 최용신 선생의 전기 출판은 감옥행을 감수해야 하는 결단이었다. 실제로 전기 출판 이후에 최용신 전기는 모두 압수돼 불태워지고 출판 관련자는 물론 장기려 박사 같은 독자들까지 모두 감옥 신세를 지게 된다. 해방 이후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광복 50주년에 최용신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했다.

최용신 선생
 최용신 선생
최용신 선생은 대학 교육까지 받은, 대단한 '갑'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장 낙후된 농촌 마을(현재의 안산시 본오동)에 들어가 사회적 약자인 주민과 동고동락했다. 최용신 선생은 힘든 농사일도 함께 거들고​ 어린아이는 물론 부녀자, 어른들에게 한글 교육을 했다. 주색잡기 추방운동, 생활개선 사업 등의 정신운동과 누에고치 치기, 감나무 같은 유실수 보급, 협동조직인 구우계도 조직해 경제향상 운동도 펼쳤다.

하지만 일제는 한글 교육과 경제개발, 의식개혁운동을 정신적 독립운동으로 판단, 큰 위협으로 느켰다. 결국 최용신 선생을 경찰주재소나 수원경찰서로 호출해 위협하며 심한 구타와 여성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성고문까지 자행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밤낮 없이 일하던 최용신 선생은 결국 과로로 쓰러져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절명하셨다.

비록 샘골이라는 한 농촌 마을에서의 조그만 규모였지만 그 정신은 소설(상록수), 최용신전기의 문학작품, 영화 등으로 승화되어 국민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최용신 선생의 사회애, 민족애, 헌신적인 이웃 사랑의 정신, 경제개발, 개척 정신과 공동체 문화를 오늘에 되살린다면 최근 불거지는 우리 사회의 '갑질 문화', 물질중심의 가치관 붕괴를 바로잡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표, 사회정화의 지침이 될 것이다.

최용신 선생의 기일을 맞아 묘소에 참배하는 지역주민
 최용신 선생의 기일을 맞아 묘소에 참배하는 지역주민
ⓒ 김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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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최용신 선생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제가 운영하는 최용신추모블로그(blog.naver,com/kmo21)에 있습니다.



태그:#최용신, #상록수, #심훈, #안산시, #샘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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