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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7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편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 기자말

오전 열 시경에 한 동네에 들려 식사를 하고 쉬었다. 경찰에서 연락이 있었는지 주민들이 친절히 대해주고 밥도 많이 주었다. 우리는 배불리 먹고 나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어 마을에서 쉬게 되었는데 "여기가 어디오?"하고 물으니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교원리'라고 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경찰들은 우리를 보고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하루를 쉬게 되었다. 주민들도 "매우 반갑소. 6·25때 인민군으로 나와 고생을 하고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자유대한의 품으로 돌아와 우리의 형제가 되었으니 이제 당신은 살았소"라고 위로해 주었다.

교원리는 6·25 때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은 행운의 마을로 나주군에서 피해가 가장 적은 마을이라고 했다. 다들 좌익, 우익하며 서로 죽이는 살상이 유독 교원리에서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복 받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들은 논의 벼를 보며 "나주 들판에선 벼가 잘 되면 이만큼 자라지요. 그리고 쌀도 질이 좋아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랍니다"라고 고향 자랑을 했다. 그곳 사람들이 하는 말이 사실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시골 사람들의 순박함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이튿날 비가 와서 떠나지 못하고 하루를 더 묵었다. 첫날 밤 잠을 자는데 빈대가 자꾸 달려들었다. 밤이 되니 빈대가 기어 나와 몸을 물기 시작하였다. 간신히 잠이 든 후 날이 새고 보니 내 옆에 죽은 빈대 몇 마리가 보였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빈대를 치워 버렸다.

그 다음 밤에는 첫날과 달리 빈대가 내 옆에 오질 않았다. 다른 사람은 빈대에 물려 가렵다고 난리인데 나는 멀쩡했다. 아침이 되어 보니 지난번처럼 내 옆에 죽은 빈대 몇 마리가 또 다시 눈에 띄었다. 그 때 빈대가 나를 물면 오히려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다.

전라남도 영광을 향해 길을 떠났다. 우리의 목적지가 바로 영광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튿날 저녁에 영광읍에 도착했다. 영광읍 영광군청 소재지에 천여 명이 모였는데 거기서 각 군으로 분산 시킨다고 하였다.

"육이오로 우리 마을에서만 열 명 넘게 죽었소"

한국전쟁 무렵의 한국 산골마을 한 초가집
 한국전쟁 무렵의 한국 산골마을 한 초가집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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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라남도 해남군에 배치되었는데 안내원이 우리를 보고 웃으며 "해남이라는 말을 들어봤소?" 라고 물었다. 해남이 한반도 최남단이라고 하였다. 안내원은 "산 좋고 물 좋은 해남, 생선이 풍부한 해남, 인심도 좋은 해남으로 갑시다"하며 우리 일행을 두 대의 트럭에 태웠다. 

차를 타고 가며 뒤를 돌아보니 우뚝 솟은 월출산이 굉장해 보였다. 트럭은 바다를 등지고 남쪽으로 달렸다. 길가의 산들은 헐벗어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인근에는 군데군데 초소가 보이고 총을 든 군경들이 지키고 있어 말로만 듣던 빨치산 투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이 실감났다.

우리를 실은 트럭들은 저녁 어둠속에서 서쪽으로 바다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며 산과 들을 지나 한참을 더 달린 끝에 해남군청에 도착했다. 차가 해남군청에 머무는 동안 옆에서 무전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또 누군가 부르는 노래 소리도 들려왔다. 

'비바람도 태산맥도 돌 바위로 부수는 튼튼한 강철 남아 고함소리 듣느냐? 말하지 못하면서 죄도 없이 쓰러진 그리운 부모 형제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부모 형제 생각이 났다.

저녁 식사를 한 후 일행 중 50명은 계곡면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차를 타고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성진리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쉬었다. 다음 날은 모두 함께 잠두리로 가서 하룻밤을 더 머물었다.

잠두리 구장님은 성이 함씨로 키가 크고 덩치도 좋은 분이었는데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우리는 구장댁에서 투숙하였는데 구장 동생이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그는 목포고등학교에 재학중이라고 하였는데 6·25 때 학교 선생님 가운데 좌익에 가담하였다가 죽은 선생님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반공포로가 동네에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동네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구경삼아  모여 들었다. 그들은 나에게 이북에선 어떻게 사냐고 물었다. '공산주의는 정말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재산도 빼앗는지? 여자도 강탈하고 아버지 보고 동무, 엄마 보고도 동무라고 부르는지? 대한민국 정치보다 나쁜지?' 등을 묻는 것이었다. 나는 이북에서 본 대로 겪은 대로 설명해 주었다. 그랬더니 "사실 이 말이 맞을 거야"하는 사람, 내 말에 냉담한 사람, 비웃는 사람 등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그런데 원한에 찬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이 마음에 걸렸다.

이튿날 황해도 벽성에 사는 친구들은 잠두리로, 나는 만년리로 가게 되었다. 만년리 동네 뒤에는 큰 저수지가 있었고 그곳의 물로 그 근방 논과 벌판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그런데 동네 아이들이 빨치산 노래, 적기가, 장백산 등의 노래를 마음대로 부르는 것을 보고 '어떻게 이곳에서 저런 노래를?' 하고 깜짝 놀랐다.

나는 그날 저녁 때 아이들한테 동네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하는 말이 "육이오 전쟁 때는 동네에서 열 명이 넘게 좌익으로 몰려 죽었어요. 어젯밤에 아저씨하고 얘기하던 아무개는 빨치산에서 귀순한 사람이고 아무개는 다리 병신이 되었는데 빨치산에서 귀순해 경찰한테 매 맞아 병신이 되었답니다"라고 했다.

다음날 나는 계곡면 지서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이 동네가 마음에 안 드니 다른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내 말을 들은 사찰계는 웃으면서 "여기는 다 그런 곳이요. 그렇다고 그 동네서 신변에 위험을 주거나 하진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가 계시오. 아이들이 이북 노래를 부른다고 아무 걱정할 것 없어요"라고 나를 안심을 시켰다. 나는 할 수 없이 만년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날부터 나는 마음을 바꿔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로 마음먹었다.

계곡면은 길이가 사십 리이고 너비가 오 리에서 넓은 곳은 십 리 정도였다. 영암군과 북쪽에 산을 경계로 하고 남쪽에는 바다를 면하고 있어 땅이 비옥하고 물도 좋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성진리에서 잠두리에 이르기까지 주로 논이 많고 밭은 적은 편이라 생활이 어느 정도 괜찮아 인심도 풍부하고 인정도 많은 순수한 농촌이었다. 그런 곳이 좌익, 우익 충돌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나는 4월부터 농촌 일을 도와주었다. 보리도 걷어내고 논의 모를 꽂는 일을 했다. 하루는 빨치산에 있었다는 이씨가 나한테 놀러왔다. 나는 "이 선생이 빨치산에서 투쟁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라고 했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하고 물었다. 나는 "면에서 이리 올 적에 동네에 대해서 다 알고 왔어요. 그러니 숨길 필요 없어요. 공산주의에 대해 이해를 하니까요"라고 말하니 "그러냐?" 하면서 나를 허물없이 대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회상했다.

"나는 일본서 공부를 하면서 살았지요. 나는 해방되어 한국에 돌아왔는데 우리 민족이 해방되어 자주독립을 외치며 기뻐할 때 나도 기뻐했습니다. 해방 후 이남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내 마음이 돌아섰지요. 부정과 부패가 일어나는 걸 보고 '오직 이 나라 이 민족이 살 길은 공산주의밖에 없구나' 생각하고 그 길을 택하게 되었어요. 고국에 돌아와 관료들이 하는 짓을 보니 정이 떨어졌고 앞으로 조국의 희망은 오직 사회주의 건설밖에 없고 남한의 자본주의는 멸망 밖에 남은 것이 없는 하룻거리로 밖에 안보였어요.

나는 백운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계속하다가 공산주의 사상에 환멸을 느껴 자수하기로 결심하고 기회를 틈타 산을 탈출해 내려왔지요. 무장을 버리고 하산하여 민간인으로 변신하여 광주에 왔어요. 지서에 자수해도 죽이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고민하다가 광주 경찰국으로 가서 자수하였는데 경찰국장이 좋은 사람이었지요.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하면서 "과거의 모든 건 묻지 않으니 자유 대한을 위해 일해 달라"하며 격려해주었지요. 그러면서 "만약 집에 가서도 경찰들이 과거를 물어 괴롭히면 수시로 연락하라. 신변을 내가 보장하겠소" 했어요.

해남경찰서를 들려 집에 온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었어요. 지금은 참 편안히 잘 있지요. 그때 만일 전투 경찰이나 군인들에게 자수했다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나는 그의 말에 의아해 하며 그 때는 자수해도 죽였냐고 되물으니 1950년에서 52년까지는 자수해서 살았다면 기적이라고 대답했다. 좌익으로 몰리어 죽은 사람들 중에는 공산주의가 좋아 악질 노릇을 하다 죽은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때 환경에 순응하다가 '혹시나 자수하면 살려주겠지'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수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이 매우 불쌍하게 여겨졌고 그 가족에 대해서도 동정이 갔다.

"육이오로 우리 만년리에서만 열 명이 넘게 죽었어요. 공산군에게 점령당한 뒤에 '민청동맹에 들라, 여성동맹에 들라'해서 단지 살기위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대한민국을 배반하고 공화국을 위해 일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이 시키니 그대로 했을 뿐이지요. 그 후 다시 경찰이 들어와 민청에 가입한 사람, 여성동맹에 가입한 사람, 나가 일을 도와준 사람을 모조리 불러 쏘아 버리니 우리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지요. 우리 동네만 그런 줄 아시오? 전쟁통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은 줄 아시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해남 생활에 적응하다

다음날부터 나는 보리 추수도 도와주고 논농사도 거들어 주었다. 논에서 모내기를 하노라면 참때나 점심 때가 되면 보리밥에 큰 깡다리 한 마리씩 밥그릇에 얹혀 주었다. 나는 처음에는 잘 먹지 못했으나 곧 익숙해졌다. 질깃질깃한 살을 입으로 물어뜯으며 먹는 밥이 참으로 별미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농민들이 먹는 음식은 건강상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밥과 생선 절인 것 모두 영양가가 풍부해 보였다. 밥 한 그릇을 비우고 찬으로는 깡다리 한두 마리를 먹었을 뿐이지만 단백질과 지방질이 그만하면 충분하였다. 

참두리와 만년리에서는 논과 밭이 많이 묵혀지고 있어 밭에 참외가 누렇게 익어 가는데 이것을 내다 팔려 해도 팔 수 없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땅 임자들이 6·25 때 많이 죽거나 전쟁으로 인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앞집에 사는 사람은 눈앞의 먹거리를 놔둔 채 호떡 장사를 했는데 밀가루 한 포대를 가지고 800개를 만들어 팔아야 수지타산이 들어맞는다고 했다.

우리는 김을 맬 때가 되어 논을 매고 밭을 매기도 했다. 가끔 시간이 있으면 배를 타고 따라가 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다. 나는 만년리에서 두 달간 있으면서 그 지형을 익히고 지방 사람들의 인심과 풍습을 알 수 있었다. 다들 순진하고 소박하고 인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농촌이었다.

계곡면 북으로는 영암군을 경계로 하고 물 건너는 마산면. 동쪽으로는 옥천면, 서쪽으로는 미암면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곳곳에 저수지가 있고 논이 비교적 많아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었다.

옥천면도 옥천 분지를 중심으로 땅이 비교적 넓고 살기 좋았다. 문내면 황산면은 논은 적으나 해산물이 많아 그 나름대로 살 만한 곳이었다. 해남군은 강원도의 군만큼 면적이 크지는 않았지만 남쪽지방 군 치고는 면적이 큰 편이었다. 산은 높고 많았지만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많은 것에 나는 놀랐다.

하루는 동네에서 돼지를 잡았는데 백씨라는 사람이 돼지 뒷다리를 들고 그것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어깨에 둘러메고 다니면서 "붉은 깃발이 날린다" 하면서 소리 지르는 것을 보고 모두 재미있어 했다.

나는 마을 뒤쪽에 있는 저수지에 가서 멱을 감기도 하면서 수심을 보니 무척 깊었다. 물이 맑아 헤엄치는 물고기도 훤히 보였는데 참고기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에는 왕종게와 참종게도 있었다. 

땔감은 산에 나무가 없어 사람들이 그날그날 산에 가서 억새풀을 베어 말려 불을 때었다. 집이 낮고 굴뚝 없이 살고 있고 집은 모두 까맣게 그슬려 있는데 왜 굴뚝이 없냐고 물었더니 굴뚝에서 연기 나는 것을 보면 떡 해 먹는 줄 알고 얻어먹으러 올까봐 굴뚝을 없앴다고 했다.

나는 훌태를 들고 보리를 훑기도 하고 김도 매고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나는 잠두리와 만년리에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전라도 풍습을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여자들이 소리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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