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너먼트에 접어든 2015 호주 아시안컵이 시작부터 조별리그와는 정반대의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조별리그까지 강호들이 큰 위기 없이 무난히 8강에 선착했고 24경기 동안 무승부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면, 8강 토너먼트에서는 4경기 중 3경기에서 90분간 승부를 가리지 못하여 연장전을 치렀고 그 중 두 경기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전이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이번 대회에서 한국과 함께 조별리그 무패-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며 강력한 우승후보로 평가받았던 세 팀 중 이란과 일본이 모두 승부차기의 벽에 가로막혀 탈락하는 이변이 벌어졌다. 연장전에서 손흥민의 멀티골로 우즈벡을 2-0으로 제압하며 승부차기의 저주를 피한 한국만이 살아남아 무패-무실점 기록을 이어나가게 됐다. 지난 대회 디펜딩챔피언 일본과, 중동축구의 맹주로 꼽히던 이란의 탈락은 이번 아시안컵 판도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란, 비매너 침대축구에 내려진 '천벌'

이란과 이라크는 중동의 대표적인 앙숙이다. 1980년대 7년 전쟁까지 치렀던 양국은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도 닮은 듯 다른 대립관계에 놓여있어서 마치 극동에서 한국과 일본의 사이를 연상케 한다. 양국의 치열한 라이벌 의식을 반영하듯, 축구 경기 역시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할만큼 과열되는 경우가 많다. 이날 경기는 그야말로 이번 아시안컵 최고의 명승부(혹은 코미디)라도 할만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대혈전이었다.

객관적 전력에서 우위로 여겨졌던 이란의 몰락은 전매특허가 되어버린 비매너 침대축구의 남용에서 시작됐다. 이란은 전반 24분 사르다르 아즈문의 선제골로 1-0 리드를 잡고 있었다. 이란의 장기인 수비축구로 여유 있게 경기를 주도할 수 있었던 상황. 전반이 거의 끝나가던 43분, 이라크의 잘랄 하산 골키퍼가 넘어지며 공을 감싸 쥐었다. 그런데 공을 쫓던 이란 수비수 메흐다드 풀라디는 이미 하산 골키퍼가 잡은 공을 슬쩍 발로 찼다. 이미 하산 골키퍼가 먼저 볼을 점유한 상황에서 누가 봐도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화가 난 하산 골키퍼는 일어서면서 풀라디의 가슴을 밀쳤다. 하산 역시 흥분하여 감정적인 대응은 했지만 문제는 풀라디의 그 다음 반응이었다. 과장된 동작으로 그라운드에 넘어진 풀라디는 큰 타격이라고 당한 듯 그라운드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위험한 반칙을 저질러 불리한 상황에서 심판의 눈을 속이기 위한 꼼수였다.

그러나 벤 윌리엄스 주심은 지체 없이 풀라디에게 옐로카드를 내밀었다. 풀라디는 이미 전반 22분 옐로카드 한 장을 받은 상태였다. 쓸데없는 파울에다가 할리우드 액션으로 심판을 속이려고 했던 비매너 플레이가 결국 자충수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풀라디는 경고누적으로 퇴장 당했고, 이란은 갑작스러운 수적 열세에 빠지게 됐다. 이란 선수들과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은 주심에게 거세게 항의를 했지만 판정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이 장면이 이날 경기의 최대 분수령이 됐다. 수적 열세에 몰린 이란은 원치 않는 선수교체까지 해야 했고, 후반 들어 이라크에 점유율을 빼앗긴 채 수세적인 경기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반 11분 이라크 아흐메드 야신에게 결국 동점골을 허용했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흘렀다. 조별리그까지 무실점 기록을 이어갔던 이란은 다시 연장전에서만 두 골을 더 내주며 이날에만 3실점을 허용했다.

이란도 호락호락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라크가 경기를 뒤집으며 리드를 잡았지만 이란은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세트피스를 통해 골을 터뜨리며 두 번이나 다시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려놓는 저력을 과시했다.

120분간 가리지 못한 승부는 결국 승부차기까지 이어졌고 여기에서 팽팽한 혈전이 이어진 끝에 결국 7-6 이라크의 신승으로 끝났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승부차기가지 끌고 간 이란의 저력은 인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풀라디의 퇴장이 아니었다면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피할 수 없었다. 과도한 침대축구와 할리우드 액션이 어떤 재앙을 불러오는지 교훈을 남긴 경기이기도 했다.

일본, 35슈팅에 1골. 악몽의 골 결정력

디펜딩챔피언 일본은 지난해 브라질월드컵에서 보여준 고질적인 골 결정력에 대한 약점을 되풀이 했다.압도적인 볼 점유율로 경기를 주도하고도 정작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결정력의 한계는 일본의 오랜 아킬레스건이었다.

일본은 이날 UAE를 상대로 연장전까지 볼점유율 68-32, 슈팅수는 35-3으로 거의 일방적인 경기를 펼쳤다. 혼다 케이스케, 오카자기 신지, 카가와 신지 등 베스트멤버들이 총출동한 하여 무수한 슈팅을 날리고도 정작 문전으로 향한 유효슈팅은 고작 8개에 불과했다.

일본의 골 결정력 문제는 기술적인 부분보다 '멘탈게임'과도 무관하지 않다. 월드컵에서도 드러났듯이 자신들이 의도한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 평정심을 잃고 스스로 무너지는 정신력의 문제다. 일본은 이날 한 수 아래로 꼽힌 UAE를 상대로 전반 7분 만에 상대 알리 마브코트에게 기습적인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가는 상황을 초래했다. 뜻밖의 일격에 당황한 일본 선수들은 공세에 나섰지만 조별리그에서 보여준 정교하고 짜임새 있는 플레이를 재현하지 못했다.

일본의 부진과 더불어 UAE의 효율적인 경기운영능력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수 없다. 당초 UAE는 이번 대회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조별리그에서 걸프컵 우승팀 카타르를 대파하고 이란과도 석패하는 등 인상적인 경기력으로 잠재력을 보여줬다. 실제로 이날 일본전에서도 겉보기에 주도권을 일본에 내준 것 같지만 짜임새 있는 수비조직력을 앞세워 실질적으로 위험한 찬스는 많이 허용하지 않았다.

오마르 압둘하르만을 중심으로 한 UAE의 중원 압박과 역습은 일본을 상대로 크게 밀리지 않았고 한정된 공격 기회에서 위협적인 장면도 꽤 많이 만들어냈다. 마제르 나세르 골키퍼의 뛰어난 선방도 일본의 슈팅을 여러 차례 무력화시켰다. 특히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중동 특유의 침대축구를 펼치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래도 일본은 후반 36분 교체 투입된 시바사키 가쿠가 동점골을 터뜨리며 1-1 균형을 맞추는데 성공했다. 이날 부진했던 플레이메이커 엔도 야스히토를 대신하여 후반 9분 교체 투입된 시바사키는 혼다와의 2대 1패스에 이은 반 박자 빠른 논스톱 슈팅으로 골문 구석을 갈랐다. 이날 일본의 플레이중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상승세는 딱 거기까지였다. 동점을 허용한 이후에도 승부차기까지 가겠다는 목적의식이 명백했던 UAE에 비하여 일본 선수들은 오히려 동점골로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바사키의 만회골로 끌어올린 흐름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하비에르 아기레 일본 감독은 이날 유난히 부진했던 엔도, 오카자키 등을 일찍 교체하면서 후반 중반을 넘기기 전에 교체카드를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연장에서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 주축 선수들을 바꿔줄 카드나 전술적 변화를 단행할 수 없었다. 결국 지루한 연장전을 지나 승부차기에서 일본은 믿었던 첫 번째 키커 혼다와 마지막 키커 가가와가 실축하며 UAE에 4강행 티켓을 내주고 말았다.

과거 중동팀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공세에도 골 결정력 부족으로 종종 덜미를 잡히고 했던 한국으로서도 낯설지 않은 반면교사로 삼아야할 일본의 초라한 몰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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