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가와 어우러진 이 마을 담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흙돌담이 주류나 붉은 벽돌을 사용한 꽃담, 거푸집담 등 여러 담이 있다
▲ 함라마을 옛담 고가와 어우러진 이 마을 담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흙돌담이 주류나 붉은 벽돌을 사용한 꽃담, 거푸집담 등 여러 담이 있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만민이 함열(咸悅)하니 격양가성(擊壤歌聲)이라 했다. 작자미상의 <호남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인심은 함열이요, 풍속은 화순이라던 신재효본(申在孝本) <호남가>의 다른 버전이다. 

격양가성, 너무나 살기 좋아 백성들이 땅 치며 노래하는 소리다. 살기 좋고 인심 좋아 모두(咸) 기뻐(悅)하며 격양가를 부르는 고장이 함열(咸悅)이다. 이런 함열의 중심에 함라마을이 있다.

만석꾼이 셋이나 나온 함라마을

삼부자 집이 얼마나 큰지 담이 마을길이 되고 골목길이 되었다
▲ 함라마을 골목담 삼부자 집이 얼마나 큰지 담이 마을길이 되고 골목길이 되었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조그만 마을에 만석꾼이 셋이나 나왔다. 마을사람들은 삼부자 탄생을 물길 좋고 땅이 비옥한 덕분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마을사람들 말에, 마을 뒷산 함라산은 스님이 장삼 입고 손 벌리는 모양이고 삼부자 집은 스님 밥주발 터라 하여 명당 중에 명당이란 것. 여기에 선조의 선행이나 공덕을 부자가 되는데 필요조건으로 믿고 있다.

삼부자, 모두 조선 말에 이룬 부자들인데 당시 전국 90여 명 만석꾼 중 3명이 이 마을에서 나왔단다. 게다가 천석꾼 4명에, 백석꾼이 20명 정도였단다. 이러고 보면 천석꾼은 이 마을에서 명함도 못 내민 부촌 중에 부촌이었다.

오죽하면 삼부자 땅을 밟지 않고서는 한양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 나왔을까? 뉘 집 땅을 밟지 않으면 마을에 들어서지 못한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한양에 가지 못한다는 말은 처음이다. 부의 스케일이 다르다. 시쳇말로 재벌급 부자인 셈이다.

삼부자는 조해영·김안균·이배원 집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집들이 얼마나 큰지 담이 마을길이 되고 골목을 만들었다. 담 끼고 삼부자 집을 한 바퀴 돌면 얼추 동네 한 바퀴를 다 도는 셈이다. 삼부자 집안 내력이나 부자가 된 재미난 이야기는 마을 어른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와 주저리주저리 마을 담에 매달렸다.

문만 12개인 '열두대문집', 조해영 가옥

남사마을 사양정사, 안의 허삼둘 가옥처럼 1920년전 후에 지어진 커다란 솟을대문은 부의 상징이었다
▲ 조해영 가옥 솟을대문 남사마을 사양정사, 안의 허삼둘 가옥처럼 1920년전 후에 지어진 커다란 솟을대문은 부의 상징이었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마을 어귀에 버티고 선 조해영 가옥. 1918년에 지어졌다는데 얼마나 큰지 문만 열두 개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도 '열두대문집'. 광산이나 농장, 방직회사에 투자해 돈을 벌었다 들었다. 손 탄 지 오래되어 본채는 헐리고 안채와 별채, 문간채만 남았는데 푸석푸석해진 정원과 연못, 치장한 디테일은 이 집의 옛 영화를 전하고 있다. 집이 온전했다면 나 같은 사람은 구경도 못했을 대단한 집이다.

집안 여성을 위해 안채를 가리는 헛담은 꽃담으로 쌓았다. 이 꽃담만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꽃담 바깥벽은 경복궁 자경전의 십장생굴뚝을 본떠 만들었고 꽃담 안벽은 붉은 벽돌로 테두리를 점선무늬로 돌린 뒤 가운데 네모난 곳은 우리에게 익숙한 흙돌담으로 쌓았다. 어설피 흉내 내 돈 자랑하는 것 같은 십장생꽃담보다 이 꽃담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한쪽은 십장생꽃담이고 다른 한쪽은 붉은 벽돌로 테두리를 점선무늬로 돌린 뒤 가운데는 우리가 흔히 보는 흙돌담으로 쌓아 회칠한 꽃담이다
▲ 조해영 가옥 꽃담 한쪽은 십장생꽃담이고 다른 한쪽은 붉은 벽돌로 테두리를 점선무늬로 돌린 뒤 가운데는 우리가 흔히 보는 흙돌담으로 쌓아 회칠한 꽃담이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꽃담 향기에 몸 실려 솟을대문 앞에 서면 함라산 향해 기차레일처럼 길게 뻗은 키 다른 두 직선담이 보인다. 함라노소로 가는 길고 긴 골목 담이 바깥에서 보면 이렇게 보인다. 키만 다른 게 아니다. 하나는 담 지붕을 암키와로 하였고 다른 하나는 수키와, 골기와로 하여 묘한 대조를 이룬다.  

전북에서 제일 큰 집, 김안균 가옥

전북에서 제일 큰 집답게 집담이 마을길이 되었다. 회칠한 점선무늬 꽃담, 붉은 벽돌 점선무늬 꽃담, 흙돌담, 시멘트담 등 담도 다양하다
▲ 김안균 가옥 담 전북에서 제일 큰 집답게 집담이 마을길이 되었다. 회칠한 점선무늬 꽃담, 붉은 벽돌 점선무늬 꽃담, 흙돌담, 시멘트담 등 담도 다양하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1922년에 지어진 김안균 가옥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전북에서 제일 크다고 소문난 집이다. 담은 높고 문이 닫혀 안을 통 들여다볼 수 없다. 그러나 족히 300미터 넘어 보이는 바깥담 구경만으로 눈이 즐겁다.

이집 담은 길기도 하지만 종류도 많다. 대문을 중심으로 양편에 굴뚝과 어우러진 점선무늬 회벽꽃담이 있고 조해영 가옥 쪽으로 내려가면 붉은 벽돌 점선무늬꽃담이 있다. 회벽꽃담과 붉은 벽돌 점선무늬꽃담사이의 시멘트담은 좀 파격적으로 보인다. 특히 붉은 벽돌꽃담은 아랫단은 일반적인 흙돌담으로 쌓고 윗단은 붉은 벽돌로 점선무늬를 냈는데 다른 데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인상적인 담이다. 

함라노소로 길게 뻗은 직선담으로 엄숙, 질서, 절제 등 이 마을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함라마을 직선담 함라노소로 길게 뻗은 직선담으로 엄숙, 질서, 절제 등 이 마을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함라노소로 꺾어진 곳은 곡선으로 부드럽게, 길게 뻗은 골목담은 직선으로 올곧게 쌓았다. 아래 두 세단은 막돌로 건성쌓기 하여 밑뿌리를 튼튼히 하고 위에는 돌과 흙으로 우리가 흔히 접해본 돌죽담으로 쌓아 자칫 엄숙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직선담에 정붙일 여유를 주었다.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이 있고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고 했던가? 박헌영의 후배며 서울 혜화장의 주인인 김해균은 이 집안 사람으로 김안균의 형이다. 혜화장은 박헌영이 1945년부터 3년간 거주했고 조선공산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한 곳이다. 김해균은 박헌영과 함께 월북한 후, 계속 북에서 활동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아랫단은 흙돌담, 윗단은 붉은 벽돌로 점선무늬를 낸 꽃담이다. 다른 데서는 구경하기 힘든 인상적인 담이다
▲ 김안균 가옥 꽃담 아랫단은 흙돌담, 윗단은 붉은 벽돌로 점선무늬를 낸 꽃담이다. 다른 데서는 구경하기 힘든 인상적인 담이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꺾어진 곳은 부드럽게 곡선담을 쌓았다. 왼쪽은 붉은 벽돌 점선무늬 꽃담, 직선이 시작되는 오른쪽은 흙돌담으로 쌓아 질리지 않는다
▲ 김안균 가옥 곡선담 꺾어진 곳은 부드럽게 곡선담을 쌓았다. 왼쪽은 붉은 벽돌 점선무늬 꽃담, 직선이 시작되는 오른쪽은 흙돌담으로 쌓아 질리지 않는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형이 월북했으니 감시의 대상이 된 것은 뻔했다. 지금도 문을 닫고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지 모를 일이다. 헝겊조각이 삭아 없어질 만큼 세월이 흘렀다. 걸어 잠근 빗장 안에 응어리가 남아 있다면 빗장너머 세상 밖으로 내던져도 된다.  

김안균 가옥 뒤편에 좀처럼 보기 드문 담이 있다. 거푸집을 담 양편에 대고 그 사이에 황토와 짚을 넣고 다져 쌓은 거푸집 담이다. 황토에 희끗희끗한 지푸라기가 박혀 한지처럼 보이는 것이 디새죽담처럼 투박하지 않고, 토담이나 돌죽담처럼 토속적이지 않으며, 궁궐의 꽃담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것이 담박하기만 하다.

부를 일군 내력이 재미난 이배원 집안

사진 왼쪽, 거푸집 담은 거푸집을 담 양쪽에 대고 그 안에 흙과 짚을 채워 만드는 전통방식 담이다. 꽃담, 흙돌담, 거푸집담, 돌담까지 함라마을 담은 다양하다
▲ 함라마을 거푸집담 사진 왼쪽, 거푸집 담은 거푸집을 담 양쪽에 대고 그 안에 흙과 짚을 채워 만드는 전통방식 담이다. 꽃담, 흙돌담, 거푸집담, 돌담까지 함라마을 담은 다양하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이배원 집안은 부를 일군 내력이 재미나다. 이배원의 조부는 임피 사람으로 가산이 몰락하여 마지막으로 찾으려한 곳이 함라산 너머, 웅포에 있는 처갓집인데, 처갓집 가는 길에 하룻밤 묵은 곳이 함라마을이었다. 여기서 신세 타령하며 처갓집에 간다고 하니 처갓집에 뭐 하러 가냐며 마을사람이 권하여 시작한 것이 누룩장사였다.

누룩장사로 기반을 다진 뒤, 교통이 좋은 웅포나루를 이용, 곡식을 사고팔고 하여 큰돈을 벌었다.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다 하고 집수리 중에 창고에서 엽전이 엄청나게 나왔다는 말도 있다. 지금도 창고바닥을 긁으면 엽전이 나온다는 믿거나 말거나하는 얘기도 들린다.

1917년, 삼부자 집중에 가장 일찍 지어진 이배원 가옥은 안채는 원형이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사랑채 일부는 원불교교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길게 휘어진 흙돌담은 그대로 남아 예전 이 집안의 '왕년가세(往年家勢)'를 자랑하고 있다. 

이배원 가옥은 안채는 그대로나 사랑채 일부는 원불교교당으로 사용되어 옛 모습은 잃었으나 길게 휘어진 담은 이 집의 ‘왕년가세’를 말하고 있다.
▲ 이배원 가옥 담 이배원 가옥은 안채는 그대로나 사랑채 일부는 원불교교당으로 사용되어 옛 모습은 잃었으나 길게 휘어진 담은 이 집의 ‘왕년가세’를 말하고 있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이 마을 삼부자는 돈만 많이 번 게 아니라 돈을 쓸 줄 알아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보릿고개나 흉년이 들면 정보 빠른 전국 걸인들이 모여들고 소작거리 없는 소작인들은 겨울에 함열로 몰려들었다. 이들 삼부자는 이들을 내치지 않고 기꺼이 거두어 들였다. 인심은 함열, 만민이 함열하여 격양가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함열하며 격양가 부르며 살아볼꼬? 고깃간 문 앞에서 잘강잘강 고기 씹는 시늉을 하며 식욕을 달래듯(도문대작, 屠門大嚼), '찌질'한 모습으로 격양가나 마음속으로 불러 보리라.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편히 쉬네. 우물 파 물 마시고 논밭 갈아 밥 먹으니, 임금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덧붙이는 글 | 2014.12.29~30(익산, 정읍,담양, 영암, 강진)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태그:#함라마을, #함라마을담, #조해영 가옥, #김안균 가옥, #이배원 가옥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