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바디스> 포스터 영화 <쿼바디스>의 포스터. 2014년 12월 10일 개봉.

▲ <쿼바디스> 포스터 영화 <쿼바디스>의 포스터. 2014년 12월 10일 개봉. ⓒ 단유필름


부모님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교회라는 건물에 발을 들인 나는 이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종교의 언어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의 언어는 성서에 나온 말이라기보다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 통용되는 표현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목자는 기름부음 받은 존재이므로 항상 존중하고 순종해야 한다"라는 식의 구절들이 있겠다.

뜻밖의 계기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교회 내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형제들과 자매들의 만남을 장려하는 것이 귀에 걸렸던 것이다. 당시 나는 아마존의 부족을 떠올렸던 것 같다. 권위적이고 절대적인 부족추장을 필두로 한정된 지역 내에서 음식과 몸을 전부 나누는 상상 속 부족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모습이 종교 공동체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졌다.

짝짓기에 한창 관심이 많은 청춘들에게야 별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질 법한 말이지만 불행히도 나는 하필 그 무렵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하기로 작정했던 터였다.

20년 넘은 개신교 신자인 나, 교회를 불신하게 됐다

한 걸음 물러서서 교회라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건물에 대한 불신은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이후 무신론에 대한 책들을 몇 권 뒤적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믿지만 교회라는 건물은 믿지 않게 되었다.

내가 믿는 신의 이름이 까맣게 얼룩지는 것이 과연 교회라는 건물의 잘못인지 아니면 성서에 나오는 핍박인지 궁금했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개독'이라는 단어의 출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말 많고 탈 많은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기본 교리는 의외로 굉장히 단순하다. 비신자에게 전도를 시도할 때 사용하는 색색의 구슬 팔찌도 이 다이어그램과 다르지 않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인기몰이를 했었다. 영화에는 서로 다른 차원의 세상이 나온다. 두 세상은 연결되어 있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세상이다.

인간계와 신계가 존재한다. 이 둘도 완전히 다른 세계다. 그리고 거기에는 예수라는 교집합이 있다. 성서에 따르면 인간계와 신계의 합치를 유일하게 이룬 사람이 예수다. 그래서 주일학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신계에 있던 신이 인간계에 내려와 신계와 인간계를 이어주는 다리, 즉 교집합이 되었다. 인간들은 이 교집합의 존재를 믿어야 신계로의 진입이 가능하다."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봤다. 대형교회의 실체를 폭로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조용히 방에 앉아 이 다이어그램을 그렸다. 그리고 나는 두 세계 사이의 혼돈에서 '개독'이라는 조롱이 출현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신앙과 목숨을 맞바꾼 사람들에게 어울릴만한 단어는 교회라는 건물에 적합하지 않다. 개독은 핍박이 아니다.

인간계에는 세상을 순조롭게 굴러가게 하기 위한 도덕적 합의가 있다. 인간계가 신계와 같다면 법 따위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매일 뉴스거리가 넘쳐날 정도로 인간의 본성은 청렴하지 못하다. 일차적인 오류는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인간계에서의 비도덕과 불법에 대한 면죄부를 신계에서 찾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성추행범이 버젓이 새로운 교회건물을 세운다. 깨진 그릇이 정이 간다고 피력하는 데도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신계의 법칙이 핑계가 되었다.

인간계의 문제에 신의 이름을 대입하는 '정신분열'

정치에 신계를 대입하는 것도 문제다. 남북문제는 국가와 국가가 풀어가야 할 일이다. 진영논쟁은 인간계에서 끝나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신의 뜻이라 주장되어지는 어떠한 주장이 끼어든다. 종교지도자의 개인적 성향이 무슨 논리에서인지 신의 뜻으로 위장된다.

북한 지도부를 사탄으로 규정지음으로 종말론에 대한 불안을 조장하고 그것으로 또 헌금을 걷는 식이다. 이에 관해 영화는 MB의 선거운동이 간증집회로 시작되었음을 꼬집었다.

조금 다른 경우도 있다. 얼마 전 자신의 칼럼에 악성댓글을 단 네티즌을 처벌한 종교지도자의 소식을 접했다. 이 대응은 인간계에서 봤을 때 매우 합당하다. 실명으로 표명한 의견을 익명으로 물어뜯는 것은 인간계에서 범법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하는 포스트에 달린 댓글들을 보며 나는 갸우뚱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벌했다는 것이다. 또 같은 오류다. 인간계와 신계의 혼동이다.

잊을만 하면 한 번씩 거론되는 교회세습을 마지막 예로 들고자 한다. 교회라는 건물에서 통용되는 표현에는 이런 말도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먹이신다."

성서를 심도 있게 파고들어보지 않았기에 그 선이 어디까지일지는 불명확하지만 비슷한 말들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성서에서 뜻하는 바가 그것이든 아니든, 교회세습이 정말 신의 뜻이었다면 세습을 작정한 이들은 인간계에서 정당성을 주장할 때도 그 맥락을 같이 해야 했다.

영화에서 어떤 지도자는 "이건희가 이재용에게 물려주는 것은 괜찮고, 내가 내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왜 안 된다고 하느냐?"라고 묻는다. 신의 뜻임을 강조하려 인간계에서 근거를 찾다니. 이쯤이면 거의 정신분열 수준이다.

 개신교의 원리를 보여주는 다이어그램

개신교의 원리를 보여주는 다이어그램 ⓒ 박유진


영화를 보고 이렇게 글로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기본적인 다이어그램만 숙지하고 있다면 생길 수 없는 오류들이 가득하다. 영화에서 말하듯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체계의 오류더미 속에서 교집합은, 예수는 점점 작아져간다. 비상식이 상식이 되고, 상식이 기적이 되는 곳. "쿼 바디스(Quo Vadis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10여 년 전 일기에 적어놓았던, 서태지 자퇴서의 도입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세상을 알기엔 아직 어린 나이
세상에 의지하기엔 이미 커버린 나는
이 혼돈 속의 정리를 원한다.

쿼바디스 대형교회 개독 개신교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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